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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주

기본정보

신라의 지방행정구역

일반정보

한산주(漢山州)는 신라(新羅)의 지방행정구역인 9주(州) 중 하나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신라는 신문왕 5년(685)에 신라, 고구려, 백제의 옛 땅에 각각 3개씩의 주(州)를 설치하여 모두 9주를 갖추었는데, 이때 고구려의 옛 경계 안에 설치한 3주 중 하나의 명칭으로 한산주가 확정되었다. 이후 고려 태조 23년(940)에 광주(廣州)로 개칭된 이래 조선시대까지 그 명칭을 유지하였다.

전문정보

한산주(漢山州)는 신라(新羅)의 지방행정구역인 9주(州) 중 하나이다. 한산주의 전신인 신주(新州)는 신라 진흥왕 14년(553) 7월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원래 한산주의 영역은 한성시기 백제 왕경의 영역권 아래 놓여있었는데, 475년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키면서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였다. 이후 551년 백제의 성왕이 이 지역을 회복하였으나, 신라 진흥왕이 이를 다시 빼앗아 신주를 설치함에 따라 신라의 영역 속에 새롭게 편입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진흥왕 18년(557)에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가, 같은 왕 29년(568)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 또, 진평왕 26년(604)에는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신라는 신문왕 5년(685)에 신라, 고구려, 백제의 옛 땅에 각각 3개씩의 주(州)를 설치하여 모두 9주를 갖추었는데, 이때 고구려의 옛 경계 안에 설치한 3주 중 하나의 명칭으로 한산주가 확정되었다.

제35대 경덕왕(景德王)대 신라는 신문왕대 설치한 9주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개칭하였는데,『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16년(757)조에 따르면 이때 신라는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고친 뒤, 1소경․27군․46현을 거느리게 하였다.(漢山州爲漢州 領州一小京一郡二十七縣四十六)”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칭 이후에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한산주라는 명칭이 계속 등장하고 있어, 경덕왕대 이후에도 신라에서는 두 명칭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 한주는 태조 23년(940)에 광주(廣州)로 개칭된 이래 조선시대까지 그 명칭을 계속 유지하였다.

한산주의 지역적 범위를 살펴보면 먼저 북으로는 대동강 이남의 현재 평안남도와 황해도 전역을 관할하였다. 동으로는 황해도 곡산에서 경기도 여주, 충청도 충주를 연결하는 선 서쪽이 한주에 속했으며, 남쪽 경계는 아산만 입구의 경기도 평택에서부터 충청북도 천안의 북부지역까지 한주의 영역이었다. 이처럼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한주의 행정 중심은 현재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었으나 그 치소(治所)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2년(672)조에 따르면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그 길이가 4,300보였다고 한다. 이 길이는 주척(周尺)으로 계산했을 시 대략 5,230m 정도로, 주장성이 한산주의 주성(主城)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하다. 주장성은 오늘날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전신이다.(이기동, 2005)

신라 중대(中代) 진골귀족 출신의 저술가 김대문(金大問)은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都督)에 임명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대문은 『화랑세기(花郞世記)』, 『계림잡전(鷄林雜傳)』, 『고승전(高僧傳)』,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 등과 같은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고 한다. 그 중 『한산기(漢山記)』라는 책은 그 이름으로 보아 한산주에 얽힌 역사와 지리, 토산품 등을 기록한 저작으로 추정된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1 장춘랑파랑(長春郞罷郞)조에는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이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장춘랑(長春郎)과 파랑(罷郎)을 위해 한산주에 장의사(壯義寺)를 세우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한산주 연혁을 따르자면 무열왕대 이 지역의 명칭은 한산주가 아닌 북한산주가 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이기동, 2005,「통일기 신라의 지방제도와 漢州」『鄕土서울』66.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장춘랑 파랑)
長春郞 罷郞[一作羆]
初與百濟兵 戰於黃山之役 長春郞罷郞 死於陣中 後討百濟時 見夢於太宗曰 臣等昔者爲國亡身 至於白骨 庶欲完護邦國 故隨從軍行 無怠而已 然迫於唐帥定方之威 逐於人後爾 願王加我以小勢 大王驚怪之 爲二魂 說經一日於牟山亭 又爲創壯義寺於漢山州 以資冥援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비랑(羆郞)이라고도 한다.]
처음에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웠던 전투에서 장춘랑과 파랑이 진중에서 죽었다. 후에 백제를 공격할 때 태종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신 등은 지난 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지금 백골이 되었으나, 나라를 끝까지 수호하려고 군대를 따라다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의 장수 소정방의 위엄에 눌려 남의 뒤로만 쫓겨다니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저희에게 작은 힘을 보태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대왕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령을 위하여 하루 동안 모산정에서 불경을 설하게 하고, 또 한산주에 장의사를 세워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