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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

기본정보

한사군의 하나

일반정보

한사군의 하나로서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에 세웠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조에는 “한나라에서는 나누어 3군을 설치했는데 현도․낙랑․대방[북대방]이라고 한다.(漢分置三郡,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고 하였으며, 뒷 문장에서는 “한서에서는 진번․임둔․낙랑․현도의 4군으로 되어 있고 지금은 3군이라 하고 이름도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漢書則眞臨樂玄四郡今云三郡名又不同何耶)”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낙랑군은 평양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낙랑군의 설치에 대해서 당초 청천강 이남, 자비령 이북 일대와 황해도 북단을 강역으로 삼아, 조선현 등 11현을 거느린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대(大)낙랑군시대에는 25현이 되었다가 후한초에 동부 7현을 방기(放棄)하면서 18현으로 줄었고 공손씨가 동방군현을 지배하면서부터는 낙랑의 남부 7현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신설하였으므로, 낙랑군은 당초의 속현인 11현을 다시 유지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조위(曹魏)를 거쳐 서진(西晉)시대가 되면 동방군현들의 군세가 쇠락의 형세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낙랑군도 속현이 6개 정도로 줄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침해와 낙랑군내에서 속현의 폐합(廢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낙랑이 완전히 고구려의 소유가 된 뒤에도 450년간 중국세력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더러 남아 있어 동진(東晉)의 봉작을 받고 연호를 사용했는데, 중국의 관작 등이 남아 있는 전명(塼銘)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하였다.(이병도, 1976)

일제시대 이래 평양 일대에서 수습된 봉니(封泥)들에 대부분 낙랑군현 이름이 새겨져 있어, 이 지역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즉 봉니의 보존상태가 지나치게 좋고 서체가 비슷하며, 발견 예가 너무 많다는 점을 들어 조작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조품이 아니더라도 봉니는 수신처에서 발견되는 것이 통례이므로 낙랑군현의 봉니가 나온 평양 지역이 낙랑군현은 될 수 없으며, 요동 일대에 낙랑군이 설치되었음을 주장하였다.(정인보, 1983)

낙랑군이 기원전 108년 평양 지역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4세기에 들어와 고구려의 압력을 피하여 313년에 대릉하 방면으로 옮겨간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대릉하 방면으로 옮겨간 낙랑은 모용씨의 지배하에서 1군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5세기에 북위가 강성해지면서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북위는 432년에서 436년에 걸치는 시기에 북연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낙랑군의 민호를 북경 방면으로 강제 이주시켰고, 이에 따라 낙랑군에 속한 조선현(朝鮮縣) 주민들도 난하 하류 지역에 사민되어 노룡(盧龍) 부근에 북평군(北平郡)의 1개현으로 존립하게 되었다. 그 후 북위 정광(正光) 연간(520-524)에 낙랑군이 대릉하 방면에 부활하였는데, 이 무렵은 북위가 쇠퇴기로 들어가 6진(鎭)의 반란이 일어나자, 그것을 무마하기 위하여 여러 군진을 주(州)로 개편하던 때였다. 낙랑군이 부활한 것도 이러한 정황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낙랑군은 보정(保定) 방면으로 옮겨졌다가 북제(北齊)가 전국의 주․군․현을 대량으로 감축, 정비하면서 폐지되었다. 이처럼 낙랑군의 이동․폐합(廢合) 등은 한반도계 주민의 이동과 거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서 본래 낙랑군이 대릉하 방면으로 이동해 올 때부터 그것은 한반도의 원주민 이동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천관우, 1989)

낙랑고분을 통하여 그 지배세력을 연구한 견해도 있다. 기원전 1세기 전반 서북한 일대의 주요한 묘제는 목곽묘로서, 중원문화의 충격에 의한 급변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묘제의 점진적인 변화와 부장품 등의 양상을 통해 중원문화의 침윤을 확인할 수 있다. 고조선 이래 단장(單葬)의 목곽묘는 이후 이혈합장(異穴合葬)의 목곽묘와 동혈합장(同穴合葬)의 목곽묘로 진전되는데 이러한 변천의 과정은 단절적이라기보다 계기적이고 중복적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 중후반 이후의 낙랑고분에서는 인장(印章), 금은제교구(金銀製鉸具) 등의 부장품이 확인되는데, 당시의 군현지배라는 정치적 조건을 고려할 때 고분의 피장자는 상당부분 한인계(漢人系)였을 것이지만, 그 중에는 군현지배체제 내에 편입된 고조선계 지배세력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오영찬, 2004)

낙랑군의 설치시기에 관해서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의 붕괴 직후, 수도인 왕험성에 설치된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에 회의하면서 위만조선이 기원전 107년에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낙랑군은 왕험성이 아닌 다른 곳에 설치되었다고 하였다. 낙랑군을 비롯하여 한(漢)에 의해 설치된 한군현이 기왕에 존재했던 정치세력집단에 군현체제를 부과한 것에 다름 아니며 특히 낙랑은 친중국적 성향의 동이계 유이민 집단에 의해 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종래 이들의 성격은 한계(漢系)로 파악되었으나 사실 이들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동이계(東夷系)로 통칭되는 예맥한계(濊貊韓系)였으며 그들 중에 일부 한계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낙랑으로 표현된 역사적 존재가 한사군 성립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하였다. 즉 낙랑이라는 존재는 정치체 및 지명적 성격을 공유한 명칭으로 기원전 178년 이전부터 중국에서 이동한 동이계 및 중국계 유이민 세력에 의해 형성된 정치세력이었다. 즉 낙랑이라는 존재가 중국 동북지역 및 발해만 연안 지역에서 육로와 해로로 한반도 지역으로 중국의 정치적 변동에 따라 축차적으로 유망한 친중국 또는 중국문화에 익숙한 세력집단에 대한 지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고조선 세력권에 포섭되어 지배층의 일부를 형성하였고 일부는 중국과도 격리되어 있었으나 해로로는 원활하게 연결된 현재의 평양 일대에 거점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과의 연결성을 바탕으로 국가적 존재로 발전해 “낙랑국(樂浪國)”으로 존재하였고 위만조선이 한과의 전쟁으로 붕괴된 이후 친중국적 성향을 바탕으로 중계교역 거점적 성격이 재 강화된 “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되었다고 하였다.(조법종, 2006)

낙랑군의 성격이 한(漢)의 일반 군현과 비교하여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낙랑 관부(官府)의 외형은 비록 군현의 형태를 취하였지만 성격상으로는 군현의 원형으로부터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일반 군현이 황제의 직접적인 행정단위로서의 기구인데 반하여 낙랑군은 중국이 주변민족을 중화적 세계질서에 안주시키기 위한 기구였다. 즉 낙랑군은 무제시기에 나타난 군현의 새로운 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을 일반 군현과 구별되는 내속군(內屬郡)이라고 하였다.(권오중, 1992)

해방 직후 북한학계에서는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음을 주장하는 설이 주를 이루었는데 여기에서는 기자동래설을 부정하고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의 낙랑 관련설을 부인하였다. 특히 비가 이동되어 온 것이거나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상정됨을 지적하여 이 비를 평양낙랑설의 결정적 자료로 활용하는 일제 강점기의 연구를 비판하였다.(김무림, 1949) 비슷한 논지에서 평양부근에서 발견된 중국계유물과 유적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홍기문, 1949; 홍기문, 1950) 이 시기에는 주로 일제 강점기의 연구 성과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평양낙랑설을 부정한 것이 특징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고학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평양낙랑설을 부정하고 요동지역이 중국인의 상업중심지라는 논리로 요동낙랑설이 제기되었다.(리여성, 1955) 이후 낙랑이 평양에 있었음을 재확인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평양지역에 있는 중국계통의 유적, 유물이 낙랑군의 소산임을 재천명한 것이었다.(도유호, 1962) 그러나 평양지역의 낙랑유적, 유물에 대한 재해석이 요동설의 입장에서 진행되어 더 이상 북한학계에서는 평양설이 제기되지 않게 되었다. 이는 고조선의 영역과도 관련되는 문제로서 기원전 4세기 이후 고대 조선족(朝鮮族)이 요동에 정착하였고 평양지역에 있는 유적, 유물은 중국과 마한(馬韓) 등과의 관련에서 생긴 소산이라고 하였다.(리지린, 1962)

참고문헌

김무림, 1949, 「朝鮮金石에 對한 日帝御用學說의 檢討 -秥蟬縣의 金石學的 分析을 主로-」『歷史諸問題』10.
홍기문, 1949, 「朝鮮의 考古學에 대한 日帝御用學說의 檢討(上)」『歷史諸問題』13.
홍기문, 1950, 「朝鮮의 考古學에 대한 日帝御用學說의 檢討(下)」『歷史諸問題』14.
리여성, 1955, 『朝鮮美術史槪要』, 국립출판사.
리지린, 1962, 「고조선과 3한사람들의 해상활동」『력사과학』1962-1.
도유호, 1962, 「왕검성의 위치」『문화유산』1962-5.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정인보, 1983, 『薝園鄭寅普全集』3, 연세대학교 출판부.
천관우,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권오중, 1992, 『樂浪郡硏究 -中國 古代邊郡에 대한 事例的 檢討-』, 일조각.
오영찬, 2004, 「기원 전후 樂浪郡의 支配勢力에 관한 일연구」『國史館論叢』104.
조법종, 2006, 『고조선 고구려사 연구』, 신서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 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고조선[왕검조선]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경에는 무엽산이라고 했고 또 백악이라고도 한다. 백주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고 하였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란 자가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 땅을 내려다 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바로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 내려와 이를 일러 신시라고 하였으니 그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곰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어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임신하여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당나라 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 경인년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그곳을 궁[방이라고도 한다]홀산 또는 금미달 이라고도 한다. 1500년 동안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라고 하였다. 당의 배구전에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지금 해주]인데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한은 3군(三郡)을 나누어 설치하여 현도・낙랑・대방[북대방]이라 하였으며, 통전에도 이 설과 같다.[한서에서는 진번・임둔・낙랑・현도의 4군으로 되어 있고 지금은 3군이라 하고 이름도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