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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기본정보

신라 제29대 무열왕(武烈王)의 묘호(廟號)

일반정보

태종(太宗)은 신라 제29대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에게 올린 묘호(廟號)로, 묘호는 죽은 왕의 영(靈)을 태묘(太廟, 종묘)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되었던 칭호이다. 신라에서 묘호를 사용한 예는 태종무열왕이 유일한데, 『삼국유사』에서는 태종무열왕이 김유신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고 사직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묘호를 태종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전문정보

태종(太宗)은 신라 제29대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에게 올린 묘호(廟號)이다. 묘호는 죽은 왕의 영(靈)을 태묘(太廟, 종묘)에 제사지낼 때 사용되는 칭호로, 왕이 죽은 후 추증되었다. 일반적으로 묘호는 시자(諡字)와 종호(宗號)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자는 시법(諡法)에 따라 제정되며, 종호는 조(祖)와 (宗)으로 구분되었다. 특히 종호는 종법(宗法) 상의 조․종 개념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즉 『예기(禮記)』 상복소기(喪服小記)와 대전(大傳)편에서 “별자(別子)는 조(祖)가 되고 별자를 계승하는 자는 종(宗)이 된다(別子爲祖 繼別爲宗)”라고 하여 각 나라에 분봉된 별자는 그 나라의 시조로서 조가 되고, 그 시조를 계승하는 사람들이 종이 된다고 한 것이 그 기본 원리이다. 또한 같은 책 제법(祭法)조에는 “공(功)이 있으면 조(祖), 덕(德)이 있으면 종(宗)이라 한다.(有功曰祖 有德曰宗)”라고 하여 조공종덕(祖功宗德)의 원리를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 건국시조를 태조(太祖)라고 하고 그를 계승하는 적통의 왕들은 종을 칭하였던 것이 일반적이었다.(임민혁, 2001)

『삼국유사』에서 태종무열왕의 묘호에 대한 기록은 권1 기이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 전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태종무열왕이 김유신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고 사직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묘호(廟號)를 “태종”이라 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태종무열왕 8년(661) 6월 무열왕이 죽은 뒤 묘호를 올려 태종이라고 한 이후 일반적으로 무열왕을 태종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같은 책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3년(673)조에는 “태종왕(太宗王)”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또 신문왕 7년(687)에는 대신을 조묘(祖廟)에 보내 제사를 올렸는데, 그 제문에서 “태조대왕(太祖大王), 진지대왕(眞智大王), 문흥대왕(文興大王),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신문왕대 오묘제(五廟制)가 성립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조에는, 신라 제36대 혜공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오묘를 정했는데, 김성시조(金姓始祖) 미추왕(味鄒王)과 태종대왕, 문무대왕을 대대로 헐지 않는 종(世世不毁之宗)으로 삼고 여기에 친묘(親廟) 둘을 합해 오묘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 제사지의 기록은 오묘제의 성립시기에 대해서 앞서 살펴본 신라본기 신문왕 7년조와는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으나, 태종대왕 즉 태종무열왕을 오묘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두 기록이 동일하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애장왕 2년(801)조에 따르면, 이후 애장왕대에 이르러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의 두 사당을 따로 세우고 시조대왕(始祖大王)과 왕의 4대조를 합해 다시 오묘로 삼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태종”이라는 묘호는 문무왕대 이후 계속해서 무열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조에는 무열왕이 사후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린 뒤에 신문왕(神文王)대 들어와 당 고종(高宗)이 사신을 보내, 자신의 아버지가 현신(賢臣)을 얻어 천하를 통일하였으므로 “태종황제(太宗皇帝)”라고 한 것인데, 신라가 해외(海外)의 소국(小國)으로서 “태종”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그 뜻이 불충(不忠)하므로 속히 고치라고 하였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에 문무왕은 글을 올려서, 신라가 비록 소국이지만 성신(聖臣) 김유신(金庾信)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으므로 “태종”이라고 한 것이라고 답하였다. 당 황제는 그 글을 보고, 전에 자신이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33천(天)의 하나가 신라에 태어나 김유신이 되었다고 창(唱)하는 소리가 있어 자신이 그 일을 책에 기록해두었던 것을 생각해 내었고, 다시 사람을 보내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신문왕 12년(692)조에도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와 유사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여기서는 당나라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어 신라가 선왕 김춘추에게 당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와 같은 묘호를 붙인 것은 매우 분수에 넘치는 일이니 속히 고치라고 조칙을 전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은 여러 신하와 의논하여 답하였는데, 감히 당 황제의 명령을 좇지 않을 수는 없지만,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고 생전에 양신(良臣) 김유신을 얻어 삼한을 통일한 공이 있으므로 그가 돌아가셨을 때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묘호를 추존한 것이며, 그것이 당과 서로 저촉되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사신께서는 이 내용을 그대로 황제에게 아뢰어 달라고 하였다. 이후 당에서는 다시 별다른 칙명이 없었다고 한다.

태종 묘호의 사용에 대한 이 같은 사건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를 당시의 신라-당 관계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는 견해가 있었다. 신라에서 태종의 묘호가 정해진 것은 무열왕이 죽은 직후인 661년 즈음의 일일 것인데, 당나라가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신문왕대에 와서야 이 일을 거론하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당은 신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아가 신라와 백제까지 귀속시켜 자국의 영토로 삼으려던 속셈을 가지고 그간 신라를 자극하는 일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에 무열왕의 묘호에 대해 문제삼지 않았는데, 신문왕대에 들어와 신라와 당 간에 국제질서가 현실 인정 차원에서 안정세를 형성하게 되자 전통적인 중화사상이 발로되어 묘호에 대한 분규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황운룡, 1982)

한편 신라의 대내적인 면을 살펴볼 때, 이 일의 해결은 중대 왕권 안정의 기반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즉 무열왕계는 자파 중심의 정치과정을 통해 중대의 지배체제를 수립한 결과 신문왕 말년에 대내적으로 진지왕 직계의 오묘제(五廟制)를 정비하여 정통성을 천명하였으며, 대외적으로 불편했던 대당관계의 상징인 태종의 묘호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중대왕권의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김영하, 2007)

참고문헌

황운룡, 1982, 「新羅太宗廟號의 紛糾始末」『東國史學』17.
임민혁, 2001, 「朝鮮時代 宗法制하의 祖․宗과 廟號 論議」 『동서사학』8.
김영하, 2007, 『新羅中代社會硏究』, 일지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
太宗春秋公
第二十九太宗大王 名春秋 姓金氏 龍樹[一作龍春]角干追封文興大王之子也 妣眞平大王之女天明夫人 妃文明皇后文姬 卽庾信公之季妹也 初文姬之姊寶姬 夢登西岳捨溺 瀰滿京城 旦與妹說夢 文姬聞之謂曰 我買此夢 姊曰 與何物乎 曰 鬻錦裙可乎 姊曰 諾 妹開襟受之 姊曰 疇昔之夢 <傳>付於汝 妹以錦裙酬之 後旬日 庾信與春秋公 正月午忌日[見上射琴匣事 乃崔致遠之說] 蹴鞠于庾信宅前[羅人謂蹴鞠爲弄珠之戲] 故踏春秋之裙 裂其襟紐曰 請入吾家縫之 公從之 庾信命阿海奉針 海曰 豈以細事輕近貴公子<乎> 因辭[古本云 因病不進] 乃命阿之 公知庾信之意 遂幸之 自後數數來往 庾信知其有娠 乃嘖之曰 爾不告父母 而有娠何也 乃宣言於國中 欲焚其妹 一日俟善德王遊幸南山 積薪於庭中 焚火烟起 王望之問何烟 左右奏曰 殆庾信之焚妹也 王問其故 曰 爲其妹無夫有娠 王曰 是誰所爲 時公昵侍在前 顔色<大>變 王曰 是汝所爲也 速往救之 公受命馳馬 傳宣沮之 自後現行婚禮 眞德王薨 以永徽五年甲寅卽位 御國八年 龍朔元年辛酉崩 壽五十九歲 葬於哀公寺東 有碑 王與庾信神謀戮力 一統三韓 有大功於社稷 故廟號太宗 太子法敏 角干仁問 角干文王 角干老且 角干智鏡 角干愷元等 皆文姬之所出也 當時買夢之徵 現於此矣 庶子曰 皆知文級干 車得令公 馬得阿干 幷女五人 王膳一日飯米三斗 雄雉九首 自庚申年滅百濟後 除晝饍 但朝暮而已 然計一日米六斗 酒六斗 雉十首 城中市價 布一疋租三十碩或五十碩 民謂之聖代 在東宮時 欲征高麗 因請兵入唐 唐帝賞其風彩 謂爲神聖之人 固留侍衛 力請乃還 時百濟<末>王義慈乃<武>王之元子也 雄猛有膽氣 事親以孝 友于兄弟 時號海東曾子 以貞觀十五年辛丑卽位 耽婬酒色 政荒國危 佐平[百濟爵名]成忠 極諫不聽 囚於獄中 瘦困濱死 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嘗觀時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審擇其地 處上流而迎敵 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炭峴[一云 沈峴 百濟要害之地] 水軍不使入伎伐浦[卽長岩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 據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 <顯>慶四年己未 百濟烏會寺[亦云 烏合寺] 有大赤馬 晝夜六時 遶寺行道 二月 衆狐入義慈宮中 一白狐坐佐平書案上 四月 太子宮雌雞與小雀交婚 五月 泗<沘>[扶餘江名]岸大魚出死 長三丈 人食之者皆死 九月 宮中槐樹鳴如人哭 夜鬼哭宮南路上
태종춘추공
제29 태종대왕의 이름은 춘추이고 성은 김씨이다. 용수[또는 용춘라고도 한다]각간 추봉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왕비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로, 곧 유신공의 막내 누이이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寶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흘러서 서울에 가득 찼다. 아침에 아우에게 꿈 이야기를 했는데 문희가 듣고 말하기를 “내가 그 꿈을 사겠습니다.”라고 했다. 언니가 말하기를 “무엇을 주겠느냐?”라고 하니, 문희가 말하기를 “비단치마면 되겠습니까?”라고 하여, 언니가 “좋다.”고 하였다. 동생이 옷깃을 벌려 받았는데, 언니가 말하기를 “어젯밤 꿈을 너에게 준다”라고 하니 동생은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후에 10일이 지나 유신이 춘추공과 더불어 정월 오기일(午忌日)[위의 사금갑(射琴匣)조에 보이는데, 최치원(崔致遠)의 설이다]에 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蹴鞠)을 하다가[신라 사람들이 말하는 축국은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이른다] 고의로 춘추의 옷을 밟아 옷끈을 떼어버리고 말하기를 “청컨대 우리 집에 들어가서 꿰맵시다”라고 하니 공이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에게 명하여 꿰매드리라고 하니, 아해가 말하기를 “어찌 작은 일로써 귀공자를 가벼이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사양하였다.[고본(古本)에는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아지(阿之)에게 명하였더니 공이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관계하였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하였다. 유신이 그의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어 말하길 “네가 부모님께 고하지 않고 임신을 했으니 어찌된 일이냐?”라고 하고, 이에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리고 누이를 태워 죽인다고 하였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것을 기다려, 뜰 가운데 땔감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연기가 일어났다.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가 아뢰기를 “아마도 유신이 그의 누이를 태우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그의 누이가 남편도 없이 임신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이 누구의 짓인가?”라고 하였는데, 마침 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안색이 크게 변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공이 한 일이니 가서 구하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이를 막고, 그 후 드러내어 혼례를 행했다. 진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永徽) 5년 갑인(654)에 왕위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 신유(661)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59세였다. 애공사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를 세웠다. 왕은 유신과 더불어 지모와 힘을 합해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사직(社稷)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고 하였다.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 인문(仁問), 각간 문왕(文王), 각간 노차(老且), 각간 지경(智鏡), 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의 소생이니, 당시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서 나타났다. 서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 거득(車得) 영공(令公) 마득(馬得) 아간과 딸을 합하여 모두 5명이다. 왕의 식사는 하루에 쌀 3말과 꿩 9마리였는데, 경신년(660) 백제를 멸망시킨 후로는 점심은 하지 않고 다만 조석만 들 뿐이었다. 그러나 하루를 계산해보면 쌀 6말, 술 6말, 꿩 10마리였다. 성 중 시장의 값은 베 한 필에 조(租) 30석 혹은 50석이었다.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했다. 동궁에 있을 때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청하러 당나라에 들어갔더니, 당나라 황제가 그 풍채를 보고 신성한 사람이라고 하고는, 굳이 머물러두고 시위(侍衛)하게 했으나, 힘써 청하여 이에 돌아왔다. 이때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義慈)는 무왕(武王)의 맏아들로서 용감하고 담력이 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정관(貞觀) 15년 신축(641)에 왕위에 오르자 주색에 빠져 정사가 문란해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좌평(佐平)[백제의 관작 이름] 성충(成忠)이 극력으로 간해도 듣지 않고 옥에 가두니, 몸이 여위고 지쳐 거의 죽게 되었다. 글을 써서 아뢰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원컨대 한 말씀 드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시세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전쟁이 있겠습니다. 무릇 군사를 씀에는 그 지세를 잘 가려야 할 것이니, 상류에 머물러 적을 맞이하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해처이다]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곧 장암(長嵓)이니 또는 손량(孫梁), 혹은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 한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막은 연후에 가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은 살피지 않았다. 현경(顯慶) 4년 기미(659)에 백제의 오회사(烏會寺)[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한다]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하루 종일 절을 돌아다녔다. 2월에는 여우떼가 의자의 궁중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하였고 5월에는 사비[부여의 강 이름] 언덕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3장이었으며 그 고기를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의 괴수(槐樹)가 울었는데 사람이 우는 것과 같았고,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 위에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