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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

기본정보

3세기 초에 세워진 중국 군현

일반정보

3세기 초 공손씨 세력이 세운 중국의 군현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조에는 “한나라가 나누어 3군을 설치했는데 현도․낙랑․대방[북대방]이라고 한다.(漢分置三郡,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에 있는 대방군 관련내용은 잘못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대방군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마한전(馬韓傳)에 따르면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196-219)에 요동의 공손씨(公孫氏) 정권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 위치는 한(韓)․예(濊)와 접근한 지역이었으므로 그 군치(郡治)는 황해도 사리원 부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다가 313년에 고구려에 의해 한반도에서 축출되었는데, 그 때 혹은 그 이후 어느 시기에 대릉하 방면에서 모용외(慕容廆)의 지배하에 1군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 뒤 5세기 중엽에 와서 북위(北魏)가 북연(北燕)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대릉하 방면에 있던 대방군의 민호(民戶)를 지금의 북경 방면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러한 민호의 감축으로 대방군은 자연히 폐지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북위 정광(正光) 연간(520-524)에 낙랑군 소속의 대방현(帶方縣)이 대릉하 방면에 부활하였는데, 이 무렵은 북위가 쇠퇴기로 들어가 6진(鎭)의 반란이 일어나자, 그것을 무마하기 위하여 여러 군진을 주(州)로 개편하던 때였다. 대방현이 부활한 것도 이러한 정황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북제(北齊)가 전국의 주․군․현을 대량으로 감축, 정비하면서 대방현도 폐지되었다. 이처럼 대방군의 이동․폐합(廢合) 등은 한반도계 주민의 이동과 거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서 본래 대방군이 대릉하 방면으로 이동해 올 때부터 그것은 한반도의 원주민 이동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천관우, 1989)

한편 공손씨에 의해서 설치된 대방군에 대해 그것이 후한말의 혼란 속에서 약화된 군현 자체의 복구를 꾀한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공손씨들의 세력기반을 확대하려 했다고 보기도 한다. 공손씨 정권은 당시까지 동방정책을 실현하는 전초기지였던 요동지역이 중원으로부터 독립하여 대중국 외교정책을 구사하며, 요동을 중심으로 주변세력을 재편하여 새로운 세력권을 구축하였다. 이후 조위(曹魏)가 동예나 삼한지역을 새로운 교역체계로 개편하려고 하면서 동방정책의 실제적 책임자로 유주자사(幽州刺史)를 부임시키자, 대방군도 군현 단위의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하였다. 서진(西晉)시대에는 주변의 국가들과 진의 중앙정부 사이에 직접적인 교섭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동이교위(東夷校尉)가 그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대방군은 변군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쇠퇴해 갔고 이는 국가와 국가의 교섭이라는 새로운 외교질서로 변화되어 간 데 기인한다고 하였다.(임기환, 2000)

대방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명문자료와 전실묘의 분포를 통하여 황해도 봉산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대방군의 지배세력인 전실묘의 주인공은 재지의 “구민(舊民)” , “유민(遺民)”의 존재, 그리고 요동계(遼東系), 산동계(山東系) 등의 신래한인(新來漢人)을 상정할 수 있다. 대방군은 중원 왕조의 동방정책에 연동하여 성격 변화를 겪었는데, 먼저 후한 말 요동의 독립적인 군벌이 된 공손씨는 낙랑군 둔유현 이남의 황지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대방군 설치 당초에는 군 중심의 군현지배체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서진(西晉)대에는 동이교위부(東夷校尉府)가 본격적으로 기능하면서 대방군은 종래의 역할을 상실하고 군현 지배와는 별개로 서북한 지역에서 전실묘를 축조하여 자율적인 집단으로 존재하였다. 이처럼 오랜 군현지배의 전통을 지닌 평양 일대의 낙랑군과는 달리 군현지배가 단절되었다가 재개된 황해도의 대방군 지역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오영찬, 2003)

참고문헌

천관우,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임기환, 2000, 「3세기-4세기 초 위(魏)․진(晉)의 동방 정책 -낙랑군․대방군을 중심으로-」『역사와 현실』36.
오영찬, 2003, 「帶方郡의 郡縣支配」『강좌 한국고대사』10.
<용어사전>
정광(正光) : 520-524. 중국 북위(北魏)의 연호.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 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고조선[왕검조선]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경에는 무엽산이라고 했고 또 백악이라고도 한다. 백주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고 하였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란 자가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 땅을 내려다 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바로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 내려와 이를 일러 신시라고 하였으니 그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곰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어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임신하여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당나라 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 경인년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그곳을 궁[방이라고도 한다]홀산 또는 금미달 이라고도 한다. 1500년 동안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라고 하였다. 당의 배구전에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지금 해주]인데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한은 3군(三郡)을 나누어 설치하여 현도・낙랑・대방[북대방]이라 하였으며, 통전에도 이 설과 같다.[한서에서는 진번・임둔・낙랑・현도의 4군으로 되어 있고 지금은 3군이라 하고 이름도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