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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

기본정보

신라 흥덕왕 3년(828)에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장보고가 세운 진(鎭)

일반정보

청해진은 당나라 해적들이 신라인들을 잡아다가 노비로 파는 일을 막고자하는 목적으로 장보고가 흥덕왕 3년(828)에 세운 진(鎭)이다.

전문정보

청해진은 당나라 해적들이 신라인들을 잡아다가 노비로 파는 일을 막고자하는 목적으로 장보고가 흥덕왕 3년(828)에 세운 진(鎭)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신무대왕 염장 궁파조에 따르면 장보고가 머물던 근거지로 청해진이 언급된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흥덕왕 3년(828)조에 따르면 이 청해진은 828년 장보고가 왕을 뵙고 군사 1만으로 청해를 지키겠다고 하였을 때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로 문성왕 8년(846) 장보고가 자신의 딸이 문성왕의 차비로 들어가는 것이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그의 반란의 근거지가 된다. 따라서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문성왕 13년(851)조에는 “청해진(淸海鎭)을 폐지하고 그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다고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 신라종묘지제(新羅宗廟之制)조에서 국가적인 제사인 중사(中祀)가 행해지던 사독(四瀆) 중의 하나로 “청해진[조음도](淸海鎭[助音島])”라고 하여 청해진을 언급하고 있다.

청해진의 설치 배경을 흥덕왕의 왕권강화 측면에서 설명한 연구가 있다. 당시 흥덕왕은 왕권을 강화하려던 노력으로 조공을 통해 당과 접촉하고 있었으나 해적에 의해 조공이 피해를 입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흥덕왕은 당과의 빈번한 접촉을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던 것이고 이것이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청해진은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당․일본과의 무역을 장악하여 왕도 경주의 관문인 울산항으로 향하는 선박을 통제 혹은 보호할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을 갖춘 곳이므로 흥덕왕은 신라 귀족과 직접적 연결이 없는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였다고 한다.(서윤희, 2001)

청해진에서 장보고가 이끌었다고 하는 군사 1만의 성격에 대해서, 조정에서 허락한 일종의 민군(民軍) 조직으로서 장보고가 현지 완도의 1만 명을 수급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내어 청해진을 설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상기, 1948) 반면 장보고가 신무왕의 왕위계승을 보좌할 정도로 군사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820년대 초 당 번진의 퇴역군인들을 규합하고 완도 주변의 백성들을 끌어들여 청해진의 군사를 조성하였는데, 청해진 전성기의 병력수가 『삼국사기』에 이르는 병사 1만 명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권덕영, 2005)

청해진은 장보고가 설치한 이후 한․중․일의 삼각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그리고 청해진은 국가에서도 중요한 요지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삼국사기』 제사지에서 중사가 행해지는 사독 중 하나로 청해진이 기록되어 있어 알 수 있다. 중사가 행해진 기간은 장보고가 청해진을 경영하던 시기에 국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강영철, 1985)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의 영역에 대해서 완도는 청해진의 총사령부가 위치했던 곳이며 그 관할영역은 완도군․강진군․해남군 등을 비롯한 광범위한 지역에 해당되었을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정태헌, 1985) 그러나 이렇게 넓은 영역을 청해진이 관할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단지 완도뿐만 아니라 주변의 섬들인 고금도, 조약도, 신지도를 아우르는 것으로 보여 진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최근영․민덕식, 1985)

현재 완도군(莞島郡)은 전라남도 최남단에 위치한 여러 개의 섬으로 구성된 군으로 완도를 중심으로 고금도(古今島), 신지도(薪智島), 보길도(甫吉島), 청산도(靑山島), 조약도(助樂島), 소안도(所安島)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완도 일대에 청해진과 관련 있다고 생각되는 유적 중 발굴조사가 실시된 유적은 장도유적이라고 한다. 장도유적은 완도 본섬의 동쪽 중간쯤에 위치하는 장좌리(長佐里)에서 동쪽으로 약 18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91년부터 2001년까지 8차에 걸쳐 장도 청해진 유적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성벽, 건물지, 매납유구, 섬입구의 “ㄷ”자형 판축유구와 우물, 섬입구 해안의 원목렬과 잔목렬 등이 확인되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 2002) 특히 매납유구에서 철제와 청동제로 된 제사용기들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삼국사기』제사지의 청해진을 중사로 기록해 놓은 것과 연관된다고 보인다. 또 청해진 뒤에 세주로 조음도(助音島)라고 언급되어 있어 현재 장도가 청해진의 중심지이며 중사가 행해지던 당시의 조음도로 추측된다고 한다.(윤근일 외, 2002)

청해진은 장도 섬 전체를 이용하여 독립된 성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도 주변인 고금도․조약도․신지도는 각각 해중에 떨어져 있으나 이들이 대해를 차단하고 있어, 장도는 흡사 만(灣) 안에 있는 섬과 같이 천연적인 내해(內海)에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장도 출입시에는 이들 주변도서의 해협이 관애(關阨)의 구실을 하게 되어 방어에 유리한 천연요새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최근영․민덕식, 1985)

참고문헌

김상기, 1948, 「古代의 交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대하여」『東方文化交流史論攷』, 을유문화사.
강영철, 1985, 「완도의 역사적 고찰」『張保皐의 新硏究』, 완도문화원.
김광수, 1985, 「장보고의 정치사적 위치」『張保皐의 新硏究』, 완도문화원.
이기동, 1985, 「張保皐와 그의 海上勢力」『張保皐의 新硏究』, 완도문화원.
정태헌, 1985, 「淸海鎭과 他軍鎭과의 비교적 고찰」『張保皐의 新硏究』, 완도문화원.
최근영․민덕식, 1985, 「淸海鎭의 歷史的 考察과 그 城의 分析」『張保皐의 新硏究』, 완도문화원.
서윤희, 2001, 「淸海鎭大使 張保皐에 관한 연구 -新羅 王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震檀學報』92.
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將島淸海鎭: 遺蹟發掘調査報告書』2,
윤근일․김성배․정석배, 2002 「청해진의 종합적 고찰 -장도 청해진유적을 중심으로-」『장보고와 동아시아세계』, 고려대학교 박물관.
권덕영, 2005, 『재당 신라인사회 연구』, 일조각.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신무대왕 염장 궁파)
神武大王 閻長 弓巴
第四十五神武大王 潛邸時□俠士弓巴曰 我有不同天之讎 汝能爲我除之 獲居大位 則娶爾女爲妃 弓巴許之 協心同力 擧兵犯京師 能成其事 旣簒位 欲以巴之女爲妃 群臣極諫曰 巴側微 上以其女爲妃則不可 王從之 時巴在淸海鎭爲軍戍 怨王之違言 欲謀亂 時將軍閻長聞之 奏曰 巴將爲不忠 小臣請除之 王喜許之 閻長承旨歸淸海鎭 見謁者通曰 僕有小怨於國君 欲投明公 以全身命 巴聞之大怒曰 爾輩諫於王而廢我女 胡顧見我乎 長復通曰 是百官之所諫 我不預謀 明公無嫌也 巴聞之 引入廳事 謂曰 卿以何事來此 長曰 有忤於王 欲投幕下 以免害爾 巴曰 幸矣 置酒歡甚 長取巴之長劍斬之 麾下軍士驚懾皆伏地 長引至京師復命曰 已斬弓巴矣 上喜賞之 賜爵阿干
신무대왕(神武大王) 염장(閻長) 궁파(弓巴)
제45대 신무대왕(神武大王)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협사(俠士)인 궁파(弓巴)에게 말하기를, “내겐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가 있다. 네가 나를 위해 그를 제거해준다면, 왕위를 차지한 후에 너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겠다.”고 하였다. 궁파는 이를 허락하고,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군대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가 그 일을 이룰 수 있었다. (왕이) 이미 왕위를 빼앗고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고 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극력으로 간하기를, “궁파는 미천한 신분이니 임금께서 그 딸을 왕비로 삼는 것은 불가합니다.”고 하여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그때 궁파는 청해진에서 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꾀하려고 하였다. 이때 장군 염장이 이 말을 듣고 (왕에게) 아뢰기를,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못한 일을 하려고 하니, 소신이 그를 제거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염장은 뜻을 받들고 청해진(淸海鎭)으로 가서 연락하는 사람을 통해 말하기를, “나는 우리 왕에게 작은 원망이 있소. 명철한 공에게 의탁하여 신명을 보전하려고 합니다.”고 하였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성내 말하기를, “너희들이 왕에게 간하여 나의 딸을 폐하게 하고 어찌 나를 보려고 하느냐?”고 하였다. 염장이 다시 통해 말하기를, “그것은 많은 관료가 간한 것이고, 나는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명철하신 공께서는 (나에게) 혐의를 가지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궁파가 이 말을 듣고 청사(廳事)에 불러들여 (염장에게) 이르기를, “경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소?”라고 하니, 염장이 말하기를, “왕에게 거스른 일이 있어, (공의) 막하에 들어가 해를 면하려고 할 뿐입니다.”고 하였다. (이때) 염장이 궁파의 장검을 취해 그를 베니, 휘하의 군사들이 놀라고 무서워서 모두 땅에 엎드렸다. 염장이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와 복명하여 말하기를, “이미 궁파를 베었습니다.”고 하니, 왕은 기뻐하면서 그에게 상을 주고 아간의 벼슬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