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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교

기본정보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에 놓았다고 전해지는 다리

일반정보

귀교(鬼橋)는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에 놓았다고 전해지는 다리로, 신원교(神元橋)라고도 한다. 『삼국유사』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조에 진지왕(眞智王)이 죽어서 낳은 아들인 비형(鼻形)이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전문정보

귀교(鬼橋)는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에 놓았다고 전해지는 다리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조에 진지왕(眞智王)이 죽어서 낳은 아들인 비형(鼻形)이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신원사(神元寺)의 창건시기나 폐사시기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으나 다만 신원사는 다리를 놓을 때 이미 존재하였으므로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대 이전에 이미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고적조에 의하면 경주 월남리(月南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경주 오릉(五陵)의 서남쪽을 신원평(神元坪)이라고 칭하며 따라서 이 곳을 신원사 터로 비정하고 있다.(진성규·이인철, 2003)

신원사 북쪽 도랑에 놓았다는 귀교(鬼橋)는『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조에 보이는 바와 같이 비형(鼻形)이 진평왕의 명으로 하루만에 완성한 다리이다. 혹은 황천(荒川) 동쪽 도랑에 놓았다고도 한다. 황천은 경주의 남남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내천에서, 토함산(吐含山)에서 발원(發源)하여 남천(南川)으로 흘러들어가 다시 서천(西川)으로 합류하는 내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고적조에는 귀교가 “신원사 옆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곧이어 『삼국유사』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조의 설화가 전개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교량조에는 경주부 서쪽 십리에 있다고 하는 “신원교(神元橋)”가 보이는데 이것이 귀교의 이칭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강인구 외, 2002)

비형의 초월적 능력으로 하룻밤만에 완성한 귀교는 의식 속의 이승과 저승을 잇는 경계의 징표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곧 설화에서 나타난 죽은 진지왕의 혼령과 살아있는 어머니와의 결합인 이승과 저승의 결합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에서 태어난 비형은 다리와 같은 매개체로서 이승과 저승의 매개자가 되는 도깨비가 되는 것이다. 도깨비는 대장일과 같이 두드리는 소리와 그 동사적 움직임을 명사화한 “두두리(豆豆里)”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따라서 이 설화는 초기 신라 설화에서 그 신성성을 부여받았던 야장신(冶匠神)이 진지왕대에 이르러 두두리가 토목공사에 그치는 일을 하는 등 그 신성성을 잃어버린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견해도 있다.(강은해, 2003)

참고문헌

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2002, 『譯註 三國遺事』Ⅲ, 이회문화사.
강은해, 2003, 「도깨비의 공간론-현실과 초월의 다리」『한국문학이론과 비평』 20.
진성규·이인철, 2003, 『신라의 불교사원』, 백산자료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
桃花女 鼻荊郞
第二十五舍輪王 諡眞智大王 姓金氏 妃起烏公之女 知刀夫人 大建八年丙申卽位[古本云 十一年己亥 誤矣] 御國四年 政亂荒<淫> 國人廢之 前此 沙梁部之庶女 姿容艶美 時號桃花娘 王聞而召致宮中 欲幸之 女曰 女之所守不事二夫 有夫而適他 雖萬乘之威 終不奪也 王曰 殺之何 女曰 寧斬于市 有願靡他 王戱曰 無夫 則可乎 曰可 王放而遣之 是年 王見廢而崩 後二年其夫亦死 浹旬忽夜中 王如平昔來於女房曰 <汝>昔有諾 今無汝夫 可乎 女不輕諾 告於父母 父母曰 君王之敎 何以避之 以其女入於房 留御七日 常有五色雲覆屋 <香>氣滿室 七日後 忽然無? 女因而有娠 月滿將産 天地振動 産得一男 名曰鼻荊 眞平大王聞其殊異 收養宮中 年至十五 授差執事 每夜逃去遠遊 王使勇士五十人守之 每飛過月城 西去荒川岸上[在京城西] 率鬼衆遊 勇士伏林中窺伺 鬼衆聞諸寺曉鐘各散 郞亦歸矣 軍士以事來奏 王召鼻荊曰 <汝>領鬼遊 信乎 郞曰 然 王曰 然則<汝><使>鬼衆成橋於<神>元寺北渠[一作 神衆寺 誤 一云 荒川東深渠] 荊奉? 使其徒鍊石 成大橋於一夜 故名鬼橋 王又問 鬼衆之中 有出現人間輔朝政者乎 曰 有吉達者 可輔國政 王曰 與來 翌日荊與俱見 賜爵執事 果忠直無雙 時角干林宗無子 王?爲嗣子 林宗命吉達創樓門於興輪寺南 每夜去宿其門上 故名吉達門 一日吉達變狐而遁去 荊使鬼捉而殺之 故其衆聞鼻荊之名 怖畏而走 時人作詞曰 聖帝魂生子 鼻荊郞室亭 飛馳諸鬼衆 此處莫留停 鄕俗帖此詞以?鬼
도화녀(桃花女) 비형랑(鼻荊郞)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이다.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 8년 병신(576)에 왕위에 즉위하였다.[고본에는 11년 기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나라를 다스린지 4년 만에 정사가 혼란해지고 주색에 빠져 국인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앞서 사량부(沙梁部) 서녀가 용모가 아름답고 고와 당시 도화랑이라고 불렀다. 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 상관(相關)하고자 하니 여인이 아뢰기를, “여자가 지킬 일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로 가는 것은 비록 제왕의 위엄으로서도 끝내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차라리 저자거리에서 참수될지라도 딴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하니 왕이 희롱하며 말하기를,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그러하옵니다.”하였다. 왕은 여인을 놓아줘 돌려보냈다. 이 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었다. 그 후 2년 만에 여자의 남편도 죽었다. 열흘 후에 홀연히 밤 중에 왕은 평소처럼 여자의 방에 와서 말하기를, “네가 예전에 허락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하니 여자는 가벼이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물었다. 부모가 말하기를, “군왕의 말씀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하고는 그 딸을 방에 들여보냈다. 왕이 7일 동안 머물렀는데 항상 오색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7일 뒤 홀연히 자취가 없어졌다. 여인은 이내 임신을 하였고 달이 차서 낳으려 하자 천지가 진동하더니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하였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기이함을 듣고 거두어들여 궁중에서 길렀다. 나이 15세가 되자 집사직(執事職)을 주었다.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노니 왕은 용사 50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는데, 매번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 서쪽 황천 언덕 위[서울 서쪽에 있다]에 가서 귀신들을 거느리고 놀았다. 용사(勇士)들이 숲 속에 엎드려 엿보니 귀신들은 여러 절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 뿔뿔이 흩어졌고, 비형랑도 또한 돌아왔다. 군사가 돌아와 사실대로 와서 아뢰니 왕은 비형을 불러 물었다. “네가 귀신을 데리고 논다는 말이 정말이냐?” 낭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또는 황천(荒川) 동쪽 깊은 도랑이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하니, 비형랑이 명을 받들어 귀신들을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러므로 귀교(鬼橋)라고 불렀다. 왕은 또 묻기를, “귀신들 가운데 인간으로 출현하여 정사를 도울 자가 있느냐?”하니,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는데, 나라의 정사를 도울 수 있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데리고 오너라” 하였다. 이튿날 비형랑이 길달을 데리고 함께 와서 뵈었다. 집사 벼슬을 주었는데,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견줄 바 없었다. 이때 각간 임종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왕이 명하여 대를 이을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이 명하여 길달로 하여금 흥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하니, 밤마다 그 문 위에 가서 잤으므로 길달문이라 하였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가니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그러므로 그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이 글을 지어 이르기를, “성제(聖帝)의 혼령이 낳은 아들인 비형랑의 집과 정자이니, 날고뛰는 모든 귀신들아, 이곳에 머물지 마라!” 라고 하였다. 민간풍속에 이 글을 집에 붙여서 귀신을 물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