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집사

기본정보

신라시대 관직명

일반정보

집사(執事)는 신라시대 관직명(官職名)으로 왕의 가신적(家臣的)인 성격을 띠면서 궁중의 업무를 관장하는 근시직(近侍職)으로 보인다.

전문정보

집사(執事)는 신라시대 관직명(官職名)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조에는 신라 제26대 진지왕(眞智王)의 혼(魂)과 사량부(沙梁部) 서녀(庶女)의 딸 도화녀(桃花女) 사이에서 태어난 비형랑(鼻荊郞), 그리고 그가 추천한 길달(吉達)이 진평왕(眞平王)으로부터 집사(執事)라는 벼슬을 받았다는 설화가 전해져온다.

집사라는 명칭은 『삼국사기』 권39 잡지8 직관조에는 보이지 않고 『고려사』 권75 선거지(選擧志) 전주(銓注) 향직(鄕職) 성종 2년(983)조에 보이는데, 본래 집사는 향리(鄕吏)의 하급직이었던 것이 성종 대에 중앙 관직명과 상응하는 사(史)로 개칭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아 진평왕의 집사도 중앙의 여러 관부의 말단관리인 사(史)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또한 동시에 신라 제28대 진덕왕(眞德王) 5년(651)에 왕의 직속기관으로서 설치된 집사부(執事部)와 명칭이 같은 것에 착안하여 왕의 가신적(家臣的) 성격의 관직으로 추측하기도 하였다. 집사부는 왕의 가신적 존재였던 것이 전체적인 재정을 담당하는 공적(公的) 관부(官府)인 품주(稟主)로 발전되었다가 다시 재정을 맡는 창부(倉府)와 나머지 왕정 기밀 관장업무를 맡은 집사부로 분화되면서 생긴 조직이다. 따라서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조의 설화와 같이 비형과 길달이 왕의 측근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신적(家臣的) 성격의 관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이기백, 1974)

한편 비형의 가계가 왕실과 관련이 있다는 점, 궁중에서 자란 점 등을 참고 한다면 집사는 정치적 역할이 없는 사적 궁중 업무와 관련있는 근시직(近侍職)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진평왕이 비형에게 집사직을 내린 후 조정(朝政)을 보좌(補佐)할 자를 구하고 또 길달이라는 인물을 근시직인 집사에 보임하고 있는 것은, 진평왕의 근시집단 확장에 대한 의지와 이에 따라서 근시집단이 수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진흥왕(眞興王) 대까지 국왕의 사적(私的) 업무만을 맡았던 근시집단은 진평왕(眞平王) 대에 이르러 일반행정담당관직·관부의 설치 또는 조직화를 통해 수적, 양적 발전을 이루고 있다. 근시직의 하나인 사인(舍人)이 증가하고 있으며, 진평왕 7년(585)에는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 등 세 곳에 각각 사신(私臣)을 설치하여 근시집단을 통솔하기 시작하였고, 진평왕 44년(622)에는 이들의 업무를 통합하여 내성(內省)이라는 관부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화와 확대는 근시집단이 가신적(家臣的) 성격에서 벗어나 왕권을 지지하는 기반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이문기, 1983)

참고문헌

이기백,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이문기, 1983, 「新羅 中古의 國王 近侍集團」『歷史敎育論集』5.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
桃花女 鼻荊郞
第二十五舍輪王 諡眞智大王 姓金氏 妃起烏公之女 知刀夫人 大建八年丙申卽位[古本云 十一年己亥 誤矣] 御國四年 政亂荒<淫> 國人廢之 前此 沙梁部之庶女 姿容艶美 時號桃花娘 王聞而召致宮中 欲幸之 女曰 女之所守不事二夫 有夫而適他 雖萬乘之威 終不奪也 王曰 殺之何 女曰 寧斬于市 有願靡他 王戱曰 無夫 則可乎 曰可 王放而遣之 是年 王見廢而崩 後二年其夫亦死 浹旬忽夜中 王如平昔來於女房曰 <汝>昔有諾 今無汝夫 可乎 女不輕諾 告於父母 父母曰 君王之敎 何以避之 以其女入於房 留御七日 常有五色雲覆屋 <香>氣滿室 七日後 忽然無蹤 女因而有娠 月滿將産 天地振動 産得一男 名曰鼻荊 眞平大王聞其殊異 收養宮中 年至十五 授差執事 每夜逃去遠遊 王使勇士五十人守之 每飛過月城 西去荒川岸上[在京城西] 率鬼衆遊 勇士伏林中窺伺 鬼衆聞諸寺曉鐘各散 郞亦歸矣 軍士以事來奏 王召鼻荊曰 <汝>領鬼遊 信乎 郞曰 然 王曰 然則<汝><使>鬼衆成橋於<神>元寺北渠[一作 神衆寺 誤 一云 荒川東深渠] 荊奉勑 使其徒鍊石 成大橋於一夜 故名鬼橋 王又問 鬼衆之中 有出現人間輔朝政者乎 曰 有吉達者 可輔國政 王曰 與來 翌日荊與俱見 賜爵執事 果忠直無雙 時角干林宗無子 王勑爲嗣子 林宗命吉達創樓門於興輪寺南 每夜去宿其門上 故名吉達門 一日吉達變狐而遁去 荊使鬼捉而殺之 故其衆聞鼻荊之名 怖畏而走 時人作詞曰 聖帝魂生子 鼻荊郞室亭 飛馳諸鬼衆 此處莫留停 鄕俗帖此詞以辟鬼
도화녀(桃花女) 비형랑(鼻荊郞)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이다.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 8년 병신(576)에 왕위에 즉위하였다.[고본에는 11년 기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나라를 다스린지 4년 만에 정사가 혼란해지고 주색에 빠져 국인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앞서 사량부(沙梁部) 서녀가 용모가 아름답고 고와 당시 도화랑이라고 불렀다. 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 상관(相關)하고자 하니 여인이 아뢰기를, “여자가 지킬 일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로 가는 것은 비록 제왕의 위엄으로서도 끝내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차라리 저자거리에서 참수될지라도 딴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하니 왕이 희롱하며 말하기를,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그러하옵니다.”하였다. 왕은 여인을 놓아줘 돌려보냈다. 이 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었다. 그 후 2년 만에 여자의 남편도 죽었다. 열흘 후에 홀연히 밤 중에 왕은 평소처럼 여자의 방에 와서 말하기를, “네가 예전에 허락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하니 여자는 가벼이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물었다. 부모가 말하기를, “군왕의 말씀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하고는 그 딸을 방에 들여보냈다. 왕이 7일 동안 머물렀는데 항상 오색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7일 뒤 홀연히 자취가 없어졌다. 여인은 이내 임신을 하였고 달이 차서 낳으려 하자 천지가 진동하더니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하였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기이함을 듣고 거두어들여 궁중에서 길렀다. 나이 15세가 되자 집사직(執事職)을 주었다.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노니 왕은 용사 50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는데, 매번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 서쪽 황천 언덕 위[서울 서쪽에 있다]에 가서 귀신들을 거느리고 놀았다. 용사(勇士)들이 숲 속에 엎드려 엿보니 귀신들은 여러 절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 뿔뿔이 흩어졌고, 비형랑도 또한 돌아왔다. 군사가 돌아와 사실대로 와서 아뢰니 왕은 비형을 불러 물었다. “네가 귀신을 데리고 논다는 말이 정말이냐?” 낭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또는 황천(荒川) 동쪽 깊은 도랑이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하니, 비형랑이 명을 받들어 귀신들을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러므로 귀교(鬼橋)라고 불렀다. 왕은 또 묻기를, “귀신들 가운데 인간으로 출현하여 정사를 도울 자가 있느냐?”하니,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는데, 나라의 정사를 도울 수 있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데리고 오너라” 하였다. 이튿날 비형랑이 길달을 데리고 함께 와서 뵈었다. 집사 벼슬을 주었는데,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견줄 바 없었다. 이때 각간 임종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왕이 명하여 대를 이을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이 명하여 길달로 하여금 흥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하니, 밤마다 그 문 위에 가서 잤으므로 길달문이라 하였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가니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그러므로 그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이 글을 지어 이르기를, “성제(聖帝)의 혼령이 낳은 아들인 비형랑의 집과 정자이니, 날고뛰는 모든 귀신들아, 이곳에 머물지 마라!” 라고 하였다. 민간풍속에 이 글을 집에 붙여서 귀신을 물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