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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

기본정보

고구려 제 28대 보장왕 2년(643)에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온 도사(道士)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서달(敍達)은 고구려 제 28대 보장왕 2년(643)에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온 도사(道士)이다. 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도교진흥책에 의해 고구려에 초빙되었으며, 불사(佛寺)에 도관(道館)을 차리고 포교 활동을 하였다.

전문정보

서달(敍達)은 고구려 제 28대 보장왕 2년(643)에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온 도사(道士)이다. 『삼국유사』 권3 흥법3 보장봉로보덕이암(寶藏奉老普德移庵)조에 의하면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왕에게 아뢰어 도교의 수용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왕이 옳게 여겨 당(唐)에 요청하였더니 태종(太宗)이 서달(敍達) 등 도사 여덟 명을 보냈다고 한다. 왕은 절을 도관(道館)으로 삼고, 도사를 높여 유사(儒士) 위에 앉게 하였다. 그들은 고구려 내의 유명한 산천을 다니면서 진압하였으며, 주문으로 남하(南河)의 용에게 명하여 성을 더 쌓게 하여 만월성(滿月城)을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용언성(龍堰城)이라고 하고, 참서(讖書)를 지어 용언도(龍堰堵) 또는,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고도 하였으며, 혹은 영석(靈石)을 파서 깨뜨리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또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 2년(643) 3월조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서달이 숙달(叔達)이라고 하여 인명(人名)의 차이가 보인다. 위의 기사를 통해 서달을 비롯한 8명의 도사들은 고구려의 요청으로 초빙되었으며, 불사(佛寺)에 도관(道館)을 차리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듯하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고구려의 도교에 대한 관심이 대당(對唐) 유화책에서 나온 국제적 의례 이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이내옥, 1983) 즉, 고구려는 당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도교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도교를 통한 불교에 대한 본격적인 견제는 보장왕 2년(643) 연개소문의 도교에 대한 건의 이후에 나타났을 것으로 생각되었다.(이만열, 1971)

그러나 보장왕 즉위 이후 적극적으로 도교진흥책을 추진하였던 연개소문의 경우 이미 영류왕(榮留王)대에 도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대표적인 도교세력으로 이해되고 있다.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8 영류왕 7년(624) 2월조에는 왕이 사신을 당에 보내 책력을 반포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황제는 도사(道士)에게 명하여 천존상(天尊像) 및 도법(道法)을 가지고 노자(老子)를 강의하게 하였고, 왕과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들었다고 전한다. 이 기사를 통해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과 영류왕(營留王, 재위 618-642)대에 걸쳐 막리지(莫離支)의 임무를 맡고 있었던 연개소문의 아버지 태조(太祚)가 영류왕 7년(624) 당으로부터 도교를 수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영류왕대 이미 연개소문 가문과 같은 귀족들이 도교를 신봉하고 있었던 것으로 유추하기도 한다.(남무희, 2001)

참고문헌

이만열, 1971, 「高句麗 思想政策에 대한 몇 가지 檢討」『柳洪烈華甲紀念論叢』, 을유문화사.
이내옥, 1983, 「淵蓋蘇文의 執權과 道敎」『歷史學報』 99·100合.
남무희, 2001, 「高句麗後期佛敎思想硏究-義淵의 地論宗思想 受容을 중심으로」『國史館論叢』95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보장봉로보덕이암)
寶藏奉老普德移庵
高麗本記云 麗季武德貞觀間 國人爭奉五斗米敎 唐高祖聞之 遣道士 送天尊像 來講道德經 王與國人聽之 卽第二十七代榮留王卽位七年 武德七年甲申也 明年遣使往唐 求學佛老 唐帝[謂高祖也]許之 及寶藏王卽位[貞觀十六年壬寅也] 亦欲倂興三敎 時寵相蓋蘇文 說王以儒釋並熾而黃冠未盛 特使於唐求道敎 時 普德和尙住盤龍寺 憫左道匹正 國祚危矣 屢諫不聽 乃以神力飛方丈 南移于完山州[今全州也]孤大山而居焉 卽永徽元年庚戌六月也 [又本傳云 乾封二年丁卯三月三日也] 未幾國滅[以<總>章元年戊辰國滅 則計距庚戌十九年矣] 今景福寺有飛來方丈是也云云[已上國史] 眞樂公留詩在堂 文烈公著傳行世 又按唐書云 先是 隋煬帝征遼東 有裨將羊皿 不利於軍 將死有誓曰 必爲寵臣滅彼國矣 及蓋氏擅朝 以盖爲氏 乃以羊皿是之應也 又按高麗古記云 隋煬帝以大業八年壬申 領三十萬兵 渡海來征 十年甲戌十月 高麗王[時第<二>十六代 嬰陽王立二十五年也] 上表乞降 時有一人 密持小弩於懷中 隨持表使 到煬帝舡中 帝奉表讀之 弩發中帝胸 帝將旋師 謂左右曰 朕爲天下之主 親征小國而不利 萬代之所嗤 時右相羊皿奏曰 臣死爲高麗大臣 必滅國 報帝王之讎 帝崩後 生於高麗 十五聰明神武 時 武陽王聞其賢 [國史 榮留王名建武 或云建成 而此云武陽 未詳] 徵入爲臣 自稱姓蓋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 [唐書云 蓋蘇文自謂莫離支 猶中書令 又按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序幷注 則蘇文乃職名 有文證 而傳云 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 金奏曰 鼎有三足 國有三敎 臣見國中 唯有儒釋 無道敎 故國危矣 王然之 奏唐請之 太宗遣叙達等道士八人 [國史云 武德八年乙酉 遣使入唐<求>佛老 唐帝許之 據此則羊<皿>自甲戌年死 而托生于此 則才年十餘歲矣 而云寵宰 說王遣請 其年月必有一誤 今兩存] 王喜以佛寺爲道舘 尊道士 坐儒士之上 道士等行鎭國內有名山川 古平壤城勢新月城也 道士等呪勑南河龍 加築爲滿月城 因名龍堰城 作讖曰龍堰堵 且云千年寶藏堵 或鑿破靈石 [俗云都帝嵓 亦云朝天石 盖昔聖帝騎此石 朝上帝故也] 盖金又奏築長城東北西南 時男役女耕 役至十六年乃畢 及寶藏王之世 唐太宗親統 以六軍來征 又不利而還 高宗總章元年戊辰 右相劉仁軌 大將軍李勣 新羅金仁問等 攻破國滅 擒王歸唐 寶藏王庶子<率>四千餘家 投于新羅 [與國史少殊 故幷錄] 大安八年辛未 祐世僧統到孤大山景福寺飛來方丈 禮普聖師之眞 有詩云 涅槃方等敎 傳受自吾師云云 至可惜飛房後 東明古國危 跋云 高麗藏王 <惑>於道敎 不信佛法 師乃飛房 南至此山 後有神人 現於高麗馬嶺 告人云 汝國敗亡無日矣 具如國史 餘具載本傳與僧傳 師有高弟十一人 無上和尙與弟子金趣等 創金洞寺 寂滅義融二師創珍丘寺 智藪創大乘寺 一乘與心正大原等 創大原寺 水淨創維摩寺 四大與契育等 創中臺寺 開原和尙創開原寺 明德創燕口寺 開心與普明亦有傳 皆如本傳 讚曰 釋氏汪洋海不窮 百川儒老盡朝宗 麗王可笑封沮如 不省滄溟徒臥龍

보장왕이 노자를 신봉하고 보덕이 암자를 옮기다.
「고구려본기[高麗本記]」에 이르길 “고구려 말기에 무덕(武德, 618-626), 정관(貞觀, 627-649) 연간에 나라 사람들이 오두미교를 다투어 신봉하였는데, 당(唐) 고조(高祖, 재위 618-626)가 이를 듣고 도사를 보내 천존상을 가져다 주고 가서 도덕경을 강연하게 하였다. 왕이 나라사람들과 함께 들으니 곧 제 27대 영류왕(榮留王, 재위 618-642) 즉위 7년, 무덕 7년 갑신(624)이었다. 이듬해 사신을 당에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배우기 청하니 당나라 황제[고조를 말한다.]가 허락하였다. 보장왕(寶藏王, 재위 642-668)이 즉위[정관 16년 임인(642)이다.]하여 또 3교가 함께 흥하려 하니 그때 총애받던 재상 개소문(蓋蘇文)이 왕에게 말하길 유교와 불교는 함께 성하나 도교는 성하지 못하니 특별히 당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구하자 하였다. 이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반룡사(盤龍寺)에 있었는데 사도(邪道)가 정도(正道)에 맞서서 국운이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신통력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全州)이다.]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가 살았으니 곧 영휘(永輝, 650-655) 원년 경술(650) 6월이다.[또 「본전(本傳)」에는 건봉(乾封, 666-667) 2년 정묘(667) 3월 3일이라 하였다.] 오래지 않아 나라가 망하였다.[총장(總章, 668-669) 원년 무진(668)에 나라가 망하였으니 경술년과는 19년 떨어져 있다.] 지금 경복사(景福寺)에 비래방장(飛來方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이상은 『국사(國史)』이다.] 진락공(眞樂公)이 남긴 시가 당(堂)에 남아있고 문열공(文烈公)이 (그의) 전기를 지어 세상에 전하였다. 또 『당서(唐書)』를 살펴보면 “이보다 앞서 수(隋) 양제(煬帝, 재위 604-618)가 요동을 정벌하였을 때 양명(羊皿)이라는 비장이 있었다. 전쟁이 불리하여 장차 죽게 되자, 맹세하기를 ‘반드시 총신이 되어 저 나라를 멸하겠다.’고 하였다. 개씨(蓋氏)가 조정을 어지럽히는데 이르러 개(盖)를 성으로 삼으니 이는 곧 양명(羊皿)이란 이름 글자 두자가 개(盖)란 글자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또 『고려고기(高麗古記)』에 이르길 “수양제가 대업(大業, 605-618) 8년 임신(612)에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쳐들어왔다. 10년 갑술(614) 10월에 고려왕이[이때가 제 26대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 재위 25년(614)이었다.] 글을 올려 항복을 청하였다. 이때 어떤 한 사람이 있어 몰래 작은 활을 품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져가는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 안에 이르렀다. 양제가 표문을 들고 읽을 때에 활을 쏘아 황제의 가슴을 맞추었다. 황제가 군사를 돌이키면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인데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익이 없었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 하였다. 이때 우상 양명이 아뢰되 ‘신이 죽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제왕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죽은 후에 (양명이) 고구려에 태어나 15세에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그때 무양왕(武陽王)[『국사』에 영류왕의 이름이 건무(建武) 혹은 건성(建成)이라고 하였다 했는데 여기에는 무양이라 하니 잘 알수 없다.]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를 삼았다. 스스로 성을 개, 이름을 금이라 하였는데 지위가 소문에 이르렀으니 곧 시중의 자리이다.[『당서(唐書)』에는 “개소문이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 하니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했다. 또『신지비사(神誌秘詞)』의 서문을 살펴보면,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을 쓰고 주석을 달았다.”라 하였으니 곧 소문(蘇文)이 직명(職名)인 것이 문헌으로 증명되는데, 전(傳)에 이르길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이 서문을 쓰다”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개금이 아뢰길 ‘솥에는 세 발이 있고 나라에는 3교가 있는 것인데, 신이 보아하니 우리나라에는 오직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으므로 나라가 위태롭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그렇다 여겨 당나라에 도교를 요청하자 태종(太宗, 재위 626-649)이 서달(叙達) 등 도사 8인을 보냈다. [『국사(國史)』에 이르되 “무덕 8년 을유(625)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구하니 당나라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한다. 이것에 의하면 곧 양명이 갑술년(614)에 죽어 이 땅에 태어났다면 나이가 겨우 10여 세이다. 그러나 총재(寵宰)로써 왕을 설득하여 사신을 보내길 청하였다 하니, 그 연월에서 반드시 하나는 틀린 것이 있을 것이다. 지금 양쪽 기록을 다 남겨둔다.] 왕이 기뻐하여 절을 도관(道舘)으로 삼고 도사를 높여 유사(儒士)보다 위에 있게 하였다. 도사들이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다니면서 진압하였다. 옛 평양성은 모양이 신월성(新月城)이었는데 도사들이 주문으로 남하(南河)의 용에게 명하여 그곳을 더 쌓게 하여 만월성(滿月城)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용언성(龍堰城)이라 이름짓고 참(讖)을 지어 용언도(龍堰堵)라 하고 또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 하기도 하였다. 혹은 영석[세간에 말하길 도제암(都帝嵓)이라 하고 또 조천석(朝天石)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옛날에 성제(聖帝)가 이 돌을 타고 상제(上帝)에게 조회하였기 때문이다.]을 파서 깨뜨리기도 하였다. 개금이 또 아뢰어 동북에서 서남까지 장성을 쌓게 하니, 이때 남자는 그 부역에 나가고 여자는 농사를 지었는데 부역은 16년 후에야 끝났다. 보장왕 때에 이르러 당(唐) 태종(太宗)이 친히 6군을 거느리고 와서 치다가 또 불리하여 돌아갔다. 고종 총장 원년 무진(668)에 우상 유인궤(劉仁軌)와 대장군 이적(李勣)과 신라 김인문(金仁問) 등이 와서 공격하여 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가니, 보장왕의 서자가 4천여 가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였다.”고 한다.[『국사』와 조금 다르므로 같이 기록한다.] 대안(大安, 1084-1094) 8년 신미(1091)에 승통 우세(祐世, 의천)가 고대산 경복사 비래방장에 와서, 보덕성사의 진영에 예를 표했다. 시가 있어 가로되 “열반방 등의 교는 우리 성사(聖師)께서 전수하였다...... 애석하구나! 방장을 날려온 후 동명의 옛나라가 위태로워졌구나.”라 하였다. 우세가 발문을 지어 말하길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에 혹해 불법을 믿지 않으므로 스님께서 방을 날려 남쪽으로 이 산에 이르렀다.” 라고 하였다. 후에 신인이 있어 고구려 마령(馬嶺)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말하길 “너희 나라가 패망할 날이 머지 않았다.” 하였다. 모두 『국사』와 같고 나머지는 본전과『승전(僧傳)』에 다 기재되어 있다. 스님에게는 고명한 제자가 11명 있었다. 무상화상(無上和尙)은 제자 김취(金趣) 등과 함께 금동사(金洞寺)를 세웠고, 적멸(寂滅)과 의융(義融) 두 스님은 진구사(珍丘寺)를 세웠으며,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세웠고, 일승(一乘)과 심정(心正)·대원(大原) 등은 함께 대원사(大原寺)를 세웠으며,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를 세웠고, 사대(四大)는 계육(契育) 등과 함께 중대사(中臺寺)를 세웠으며, 개원화상(開原和尙)은 개원사(開原寺)를 세웠고,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세웠다. 개심(開心)과 보명(普明)도 전기가 있는데 모두 『본전』과 같다. 찬한다. “부처의 도는 넓고 넓어 바다같이 한량없으니, 백 갈래 하천같은 유교와 도교가 모두 조종에 이르도다. 우습다. 고구려왕이 웅덩이만 신봉하고 와룡이 창해로 옮겨감을 몰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