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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기본정보

군주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으로, 군주가 자기의 치세연차(治世年次)에 붙이는 칭호

일반정보

군주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으로, 군주가 자기의 치세연차(治世年次)에 붙이는 칭호이다. 다년호(多年號) 또는 원호(元號)라고도 한다. 연호의 사용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한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도 사용하였다. 중국에서는 중화민국이 성립되면서 연호가 폐지되었고, 지금은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다.
신라는 제23대 법흥왕 23년(536)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제28대 진덕왕 4년(650)에 이르기까지 건원(建元), 개국(開國), 대창(大昌), 홍제(鴻濟), 건복(建福), 인평(仁平), 태화(太和)라는 총 7개의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전문정보

최초의 연호는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건원(建元)”이다. 무제는 6년 혹은 4년마다 연호를 고쳤는데, 이후 이 일정한 기간은 무시되어 군주 일대에 몇 개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명·청대에는 1대에 한 연호[一世一元]를 사용하였다.

연호의 명칭에는 어떠한 사실을 상징하거나 이상을 표명하는 것이 가장 많으며, 불교·도교와 관계되는 것도 있고, 고전의 글귀를 취한 것도 있다. 그리고 연호는 원칙적으로 황제만이 사용하고, 제후왕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보이며, 금석문을 통해 확인된다. 금석문 중에서는 최초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서 광개토왕이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건흥오년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建興五年銘金銅釋迦三尊佛光背)」·「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영강칠년명주형광배(永康七年銘舟形光背)」를 통해 고구려에서는 “건흥(建興)”·“연가(延嘉)”·“영강(永康)” 등의 연호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사적에서 확인되는 연호의 제정·사용은 신라 때부터이다. 즉, 제23대 법흥왕(法興王) 은 재위 23년(536)에 독자적으로 연호를 세워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제24대 진흥왕(眞興王) 때 “개국(開國)”·“대창(大昌)”·“홍제(鴻濟)”, 제26대 진평왕(眞平王) 때 “건복(建福)”, 제27대 선덕왕(善德王) 때 “인평(仁平)”, 제28대 진덕왕(眞德王) 때 “태화(太和)”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헌덕왕 14년(822)에 웅주도독(熊州都督)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원(慶元)”이라 한 것도 주목된다.

중국의 주변국가가 중국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중국과 주변국가의 관계가 종속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전해종, 1970) 그런데 신라에서는 법흥왕이 처음 중국연호가 아닌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 이후 중고기 신라왕들도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다. 이것은 5세기 말에서 6세기경의 신라가 대내적으로 국가체제의 정비, 대외적으로 활발한 영역확장 등으로 인하여, 신라 지배층의 대중인식(對中認識)에 대한 자주적 입장이 표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김영하, 1980)

신라 중고기에 사용된 연호 중 “개국”, “홍제”, “인평”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춘정월(春正月)에, “건복”은 춘이월(春二月)에 개원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개원(改元)은 대체로 새해 초에 실시되는 경향을 알 수 있다. 또 이것은 연호가 실질적인 역년기준(曆年基準)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연호가 실제적으로 사용된 사실은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진덕왕 2년(648)조의 내용에도 드러난다. 중국에 조공사로 파견된 한질허(邯帙許)는 당태종이 어사를 통해 신라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문책하자, 중국에서 연호를 사용하라는 명을 받지 못하여 법흥왕 이래로 사사로이 연호를 제정․사용하고 있었다고 변명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王巡守碑)」에 기록된 “태창(太昌)”이라는 연호에서도 드러난다.(김영하, 1980)

중고기 신라왕 중 오직 25대 진지왕(眞智王, 576~579)만은 연호를 제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재위기간이 4년으로 연호를 사용할 시간적 여유가 짧았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진지왕은 나물왕계인 중대왕권에서 진흥왕의 태자였던 동륜과 그 세력을 배제시키면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신형식, 1977) 중고기 신라왕으로서 왕권의 정통성을 갖지 못한 한계성을 지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도 있다.(김영하, 1980)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5 진덕왕 4년조에 따르면, 진덕왕 5년(651)부터는 신라의 독자적 연호사용을 중지하고, 당(唐)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전해종, 1970,『韓中關係史硏究』, 일조각.
신형식, 1977,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한국사논총』2.
김영하, 1980, 「新羅 中古期의 對中認識」『민족문화연구』15.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三 法興王 [名原宗 金氏 冊府元龜云 姓募名秦 父智訂 母迎帝夫人 法興諡 諡始乎此 甲午立 理二十六年 陵在哀公寺北 妃<巴刀>夫人 出家名法流住永興寺 始行律令始行十<齋>日禁殺 度(人)爲僧尼] 建元 [丙辰] [是年始置年號始此]
제23 법흥왕 [이름은 원종이고 김씨다. 책부원귀에는 성을 모(募) 이름을 진(秦)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지정이고 어머니는 영제부인이다. 법흥은 시호로 시로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갑오에 즉위하여 26년을 다스렸다. 능은 애공사 북쪽에 있다. 비는 파도부인으로 출가한 법명은 법류이고 영흥사에 머물렀다. 처음으로 율령을 행하였고, 십재일을 시행하기 시작하여 살생을 금하였으며, 속인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건원[병진] [이 해에 처음으로 설치하여 연호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