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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기본정보

현재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3번지에 위치한 신라 선덕왕(善德王) 3년(634) 에 개창된 사찰

일반정보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3번지 일대에 위치한 분황사(芬皇寺)는 신라 선덕왕(善德王) 3년(634)에 개창되었는데, 당시의 왕권 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의상(義湘), 원효(元曉), 설총(薛聰) 등의 고승들이 주석한 사찰로 유명하다. 분황사는 초창된 이후에 3차례의 중창을 거치고,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 등의 재난을 겪으면서 쇠락해 졌는데, 현재는 작은 규모의 사찰로 남아있다.

전문정보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3번지 일대에 위치한 분황사(芬皇寺)는 『삼국유사』 권1 기이 진한조에서 금입택(金入宅)을 언급하면서 분황사(芬皇寺)의 상방(上坊)에 판적택(板積宅)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분황사가 중요한 위치에 배치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권3 흥법 아도기라(阿道基羅)조에 전불시대(前佛時代) 칠처가람(七處伽藍)으로서 흥륜사(興輪寺), 영흥사(永興寺), 황룡사(皇龍寺), 영묘사(靈妙寺), 천왕사(天王寺), 담엄사(曇嚴寺)와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신라 불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찰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사』 권3 흥법 아도기라(阿道基羅)조에서는 칠처가람(七處伽藍)을 언급하면서 “용궁북(龍宮北)[지금의 분황사이다. 선덕왕(善德王) 갑오(634)에 처음 개창되었다.(龍宮北[今芬皇寺 善德王甲午始開])”라고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선덕왕(善德王) 3년(634)조에서도 “봄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었다. 분황사(芬皇寺)가 완성되었다.(春正月 改元仁平 芬皇寺成)”라고 되어 있어서 창건시기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분황사가 건립되기 시작한 시기는 이보다 빠른 시기일 것이며, 분황사 사역의 규모에 따른 공사기간을 감안한다면 진평왕대 말기나 늦어도 선덕왕이 즉위한 직후일 것으로 추정된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6)

그리고 분황사가 완공시기에 연호(年號)가 변경되고 있는데, 분황사라는 명칭을 살펴보더라도 선덕왕의 관심이 얼마나 투여된 사찰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분황사의 명칭에 대하여 “분(芬)”은 연꽃 혹은 연꽃이 활짝 핀 상태를 뜻하는 분타리(芬陀利)에서 따온 것이고, 황(皇)은 “각황(覺皇)”의 줄임말로서 세상의 괴로움과 번뇌에 물들지 않은 분타리와 같은 가르침의 도장으로 풀이한 경우가 있다.(김영태, 1996)

한편 황룡사(黃龍寺), 황복사(皇福寺)의 명칭에서처럼 “황(皇)”은 일반적으로 신라왕실의 원찰을 의미하는 상징어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정정률(慈藏定律)조에서는 “분황사[『당전(唐傳)』에서는 왕분사(王芬)이라고 하였다].(芬皇寺[唐傳作王芬])”라는 구절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료를 통해서 “황(皇)”이 “왕(王)”과 통하는 것임이 확인된다. 또한 황복사지에서 왕복(王福)명 기와가 수습된 것처럼 금석문자료를 통해서도 “황”과 “왕”은 통용되는 경우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황(皇)은 임금을 의미한다고 파악하여 “향기로운 임금의 절”로 풀이하는 견해도 설득력이 있다.(남동신, 1999)

한편 분황사의 창건 배경에 대해서는 진평왕(재위 579-632년)대부터 지속된 백제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고, 선덕왕이 여왕으로서 통치하는 것에 따른 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찾은 견해가 있다. 특히 백제가 법왕(法王) 2년(600)에 왕흥사(王興寺)를 건립한 것과 연결하여, 백제가 불타의 은덕으로 신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있듯이 신라도 이에 버금가는 대형사찰을 건립하여 백제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줌으로서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이인철, 1999) 그리고 선덕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시기에 창건된 황룡사(黃龍寺) 북쪽에 붙여서, 비록 규모는 작지만 유사한 구조로 분황사를 창건한 것도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다는 분석도 있다.(남동신, 1999; 이강근, 1999)

이와 같이 대내외적인 외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분황사를 창건한 선덕왕은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분황사를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권4 의해 자장정율(慈藏定律)조에는 당(唐)에 있던 자장(慈藏, 590-658)을 불러들여서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아서 분황사에 주석케 했다는 내용이 있다. 선덕왕대는 명랑(明朗)과 밀본(密本)을 대표로하는 현실중심적인 밀교(密敎)가 발달하였는데, 국가의 수호와 사회의 안정에 사상적인 구심점으로 이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자장의 사상체계도 밀교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가 머무른 분황사에도 바로 그러한 성격이 투영되었을 것이다.(장지훈, 1999)

또한 『삼국유사』 권4 의해5 원효불복(元曉不覆)조를 통해서 자장의 뒤를 이어서 원효(元曉, 617-686)도 분황사에서 주석을 하였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계율(戒律)을 강조한 자장과 달리 원효는 계율상의 형식주의를 탈피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원효가 분황사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것을 통해서 선덕왕대 이후에 안정된 중대의 왕권이 배경이 되면서 분황사의 성격도 변화한다는 분석도 있다.(남동신, 1999)

그리고 『삼국유사』 권4 의해5 원효불복조에는 원효의 아들인 설총(薛聰)도 분황사에서 주석을 하였으며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유해를 부수어 소상(塑像) 진용(眞容)을 만들어서 분황사에 모시고 예배를 보았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와 같이 당대의 고승들이 분황사에서 주석을 했다는 것에서 당대 분황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 권48 열전8 솔거(率居)전에서는 “경주의 분황사 관음보살 …모두 그의 필적이다. 세상에 전하여져 신화(神畵)로 여겼다.(慶州芬皇寺觀音菩薩 … 皆其筆蹟 世傳爲神畵)”라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삼국유사』 권3 탑상 분황사천수대비 맹아득안(芬皇寺千手大非 盲兒得眼)조에 보이는 경덕왕(景德王) 시기에 있었다고 언급되는 분황사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千手觀音)일 가능성이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6)

또한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鐘)조에서는 “(경덕왕 14년(755)에) 분황사 약사동상(藥師銅像)을 주성(鑄成)하였는데 무게가 306,700근이다(鑄芬皇寺藥師銅像 重三十萬六千七百斤)”이라는 내용이 있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 장육(皇龍寺 丈六)조에 황룡사에 주성된 장육존상의 무게가 35,007근(斤)이라는 기사와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이다. 일단 수치의 정확성을 차치하고 분황사 보광전(寶光殿) 수리과정에서 확인된 상량문(上梁文)도 참고한다면, 분황사가 계속된 중창을 거치면서도 지속적으로 약사불(藥師佛)을 조성하였으므로, 분황사는 약사도량(藥師道場)의 성격을 지녀왔음을 강조한 연구도 있었다.(장충식, 1999)

이와 같이 신라의 중요한 사찰이었음에도 고려시대 이후에 분황사와 관련된 기록은 매우 드물다. 『고려사(高麗史)』 권11 세가11 숙종(肅宗) 6년(1101)에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의상에게 대성원교국사(大聖圓敎國師)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주처(住處)에 비를 세우고 덕을 기리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 불우(佛宇) 분황사조에서는 고려 명종(明宗)대(1170-1197)에 분황사에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건립되었음이 확인될 따름이다. 이렇게 분황사와 관련된 자료가 부족한 이유는 고려후기에 몽고의 침략과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손상을 입고 쇠락해졌기 때문인데, 지금도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로서 매우 작은 규모의 사역만 유지되고 있다.

창건기부터 신라시대의 사찰의 흔적을 보여주는 주요한 유적으로는 현재 3층만 남아있는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 국보 제30호)이 있다. 또한 『삼국유사』 권2 기이 원성대왕(元聖大王)조에는 당(唐)의 사자(使者)가 왕경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동지(東池)?청지(靑池)?분황사 우물속의 세 마리 용을 물고기로 바꾸어 가져가려는 것을 왕이 빼앗아 제자리에 놓아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석정(石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도 남아있다. 그리고 고려 명종(明宗)대(1170-1197)에 원효의 덕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의 비부(碑趺,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도 전해지고 있다. 비신은 파손되었는데, 잔존한 비부의 상면에는 조선시대에 김정희(金正喜, 1788-1856)가 “이것이 신라 화정국사비(和靜國師碑)의 흔적이다.(此新羅和靜國師之碑蹟)”이라고 새긴 글씨가 있다.

분황사의 주요한 건물로는 조선 광해군(光海君) 원년(1609)에 중창된 보광전(普光殿)과 근래에 세워진 승당(僧堂)·종각(鍾閣) 등이 있다. 보광전에 모셔진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像)은 보광전이 중창된 시기에 함께 조성되었다.

이렇게 규모가 축소된 분황사의 정확한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 1975년에 보광전 주위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중창을 통해서 분황사의 가람배치에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문명대, 1975) 이후 1990-2003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서 창건 이후에 3차에 걸친 중건이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창건가람은 분황사석탑을 중심의 ‘품(品)’자 형으로 감싸는 1탑 3금당식(一塔三金堂)의 배치였다. 현재 보광전이 위치한 부분에 중금당(中金堂)이 위치하고, 좌우에 서금당(西金堂)과 동금당(東金堂)이 위치하였는데, 솔거가 그렸다는 관음보살상이 서금당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창건가람은 자장과 원효가 머무르면서 주석하는 시기에 활용되었을 것이다.

1차 중건 가람은 창건가람의 3금당이 동시에 폐기되고 중금당 자리에 1.4배로 확대된 금당만 세워져서 1탑 1금당(一塔一金堂)으로 배치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덕왕(景德王) 14년(755)년에 분황사에 약사여래가 조성되면서 금당이 새롭게 건립되고, 후속불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13세기에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는 시기까지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15년 분황사석탑을 수리하면서 12세기대의 화폐가 발견되어 1차 중건 가람기에 석탑에 대한 보수도 이루어 졌음이 확인되었다.

2차 중건 가람은 사세가 기울면서 금당의 규모가 1/5로 축소되고 건물의 방향이 남향에서 서향으로 바뀐다. 이러한 2차 중건 가람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차 중건 가람은 2차 중건 금당의 1/3로 규모가 축소된 보광전(寶光殿)이 광해군 원년(1609)에 건립되면서 형성된다. 보광전에 남겨진 상량문(上樑文)을 통해서 광해군 5년(1613)에 중건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몇 차례의 수리를 거쳐서 현재 분황사의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되었음이 확인되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5)

참고문헌

문명대, 1975, 「芬皇寺 發掘調査 略報,」『考古美術』128.
김영태, 1996, 「芬皇寺와 元曉의 관계史的 考察」『元曉學硏究』1.
남동신, 1999, 「元曉와 芬皇寺 關係의 史的 推移」『芬皇寺의 諸照明』(新羅文化祭學術發表論文集-20), 신라문화선양회.
이강근, 1999, 「芬皇寺의 伽藍配置와 三金堂 形式」『芬皇寺의 諸照明』(新羅文化祭學術發表論文集-20), 신라문화선양회.
이인철, 1999, 「芬皇寺 創建의 政治?經濟的 背景」『芬皇寺의 諸照明』(新羅文化祭學術發表論文集-20), 신라문화선양회.
장지훈, 1999, 「慈藏과 芬皇寺」『芬皇寺의 諸照明』(新羅文化祭學術發表論文集-20), 신라문화선양회.
장충식, 1999, 「慶州 芬皇寺 道場性格과 藥師銅像」『芬皇寺의 諸照明』(新羅文化祭學術發表論文集-20), 신라문화선양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5, 『芬皇寺 發掘調査報告書』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6, 『芬皇寺 출토유물』.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진한)
辰韓[亦作秦韓]
後漢書云 辰韓耆老自言 秦之亡人 來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十二小國 各萬戶 稱國 又崔致遠云 辰韓本燕人避之者 故取?水之名 稱所居之邑里云沙?漸?等[羅人方言 讀?音爲道 故今或作沙梁 梁亦讀道] 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戶 一千三百六十坊 五十五里 三十五金入宅[言富潤大宅也] 南宅 北宅 于比所宅 本彼宅 梁宅 池上宅[本彼部] 財買井宅[庾信公祖宗] 北維宅 南維宅[反香寺下坊] 隊宅 賓支宅[反香寺<北>] 長沙宅 上櫻宅 下櫻宅 水望宅 泉宅 楊上宅[梁南] 漢?宅[法流寺南] 鼻穴宅[上同] 板積宅[芬皇寺上坊] 別敎宅[川北] 衙南宅 金楊宗宅[梁官寺南] 曲水宅[川北] 柳也宅 寺下宅 沙梁宅 井上宅 里南宅[于所宅] 思內曲宅池宅 寺上宅[大宿宅] 林上宅[靑龍之寺東方有池] 橋南宅 巷叱宅[本彼部] 樓上宅 里上宅 椧南宅 井下宅
진한(辰韓)[또는 진한(秦韓)이라 함]
『후한서』에서 이르기를 “진한의 늙은이가 스스로 말하기를 ‘진의 망명인들이 한국에 오니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어 서로 부르기를 도라 하며, 진나라의 말과 유사하므로 혹은 그것을 이름하여 진한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12개의 소국이 있었으며, 각각 만 호씩으로 국이라 칭하였다. 또한 최치원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의 사람들이 망명한 것이기 때문에 탁수의 이름을 취하고 살고 있는 읍리를 사탁?점탁 등으로 칭한다”고 하였다.[신라인의 방언에 탁을 도로 읽기 때문에 지금은 혹 사량이라 쓰고 양 또한 도라고 읽는다] 신라전성기 서울에는 17만 8936호(戶), 1360방(坊), 55리(里), 35개의 급입택(金入宅)[부윤한 큰 집을 말한다]이 있었다. 남택(南宅), 북택(北宅), 우비소택(于比所宅), 본피택(本彼宅), 양택(梁宅), 지상택(池上宅)[본피부(本彼部)], 재매정택(財買井宅)[김유신공의 조종(祖宗)], 북유택(北維宅), 남유택(南維宅)[반향사(反香寺)의 하방(下坊)], 대택(隊宅), 빈지택(賓支宅)[반향사(反香寺) 북쪽], 장사택(長沙宅), 상앵택(上櫻宅), 하앵택(下櫻宅), 수망택(水望宅), 천택(泉宅), 양상택(楊上宅)[양부(梁部)의 남쪽], 한기택(漢?宅)[법류사(法流寺) 남쪽], 비혈택(鼻穴宅)[위와 같다], 판적택(板積宅)[분황사(芬皇寺)의 상방(上坊)], 별교택(別敎宅)[천(川)의 북쪽], 아남택(衙南宅), 김양종택(金楊宗宅)[양관사(梁官寺)의 남쪽], 곡수택(曲水宅)[천(川)의 북쪽], 유야택(柳也宅), 사하택(寺下宅), 사량택(沙梁宅), 정상택(井上宅), 이남택(里南宅)[우소택(于所宅)], 사내곡택(思內曲宅), 지택(池宅), 사상택(寺上宅)[대숙택(大宿宅)], 임상택(林上宅)[청룡이라는 절(靑龍之寺)의 동쪽에 연못이 있다], 교남택(橋南宅), 항질택(巷叱宅)[본피부(本彼部)], 누상택(樓上宅), 이상택(里上宅), 명남택(椧南宅), 정하택(井下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