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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정역

기본정보

신라시기에 울산지역에 있었던 역으로 추정

일반정보

굴정역(屈井驛)은 신라시기에 울산지역에 있었던 역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영축사(靈鷲寺)조에서 굴정역이 언급된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 나물왕김제상(奈勿王金堤上)조에는 굴헐역(屈歇驛)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굴정역에 대한 이칭으로 보기도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영축사(靈鷲寺)조를 보면 신라 진골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영순(永淳) 2년(683) 계미에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萇山國)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桐旨)들판에서 머무르며 쉬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 매를 놓아 꿩을 좇게 했는데, 그 꿩이 날아서 금악(金岳)을 지나갔다. 어두워서 종적을 찾을 수 없었지만, 방울소리를 듣고 그것을 찾아 굴정현(屈井縣) 관아 북쪽 우물가에 이르렀다.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안에 있었는데, 우물 안의 물이 핏빛으로 흐려졌다. 꿩이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으니 매도 그것을 측은히 여기는지 함부로 움켜쥐지 않았다. 공이 그것을 보고 측은함을 느껴 이곳에 대해서 점쳐서 물었더니, 절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공이 서울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어, 그 현의 관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땅에 절을 지으니 이에 영축사(靈鷲寺)라고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신라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 온정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굴정역(屈井驛)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굴정역(屈井驛)은 굴정현(屈井縣)에 있던 역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1 나물왕김제상(奈勿王金堤上)조에서는 신라 제 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의 동생 미해(美海)가 김제상의 도움으로 왜를 탈출하여 바다를 건너오자 왕은 놀랍고도 기뻐 백관에게 명하여 굴헐역(屈歇驛)에서 맞이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등장하는 굴헐역(屈歇驛)을 굴정역(屈井驛)의 이칭으로 보기도 한다. 굴헐역은 왜로부터 돌아오는 왕자를 맞이하러 나간 곳인 만큼 왜국과 통하는 항구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입지조건과 부합되는 현재 울산을 굴헐역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또한 굴헐역은 신라가 남동쪽으로 진출하여 해외로 나아가는 기점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성장과 발전에 있어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견해가 있다.(울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2)

굴정역과 관련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감통(感通)7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조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에 굴불지(屈弗池)의 용이 황제의 꿈에 나타나 영축산에 약사도량(藥師道場)을 개설하여 바닷길을 편안하게 해 줄 것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굴불이란 지명을 울산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경상도 울산군 건치연혁조를 살펴보면 울산은 본래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이라고 하였는데, 여기 등장하는 굴아화촌은 불에서 파생된 이름이기에 본래는 굴불이었다고 본 것이다. 즉 굴불=굴아화=울산으로 추정한 것이다.(서영대, 2001) 여기서 더 나아가 울산=굴불=굴화로 본 견해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경상도 울산군 역원조를 보면 굴화역(堀火驛)이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며, 옛날 하곡현(河曲縣) 옛터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보이는 굴화(堀火)는 역시 울산의 옛지명인 굴아화촌에서 파생된 지명으로 본 것이다.(강인구 외, 2003) 이상을 정리하면 울산은 본래 굴아화촌이었는데 여기서 굴불, 굴화 등의 지명이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 굴화와 굴헐은 음운상으로 상당히 유사하므로 동일한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굴화와 굴헐을 같은 지역으로 본다면 굴헐의 이칭으로 생각되는 『삼국유사』 영축사조의 굴정 또한 울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지리상 경주와 동래 사이에 울산이 위치하고 있으므로, 영축사조의 내용처럼 신라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지금의 부산지역)의 온천을 즐기고 돌아오는 길에 울산 지역을 지나갔을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서영대, 2001, 「울산지역의 사찰설화」『울산연구』3, 울산대학교 박물관.
강길부, 2002, 『땅이름 울산사랑 : 울주군 편』, 정도출판사.
울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편, 2002, 『蔚山廣域市史』, 울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2002,『譯註 三國遺事』, 이회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나물왕김제상)
奈勿王[一作那密王]金堤上
第十七那密王 卽位三十六年庚寅 倭王遣使來朝曰 寡君聞大王之神聖 使臣等以告百濟之罪於大王也 願大王遣一王子 表誠心於寡君也 於是王使第三子美海[一作未<叱>喜] 以聘於倭 美海年十歲 言辭動止猶未備具 故以內臣朴娑覽爲副使而遣之 倭王留而不送三十年 至訥祗王卽位三年己未 句麗長壽王 遣使來朝云 寡君聞大王之弟寶海 秀智才藝 願與相親 特遣小臣懇請 王聞之幸甚 因此和通 命其弟寶海 道於句麗 以內臣金武謁爲輔而送之 長壽王又留而不送 至十年乙丑 王召集群臣及國中豪俠 親賜御宴 進酒三行 衆樂初作 王垂涕而謂群臣曰 昔我聖考 誠心民事 故使愛子東聘於倭 不見而崩 又朕卽位已來 隣兵甚熾 戰爭不息 句麗獨有結親之言 朕信其言 以其親弟聘於句麗 句麗亦留而不送 朕雖處富貴 而未嘗一日暫<忘>而不哭 若得見二弟 共謝於先主之廟 則能報恩於國人 誰能成其謀策 時百官咸奏曰 此事固非易也 必有智勇方可 臣等以爲歃羅郡太守堤上可也 於是王召問焉 堤上再拜對曰 臣聞 主憂臣辱 主辱臣死 若論難易而後行 謂之不忠 圖死生而後動 謂之無勇 臣雖不肖 願受命行矣 王甚嘉之 分觴而飮 握手而別 堤上簾前受命 徑趨北海之路 變服入句麗 進於寶海所 共謀逸期 先以五月十五日 歸泊於高城水口而待 期日將至 寶海稱病 數日不朝 乃夜中逃出 行到高城海濱 王知之 使數十人追之 至高城而及之 然寶海在句麗 常施恩於左右 故其軍士憫傷之 皆拔箭鏃而射之 遂免而歸 王旣見寶海 益思美海 一欣一悲 垂淚而謂左右曰 如一身有一臂一面一眼 雖得一而亡一 何敢不痛乎 時堤上聞此言 再拜辭朝 而騎馬不入家 而行直至於栗浦之濱 其妻聞之 走馬追至栗浦 見其夫已在舡上矣 妻呼之切懇 堤上但搖手而不駐 行至倭國 詐言曰 雞林王以不罪殺我父兄 故逃來至此矣 倭王信之 賜室家而安之 時堤上常陪美海遊海濱 逐捕魚鳥 以其所獲 每獻於倭王 王甚喜之 而無疑焉 適曉霧濛晦 堤上曰 可行矣 美<海>曰 然則偕行 堤上曰 臣若行 恐倭人覺而追之 願臣留而止其追也 美海曰 今我與汝如父兄焉 何得棄汝而獨歸 堤上曰 臣能救公之命 而慰大王之情 則足矣 何願生乎 取酒獻美海 時雞林人康仇麗在倭國 以其人從而送之 堤上入美海房 至於明旦 左右欲入見之 堤上出止之曰 昨日馳走於捕獵 病甚未起 及乎日昃 左右怪之 而更問焉 對曰 美海行已久矣 左右奔告於王 王使騎兵逐之 不及 於是囚堤上問曰 汝何竊遣汝國王子耶 對曰 臣是雞林之臣 非倭國之臣 今欲成吾君之志耳 何敢言於君乎 倭王怒曰 今汝已爲我臣 而言雞林之臣 則必具五刑 若言倭國之臣者 必賞重祿 對曰 寧爲雞林之犬㹠 不爲倭國之臣子 寧受雞林之箠楚 不受倭國之爵祿 王怒 命屠剝堤上脚下之皮 刈蕪葭使趨其上[今蕪葭上 有血<痕> 俗云 堤上之血] 更問曰 汝何國臣乎 曰 雞林之臣也 又使立於熱鐵上 問 何國之臣乎 曰 雞林之臣也 倭王知不可屈 燒殺於木島中 美海渡而來 使康仇麗先告於國中 王驚喜 命百官迎於屈歇驛 王與親弟寶海迎於南郊 入闕設宴 大赦國內 冊其妻爲國大夫人 以其女子爲美海公夫人 識者曰 昔漢臣周苛在榮陽 爲楚兵所虜 <項>羽謂周苛曰汝爲我臣 封爲萬祿<侯> 周苛罵而不屈 爲楚王所殺 堤上之忠烈 無怪於周苛矣 初堤上之發去也 夫人聞之追不及 及至望德寺門南沙上 放臥長號 因名其沙曰長沙 親戚二人 扶腋將還 夫人舒脚 坐不起 名其地曰伐知旨 久後夫人不勝其慕 率三娘子上鵄述嶺 望倭國痛哭而終 仍爲鵄述神母 今祠堂存焉

나물왕(奈勿王)[나밀왕(那密王)이라고도 한다] 김제상(金堤上)
제17대 나밀왕이 즉위한 지 36년 경인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와 내조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왕의 신성함을 듣고 신들에게 백제의 죄를 대왕에게 아뢰도록 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대왕은 왕자 한 명을 보내 저희 임금에게 성의를 표해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셋째 아들 미해[미질희라고도 한다]를 시켜 왜를 방문하게 하였다. 미해는 나이가 10살이라 말이나 행동이 아직 갖춰지지 못하여 내신 박사람을 부사로 삼아 같이 보냈는데, 왜왕이 억류하여 30년 동안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 즉위 3년 기미에 이르러 고구려의 장수왕이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왕의 아우인 노해가 지혜롭고 재주가 있음을 듣고 서로 친하기를 원해서 특별히 소신을 보내 간청하는 바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다행이라고 여겨 이로 인하여 화친을 맺고, 아우 보해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가게하고, 내신 김무알을 보좌로 삼아 보냈다. 장수왕도 또한 억류하여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 10년 을축에 이르러 왕이 신하들과 국내의 호걸·협객을 불러 모아 친히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세 번 돌고 여러 음악이 시작되자, 왕이 눈물을 흘리며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전에 아버님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한 정사를 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으로 왜국에 사절로 보냈다가 다시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또 내가 즉위한 이래 이웃 나라의 군사가 심히 강성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고구려만이 친교를 맺자는 말을 하므로 내가 그 말을 믿고 내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더니, 고구려 역시 억류해두고 보내지 않았다. 내가 비록 부귀를 누리지만 하루라도 잊고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만약 두 아우를 만나서 함께 선왕의 사당에 참배할 수 있게 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을 것이니 누가 능히 그 계책을 이룰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 때 백관이 모두 아뢰기를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으니 반드시 지혜와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신들은 삽라군의 태수 제상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불러 물으니 제상이 두 번 절하고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듣기를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일이 어렵고 쉬운 것을 헤아린 후에 행한다면 그것은 충성되지 못한다고 할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을 도모한 후에 움직인다면 그것은 용기가 없다고 할 것이니, 신은 비록 불초하오나 왕명을 받들어 행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심히 가상히 여겨 술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고 작별하였다. 제상은 왕 앞에서 명령을 받고 곧장 북해의 길로 가서 변복을 하고 고구려에 들어갔다. 보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서 함께 도망할 날짜를 모의하고, 먼저 5월 15일 고성의 수구로 돌아와 기다렸다. 약속한 기일이 가까워지자 보해가 병을 핑계로 며칠 동안 조회에 나가지 않다가 밤중에 몰래 도망쳐 고성의 해변에 이르렀다. 왕이 이를 알고 수십 명을 시켜 뒤쫓게 하여 고성에 이르러 따라 잡았다. 그러나 보해가 고구려에 있을 때에 항상 상종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군사들이 그를 매우 동정하여 모두 화살촉을 뽑고 쏘았으므로 마침내 살아서 돌아왔다. 왕이 보해를 보게 되자 더욱 미해의 생각이 나서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퍼서 눈물을 흘리며 좌우에게 말하기를 “마치 한 몸에 팔 하나와 한 얼굴에 눈 하나만 있는 것만 같아서 비록 하나는 얻었으나 다른 하나가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 제상은 이 말을 듣고 재배하여 조정과 하직하고 말을 타고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길을 떠나 곧장 율포의 해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소문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갔지만, 남편은 이미 배를 타고 있었다. 아내가 안타깝게 불렀으나 남편은 다만 손을 흔들 뿐 멈추지 않았다. 왜국에 이르러 거짓으로 말하기를 “계림왕이 아무 죄도 없이 나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였기 때문에 여기로 도망해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왜왕은 그 말을 믿고 집을 주어 편히 살게 하였다. 이 때 제상은 항상 미해를 모시고 해변에서 놀면서 새와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잡은 것을 매번 왜왕에게 바치니, 왕이 무척 기뻐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제상이 말하기를 “떠나가실만 합니다”라고 하였더니, 미해가 “그러면 같이 가자”고 하였다. 제상이 말하기를 “신이 만약 간다면 왜인이 알고 쫓아올까 염려되오니, 원컨대 신은 이 곳에 남아서 그들이 쫓는 것을 막을까 합니다”라고 하였다. 미해가 “지금 나와 그대의 사이는 부형과 같은데, 어찌 그대를 버리고 혼자만 돌아가겠는가?” 라고 하니, 제상이 말하길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여 대왕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으면 만족합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라고 하고 술을 따라 미해에게 바쳤다. 이 때 계림 사람 강구려가 왜국에 와 있었으므로, 그에게 미해를 따라 호송하게 하고,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 있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 좌우의 왜인들이 들어가 미해를 보고자 하니, 제상이 나와서 그들을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어제 사냥을 하면서 쏘다녔기 때문에 몹시 고단하여 일어나지 못하십니다”라고 하였다. 한낮이 지나자 왜인들이 이상하게 여겨 다시 묻자, 대답하기를, “미해가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다”라고 하였다. 왜인들이 급히 왕에게 아뢰니, 왕이 기병으로 쫓게 했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이에 제상을 가두고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몰래 너의 나라 왕자를 보냈느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지금 내 임금의 뜻을 이루려 한 것뿐이니, 감히 무엇을 그대에게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왜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지금 너는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다. 그런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오형을 받을 것이다.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후한 녹으로 상을 주겠노라”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으며, 차라리 계림의 형장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왕이 노하여 제상의 발바닥의 껍질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그 위를 걸어가게 하였다.[지금 갈대 위에 핏자국이 있는데 세간에서는 제상의 피라고 한다.] 다시 묻기를 “어느 나라의 신하냐?”라고 하니, 말하기를 “계림의 신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뜨겁게 달군 쇠 위에 세워 놓고 묻기를, “어느 나라 신하냐?”고 하니, 말하기를 “계림의 신하다”라고 하였다. 왜왕이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목도란 곳에서 태워 죽였다. 미해는 바다를 건너와 강구려에게 먼저 나라에 알리게 하였다, 왕은 놀랍고 기뻐서 백관에게 명하여 굴헐역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친아우 보해와 함께 남교에서 맞이하고, 대궐로 들어가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크게 사면령을 내렸으며, 제상의 아내를 책봉하여 국대부인으로 삼고, 그의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논자가 말하기를, “옛날 한나라 신하 주가가 형양에 있다가 초나라 병사의 포로가 되었을 때 항우가 주가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의 신하가 되면 만호의 녹을 받는 제후로 책봉하리라’고 하니, 주가가 꾸짖으면서 굴복하지 않다가 초왕에게 살해되었는데, 제상의 충렬은 주가에 못지않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제상이 떠날 때 부인이 소문을 듣고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망덕사의 문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드러누워 길게 부르짖었던 까닭에 그 모래사장을 장사라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돌아오려 했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그 땅을 벌지지라고 하였다. 오랜 뒤에도 부인이 그 사모함을 이기지 못해 세 딸을 이끌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리하여 치술신모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이 있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영축사)
靈鷲寺
寺中古記云 新羅眞骨第三十一主神文王代 永淳二年癸未[本文云元年誤] 宰相忠元公 萇山國[卽東萊縣 亦名萊山國]溫井沐浴 還城次 到屈井驛桐旨野駐歇 忽見一人放鷹而逐雉 雉飛過金岳 杳無蹤迹 聞鈴尋之 到屈井縣官北井<邊> 鷹坐樹上 雉在井中 水渾血色 雉開兩<翅> 抱二雛焉 鷹亦如相惻隱 而不敢攫也 公見之惻然有感 卜問此地 云可立寺 歸京啓於王 移其縣於他所 創寺於其地 名靈鷲寺焉

영축사
절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신라 진골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대 영순(永淳) 2년 계미(683)에[본문에 원년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萇山國)[곧 동래현(東萊縣)이니 또는 내산국(萊山國)이라 이른다.]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桐旨)들판에 머무르며 쉬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 매를 놓아 꿩을 쫓게 했는데, 꿩은 날아서 금악(金岳)을 지나갔다. 어두워서 종적을 찾을 수 없었는데 방울소리를 듣고 그것을 찾아 굴정현(屈井縣) 관아 북쪽 우물가에 이르렀다.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안에 있었는데 물이 핏빛으로 흐려졌다. 꿩이 두 날개를 열어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으니 매도 또한 그것을 측은히 여기는지 함부로 움켜쥐지 않았다. 공(公)이 그것을 보고 측은한 느낌이 있어 이곳에 대하여 점을 쳐서 물었더니, ‘절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어, 그 현의 관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땅에 절을 지으니 이에 영축사(靈鷲寺)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