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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

기본정보

신라 제사체제 중 대사에 속한 것으로 나림(奈林)·골화(骨火)·혈례(穴禮) 세 곳을 지칭

일반정보

신라의 제사체제 중 대사(大祀)에 속한 것으로 나림(奈林)·골화(骨火)·혈례(穴禮) 세 곳을 말하는데, 경주와 경주를 둘러싼 지역에 위치하여 경주를 방호하는 역할을 하는 호국신(護國神)적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성읍국가 사로가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인 신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여 왕경 중심의 지배집단의 제사대상이 되었던 신라의 삼산은 통일 후에도 최고의 신성 산악으로 왕이 직접 제사를 올리는 대사의 대우를 받았다

전문정보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1 제사조에는 “삼산(三山)·오악(五岳) 이하 명산대천은 나누어 대사·중사·소사로 삼았다. 대사(大祀) 삼산(三山)은 첫째는 나력(奈歷)[습비부(習比部)], 둘째는 골화(骨火)[절야화군(切也火郡)], 셋째는 혈례(穴禮)[대성군(大城郡)]였다.(三山五嶽以下 名山大川 分爲大中小祀 大祀 三山 一奈歷[習比部] 二骨火[切也火郡] 三穴禮[大城郡])”라고 하여 신라의 제사체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제사체계는 당나라가 모든 국가 제사를 대·중·소사로 구분하고 있는데 반해 명산대천만을 대·중·소사체계에 편제하고 있어 구별이 되는데(나희라, 2003) 이 중 대사는 삼산을 제사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편 미추왕 김유신조에는 삼산(三山)의 신들과 관련된 설화가 전하고 있다. 고구려 첩자인 백석(白石)이 신라의 화랑 김유신을 해칠 목적으로 낭도에 속하여 기회를 노렸는데, 고구려에 대응할 방도를 모색하며 고민하던 김유신에게 적국의 사정을 염탐한 후에 일을 도모하자고 하여 김유신을 유인하였다. 그들이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렀을 때 여자로 변신한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호국신(護國臣)이 나타나 백석의 정체를 폭로하여 김유신을 위험에서 구했다. 여기서 삼산의 호국신(護國神)적인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삼국유사』권1 기이편 미추왕 죽엽군조의 마지막 구절에 써진 것처럼 삼산(三山)은 김씨왕조의 시조묘가 된 미추왕릉인 대묘(大廟)와 마찬가지로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을 정도로 신라인들의 중요한 숭배 대상이었던 것이다.

삼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나림은 지금의 경주의 낭산(狼山), 골화는 지금의 영천의 금강산(金剛山), 혈례는 지금의 청도의 부산(鳧山)으로 보는 의견이 제시되었으나,(이병도, 1977) 나림 또는 나력은 명활산(明活山)으로 보고, 혈례는 영일군에 위치한 운제산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문경현, 1983) 최근에는 나력은 명활산, 골화는 영천의 금강산, 혈례는 영일냉수리신라비가 있는 뒷산의 어래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신라 삼산의 위치로 비정된 경주의 명활산과 영천의 골화산, 안강의 혈례산은 모두 경주와 경주를 둘러싼 지역에 위치하여 경주를 방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최광식, 2007)

국가제사체제에 포함된 삼산은 신라왕이 직접 친히 제사를 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조에는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과 삼산의 신들이 때로는 혹 전정에 나탄 왕을 모셨다(王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神等時或現侍於殿庭)”고 하는데, 이러한 산신들이 왕을 모셨다는 것은 이들 산천에 대한 제사가 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왕은 사산과 오악에 친히 제사를 지냈을 것이며, 그리고 『삼국사기』 권39 직관 중의 내성관부의 하나인 악전(嶽典)에서 이들 제사를 담당하였을 것이다.(채미하, 2008)

한편 고구려의 삼산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백제의 산천제의 대상에는 삼산이 있었다. 백제는 초기부터 삼산을 비롯한 제의체계가 갖추어졌을 것으로 믿어지지만, 한강유역의 상실로 인하여 제사체계를 다시 만들어야 했으며 사비천도 후에야 비로소 재편할 수 있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남부여· 전백제·북부여조에는 “또 군중에는 일산·오산·부산이라고 하는 삼산이 있는데, 국가가 전성시대에는 그 산위에 신인이 각각 있어 아침 ·저녁으로 늘 날아다녔다(又郡中有三山 曰日山吳山浮山 國家全盛之時 各有神人居其上 飛翔往來 朝夕不絶)” 는 기사는 백제에서 삼산의 존재를 확인해 주고 있다. 여기서 신인은 도교적인 신선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선인 왕검이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 것에서 미루어 볼 때 산신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노중국, 2003)

백제의 삼산의 위치에 대하여는 일산은 현재 부산의 금성산으로 오산은 부여 염창리의 오석산으로 부산은 백마강 맞은 편의 부산에 비정되고 있다.(이도학, 1989) 따라서 이들 삼산은 모두 국도인 사비 부근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백제대향로에서 봉황이 딛고 서 있는 보주(寶珠) 아래의 산은 바로 삼산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것은 삼산이 봉황이 깃드는 산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삼산은 봉황과 더불어 태평성세의 구원이라고 하는 염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백제는 바로 이러한 이상세계를 염원하고 갈망하면서 향로를 만들고 조각들을 새겨놓았다는 것이다.(노중국, 2003)

그런데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 고구려와 백제의 명산대천은 신라의 제사체제 중 중사와 소사에 포함되었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삼산은 이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원래의 성읍국가 사로가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인 신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여 왕경 중심의 지배집단의 제사대상이 되었던 신라의 삼산은 통일 후에도 최고의 신성 산악으로 대사의 대우를 받았다.(이기백, 1995) 이것은 신라가 백제의 산천대사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신라적 기준에 입각하여 가감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 신라 지배층의 경주 원신라 중심적 의식이 기본바탕으로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노중국, 1988)

참고문헌

이병도, 1977, 『譯註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문경현, 1983, 『新羅史硏究』, 경북대학교출판부.
노중국, 1988, 「통일기 신라의 백제고지지배」『한국고대사연구』1.
이도학, 1989, 「사비시대 백제의 사방계산과 호국사찰의 성립」『백제연구』20.
이기백, 1995, 「신라삼산의 의의」『한국고대사론(증보판』, 일조각.
노중국, 2003, 「사비도읍기 백제의 산천제의와 백제금동대향로」『계명사학』14.
나희라, 2003, 『신라의 국가제사』, 지식산업사
최광식, 2007, 『한국고대의 토착신앙과 불교』, 고려대학교출판부.
채미하, 2008,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혜안.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 죽엽군)
未鄒王 竹葉軍
第十三未鄒尼叱今[一作未祖 又未古] 金閼智七世孫 赫世紫纓 仍有聖德 受禪于理解 始登王位[今俗稱王之陵爲始祖堂 蓋以金<氏>始登王位故 後代金氏諸王 皆以未鄒爲始祖 宜矣] 在位二十三年而崩 陵在興輪寺東 第十四儒理王代 伊西國人 來攻金城 我大擧防禦 久不能抗 忽有異兵來助 皆珥竹葉 與我軍幷力 擊賊破之 軍退後不知所歸 但見竹葉積於未鄒陵前 乃知先王陰騭有功 因呼竹現陵 越三十七世惠恭王代 大曆十四年己未四月 忽有旋風 從庾信公塚起 中有一人乘駿馬 如將軍儀狀 亦有衣甲器仗者四十許人 隨從而來 入於竹現陵 俄而陵中似有振動哭泣聲 或如告訴之音 其言曰 臣平生 有輔時救難匡合之功 今爲魂魄 鎭護邦國 攘災救患之心 暫無渝改 往者庚戌年 臣之子孫 無罪被誅 君臣不念我之功烈 臣欲遠移他所 不復勞勤 願王允之 王答曰 惟我與公 不護此邦 其如民庶何 公復努力如前 三請三不許 旋風乃還 王聞之懼 乃遣<上>臣金敬信 就金公陵謝過焉 爲公立功德寶田三十結于鷲仙寺 以資冥福 寺乃金公討平壤後 植福所置故也 非未鄒之靈 無以遏金公之怒 王之護國 不爲不大矣 是以邦人懷德 與三山同祀而不墜 躋秩于五陵之上 稱大廟云
미추왕 죽엽군
제13대 미추니질금[또는 미조(未祖), 또는 미고(未古)라고도 한다.]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이다. 누대에 높은 귀족으로서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이해니질금(理解尼叱今)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비로소 즉위하였다.[지금 세간에서 왕의 능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후대의 모든 김씨 왕들이 미추를 시조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재위 23년만에 죽었는데, 능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공격해왔다. 우리는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막았으나 오랫동안 저항할 수 없었다.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힘을 합쳐 적군을 격파했으나, 군사가 물러간 후에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선왕이 음덕의 공로인 것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능을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불렀다. 먼 뒷날 제37대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14년 기미(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은 준마를 탔는데 그 모양이 장군과 같았고, 또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여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능 속에서 마치 진동하며 우는 소리가 나는 듯하고, 혹은 호소하는 듯한 소리같기도 하였다. 그 말은 이러했다. “신은 평생 정치를 돕고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며 삼국을 통일한 공을 세웠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수호하며, 재앙을 물리치고 환란을 구제하려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고 임금과 신하들이 저의 공적을 생각해 주지 않으니, 신은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겠사오니 원하건데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왕이 대답했다.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하겠소. 공은 다시 이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해도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은 이에 돌아갔다. 왕(혜공왕)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내 상신(上臣) 김경신(金敬臣)을 보내 김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공을 위하여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 공의 명복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을 친 후에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미추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이니, 왕이 나라를 수호함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