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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탑

기본정보

신라 선덕왕(善德王) 14년(645) 경주 황룡사(皇龍寺)에 조성되었던 목탑(木塔)

일반정보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은 경주 황룡사(皇龍寺)에 조성되었던 신라시대 최대 목탑으로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 천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신라 3보로 일컬어진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12년(643)에 짓기 시작하여 선덕왕 14년(645)에 완성되었다

전문정보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은 경주 황룡사(皇龍寺)에 조성되었던 신라시대 목탑으로,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천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신라3보”로 일컬어진다. 높이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대탑으로 추정되며(조유전, 1992), 그 연혁이 『삼국유사』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에 전해져온다.

황룡사(皇龍寺)는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14년(553)에 시작하여 17년만인 진흥왕 30년(569)에 완공된 사찰로, 진흥왕 35년(574)에는 황룡사장육상이 조성되었다고 전해진다.

황룡사구층탑의 조성연대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에서 “(자장이) 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과 불상과 가사와 폐백들을 가지고 귀국하여 국왕에게 탑 세울 사연을 아뢰었다.”, “선덕왕대인 정관 19년 을사(645)에 탑이 처음으로 완성되었다.”라는 기록과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선덕왕 14년(645)조에 “황룡사탑을 창조하니 자장의 청에 따른 것이다(創造皇龍寺塔 從慈藏之請也)”라는 기록으로 보아 자장(慈藏)의 건의로 선덕왕 12년(643)에 짓기 시작하여 선덕왕 14년(645)에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황룡사구층탑 조성 설화는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에 “자장(慈藏)이 …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곁을 지날 때 홀연히 신인이 출현하여 물었다 … 본국으로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 … 귀국하여 탑 세울 사연을 왕에게 아뢰었다 … 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 공사를 경영하였는데 이간(伊干) 용춘(龍春)이 일을 주관해 소장(小匠) 200명을 인솔했다.(慈藏…經由中國大和池邊 忽有神人出問…歸本國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而還國以建塔之事聞於上…匠名阿非知 受命而來 經營木石 伊干龍春幹蠱 率小匠二百人)”라고 하여 자세한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황룡사구층탑의 건립 계획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에서 인용하고 있는 안홍(安弘)의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들어 안홍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안홍은 수(隋) 문제(文帝)에 의해 582년 세워져 국가종교정책의 근본사원이었던 대흥선사(大興善寺)에 머물었던 행적이 있으며, 귀국하면서 불사리를 신라에 전했고 돌아와 황룡사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황룡사구층탑은 안홍이 대흥선사의 사리탑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와 건립되었다고 본다.(신종원, 1992)

한편,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에서 인용하고 있는 「사중기(寺中記)」에서는 자장이 종남산(終南山) 원향선사(圓香禪師)로부터 권유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흥선사 사리탑와 더불어 북위(北魏) 영태후(靈太后)가 516년에 40여장(丈)의 높이로 세운 영녕사(永寧寺) 구층목탑의 영향을 상정하기도 한다.(東伏見邦英, 1943) 따라서 황룡사구층탑 조성에 자장이 당 유학에서 쌓은 이러한 여러 견문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김상현, 1999)

그러나 자장의 발원이 있기 전에 이미 목탑이 조영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선덕왕 3년(634) 이미 창건된 분황사(芬皇寺) 금당의 기단축조방식이 황룡사 중건 목탑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 이미 목탑의 조영계획을 가지고 조영을 시도하였으나 중층목조건축을 조성할 수 있는 기술력이 부족하여 기단축조만을 한 후 아비지가 초빙되었을 것으로 본다. 또한 1960년대 발견된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紀)」에서 아비지가 대장(大匠)으로 나오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신라는 전반적인 조탑(造塔)의 계획과 공사과정을 관리하는 일, 기단부분이나 기와 제작 등의 기본적인 기술만 신라의 것을 사용하고 문제가 되는 곳만을 아비지가 지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양정석, 2004)

황룡사구층탑을 왕족 용춘(龍春)에게 감독을 맡겨서 탑을 세운 것은, 탑의 조성이 국가적 관심 속에 진행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役事)는 당시 여왕이 다스린다하여 업신여기던 풍조와 선덕여왕 11년(642) 백제의 침략으로 인한 대야성(大耶城) 등 40여성의 함락 등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며, 국가를 수호하고 나아가 통일 의지를 나타낸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남동신, 2001)

이러한 호국적 의미는『삼국유사』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조에서 인용한 안홍(安弘)의『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서 탑을 세움으로써 신라 주변 구한(九韓)의 침공을 막으려했다는데에서도 볼 수 있다. 제1층은 일본(日本), 제2층은 중화(中華), 제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단국(丹國),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濊貊)으로 상정하여 구한이라 일컫고 있는데, 구층탑의 각 층에 대응되는 나라들은 신라와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나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더불어 9라는 숫자는 전통적으로 천하(天下)를 상징하는 성수(聖數)이며, 따라서 9층탑은 신라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나타낸다는 것이다.(노중국, 2000) 그러나 이 기록은 막연히 이웃나라를 지칭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신종원, 1992) 한편 오월, 응유, 단국, 여적 등의 명칭은 10세기 이후에나 나타나는 것이며, 당대의 기록인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紀)」에는 구한이라는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9층과 9한을 연결시키는 것은 후대의 부회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신동하, 2001)

황룡사구층탑은 완성 후에도 여러 번의 중수(重修)가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이며, 1960년대 황룡사지에서 도굴되었다가 발견된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紀)」에 “문성왕대(文聖王代)에 이르니 (탑을 세운 지가) 오래 되어 (탑이) 동북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라에서 쓰러질까 염려하여 고쳐 세우고자 여러 재목을 모은지 30여년이 되었으나 아직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지금의 왕이 즉위한 지 11년인 함통(咸通)연간 신묘년(871)에 탑이 기울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그 해 8월 12일 처음으로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 안에 다시 무구정경(無垢淨經)에 의거하여 작은 석탑 99개에 각각의 석탑마다 사리 하나씩을 넣고, 다라니 네 가지와 경전 1권 위에 사리 1구와 안치하여 철반의 위에 넣었다. 이듬해 7월에 9층을 모두 마쳤다. 그러나 찰주가 움직이지 않아 왕께서 찰주에 본래 봉안한 사리가 어떠한지 염려하여 이간인 승지(承旨)에게 임진년(872) 11월 6일에 여러 신하를 이끌고 가보도록 하였다. 기둥을 들게 하고 보았더니 주초(柱礎)의 구덩이 안에 금과 은으로 만든 고좌(高座)가 있고 그 위에 사리가 든 유리병을 봉안해 두었었다. 그 물건은 불가사의한데 다만 날짜와 사유를 적은 것이 없었다. 25일에 본래대로 해두고 다시 사리 백 개와 법사리 두 가지를 봉안하였다. (왕이) 사유를 적고 창건한 근원과 고쳐 세운 연고를 간단히 기록하게 하여, 만겁이 지나도록 후세의 사람들에게 드러나도록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경문왕대의 중수가 자세히 전해진다. 다만 찰주본기에서는 경문왕 11년(871) 8월에 중수가 시작되어 이듬해인 872년 7월에 완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경문왕조에 11년(871) 정월에 중수가 시작되어 13년(873) 9월에 중수가 완료되었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목탑에 사리가 안치되어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구층탑은 사리불신앙(舍利佛信仰)으로서 신라 사람들에게 신봉되었음을 알 수 있다.(김상현, 1999)

황룡사 구층탑은 고려 고종(高宗) 25년(1238)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버리고, 현재 황룡사 터에는 초석과 대좌만이 남아 그 터가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4)

참고문헌

東伏見邦英, 1943, 「新羅の皇龍寺九層塔に關する一考察」『寶雲』31.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4,『皇龍寺址 遺蹟發掘調査報告書』.
신종원,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민족사.
김상현, 1999, 『新羅의 思想과 文化』, 일지사.
노중국, 2000, 「新羅와 百濟의 交涉과 交流」『新羅文化』17·18合.
남동신, 2001, 「新羅 中古期 佛敎治國策과 皇龍寺」『皇龍寺의 綜合的 考察』(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 論文集 22).
신동하, 2001, 「新羅 佛國土思想과 皇龍寺」『皇龍寺의 綜合的 考察』(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 論文集 22).
양정석, 2004, 『皇龍寺의 造營과 王權』, 서경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
天賜玉帶[淸泰四年丁酉五月 正承金傅獻鐫金粧玉排方腰帶一條 長十圍 鐫銙六十二 <曰>是眞平王天賜帶也 太祖受之 藏之內庫]
第二十六白淨王 諡眞平大王 金氏 大建十一年己亥八月卽位 身長十一尺 駕幸內帝釋宮[亦名天柱寺 王之所創] 踏石梯 二石幷折 王謂左右曰 不動此石 以示後來 卽城中五不動石之一也 卽位元年 有天使降於殿庭 謂王曰 上皇命我傳賜玉帶 王親奉跪受 然後其使上天 凡郊廟大祀皆服之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 何謂也 皇龍寺丈六尊像一 其寺九層塔二 眞平王天賜玉帶三也 乃止其謀 讚曰 雲外天頒玉帶圍 辟雍龍袞雅相宜 吾君自此身彌重 准擬明朝鐵作墀
하늘이 내려준 옥대[청태 4년 정유(937) 5월에 정승 김부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치니, 길이가 10위요, 새겨 넣은 장식이 62개였다. 이것은 진평왕(眞平王)이 하늘에서 받은 띠라고 한다. 고려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서 내고(內庫)에 두었다.]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는 진평대왕(眞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다. 대건 11년 기해(579) 8월 왕위에 올랐는데 키가 11척이었다. 내제석궁에 행차하여[또한 천주사라고도 하는데 왕이 창건하였다.] 돌계단을 밟으니 돌 2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 돌을 옮기지 말고 뒷사람들에게 보여라”고 하였으니, 성 안에 있는 움직이지 못하는 다섯 개의 돌 중 하나이다. 즉위 원년에 천사(天使)가 궁전의 뜰에 내려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상황(上皇)께서 나에게 명하여 옥대(玉帶)를 전해주라 하였습니다.”하니 왕은 친히 꿇어앉아서 받았다. 그 후에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무릇 큰 제사 때에는 모두 이 옥대를 착용하였다. 그 후에 고구려왕이 장차 신라를 치려고 계획하면서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할 수 없다하니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라고 하니,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첫째요, 그 절의 9층탑이 둘째요,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셋째입니다.”하고 이에 고구려왕은 그 계획을 중지하였다. 찬하여 말하였다. 구름 위의 하늘이 옥대를 내리니, 임금의 곤룡포에 알맞게 둘렀구나, 우리 임금 이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엔 쇠로써 섬돌을 만들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