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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벌포

기본정보

백제의 요지로 사비성 근처의 나루

일반정보

백제의 요지로 사비성 근처의 나루이다. 백제의 좌평 성충과 좌평 흥수가 전쟁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했던 곳이다. 660년 당나라 군대가 덕물도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신라군을 이곳에서 만났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조에서 좌평 성충이 죽기 전 의자왕에게 글을 써서 “외적이 쳐들어오거든 …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즉 장암(長岩)이니, 또는 손량(孫梁), 혹은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도 한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험한 곳에 웅거하여 막아야만 될 것입니다”라고 간하였다. 또 같은 조에서 “백강[곧 기벌포이다]”로도 나온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서도 “백강(白江)[곧 기벌포이다]”으로 표기되고 있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태종 무열왕 7년(660)조에 의하면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당시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은 덕물도에 와서 김유신과 기벌포에서 만나기로 기약했으나, 김유신 군대는 황산에서 백제와 전투를 벌인 뒤 7월 10일 기벌포에서 소정방이 백제군을 공격한 후에 그곳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을 『삼국사기』 권44 열전4 김인문조에는 “(당군이) 웅진구(熊津口)에 이르니, 적군(백제)이 강가에 군사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와 싸워서 이기고 승세를 타서 그 도성에 들어가 멸하였다.(延之至熊津口 賊瀕江屯兵 戰破之)”고 하였다. 곧 당나라 군사가 백제군을 맞아 싸운 장소를 신라본기에서는 “기벌포”라 하고 김인문전에서는 “웅진구(熊津口)”라고 적고 있다.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기벌포를 “일명 백마강(一名白馬江)”이라고 세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부여현․산천조에서 “백마강(白馬江) 현 서쪽 5리에 있다. 양단포(良丹浦) 및 금강천(金剛川)이 공주의 금강(錦江)과 합류하여 이 강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므로 백마강은 금강의 하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위 기사를 종합해 보아 기벌포는 “웅진강구(熊津江口)”, “백강지구(白江之口)”와 같은 것으로 금강의 하류의 해구(海口)를 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연구가 있다.(三品彰英, 『三國遺事考証』上, 塙書房) 그리고 특별히 그 위치를 현재의 금강(錦江)하구인 장항(長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7)

한편 웅진강과 백강을 각기 다른 강으로 보고 기벌포를 동진강(東津江) 하구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백제부흥운동(百濟復興運動)조에서 “유인궤 및 별장(別將) 두상(杜爽)과 부여륭은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고 웅진강(熊津江)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갔다.(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帥水軍及粮船 自熊津江往白江)”고 기록하고 있는데, 곧 당의 수군은 웅진강을 나와서 백강으로 나아갔으므로 웅진강과 백강은 같은 곳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백강의 다른 명칭인 기벌포가 동진강구에 있는 계화도(界火島)의 고음(古音)과 유사하다고 하여 기벌포를 동진강 하구로 보았다.(小田省吾, 1927)

참고문헌

小田省吾, 1927, 『朝鮮史大系: 上世史』, 朝鮮史學會.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
太宗春秋公
第二十九太宗大王 名春秋 姓金氏 龍樹[一作龍春]角干追封文興大王之子也 妣眞平大王之女天明夫人 妃文明皇后文姬 卽庾信公之季妹也 初文姬之姊寶姬 夢登西岳捨溺 瀰滿京城 旦與妹說夢 文姬聞之謂曰 我買此夢 姊曰 與何物乎 曰 鬻錦裙可乎 姊曰 諾 妹開襟受之 姊曰 疇昔之夢 <傳>付於汝 妹以錦裙酬之 後旬日 庾信與春秋公 正月午忌日[見上射琴匣事 乃崔致遠之說] 蹴鞠于庾信宅前[羅人謂蹴鞠爲弄珠之戲] 故踏春秋之裙 裂其襟紐曰 請入吾家縫之 公從之 庾信命阿海奉針 海曰 豈以細事輕近貴公子<乎> 因辭[古本云 因病不進] 乃命阿之 公知庾信之意 遂幸之 自後數數來往 庾信知其有娠 乃嘖之曰 爾不告父母 而有娠何也 乃宣言於國中 欲焚其妹 一日俟善德王遊幸南山 積薪於庭中 焚火烟起 王望之問何烟 左右奏曰 殆庾信之焚妹也 王問其故 曰 爲其妹無夫有娠 王曰 是誰所爲 時公昵侍在前 顔色<大>變 王曰 是汝所爲也 速往救之 公受命馳馬 傳宣沮之 自後現行婚禮 眞德王薨 以永徽五年甲寅卽位 御國八年 龍朔元年辛酉崩 壽五十九歲 葬於哀公寺東 有碑 王與庾信神謀戮力 一統三韓 有大功於社稷 故廟號太宗 太子法敏 角干仁問 角干文王 角干老且 角干智鏡 角干愷元等 皆文姬之所出也 當時買夢之徵 現於此矣 庶子曰 皆知文級干 車得令公 馬得阿干 幷女五人 王膳一日飯米三斗 雄雉九首 自庚申年滅百濟後 除晝饍 但朝暮而已 然計一日米六斗 酒六斗 雉十首 城中市價 布一疋租三十碩或五十碩 民謂之聖代 在東宮時 欲征高麗 因請兵入唐 唐帝賞其風彩 謂爲神聖之人 固留侍衛 力請乃還 時百濟<末>王義慈乃<武>王之元子也 雄猛有膽氣 事親以孝 友于兄弟 時號海東曾子 以貞觀十五年辛丑卽位 耽婬酒色 政荒國危 佐平[百濟爵名]成忠 極諫不聽 囚於獄中 瘦困濱死 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嘗觀時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審擇其地 處上流而迎敵 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炭峴[一云 沈峴 百濟要害之地] 水軍不使入伎伐浦[卽長岩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 據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 <顯>慶四年己未 百濟烏會寺[亦云 烏合寺] 有大赤馬 晝夜六時 遶寺行道 二月 衆狐入義慈宮中 一白狐坐佐平書案上 四月 太子宮雌雞與小雀交婚 五月 泗<沘>[扶餘江名]岸大魚出死 長三丈 人食之者皆死 九月 宮中槐樹鳴如人哭 夜鬼哭宮南路上
태종춘추공
제29 태종대왕의 이름은 춘추이고 성은 김씨이다. 용수[또는 용춘라고도 한다]각간 추봉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왕비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로, 곧 유신공의 막내 누이이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寶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흘러서 서울에 가득 찼다. 아침에 아우에게 꿈 이야기를 했는데 문희가 듣고 말하기를 “내가 그 꿈을 사겠습니다.”라고 했다. 언니가 말하기를 “무엇을 주겠느냐?”라고 하니, 문희가 말하기를 “비단치마면 되겠습니까?”라고 하여, 언니가 “좋다.”고 하였다. 동생이 옷깃을 벌려 받았는데, 언니가 말하기를 “어젯밤 꿈을 너에게 준다”라고 하니 동생은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후에 10일이 지나 유신이 춘추공과 더불어 정월 오기일(午忌日)[위의 사금갑(射琴匣)조에 보이는데, 최치원(崔致遠)의 설이다]에 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蹴鞠)을 하다가[신라 사람들이 말하는 축국은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이른다] 고의로 춘추의 옷을 밟아 옷끈을 떼어버리고 말하기를 “청컨대 우리 집에 들어가서 꿰맵시다”라고 하니 공이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에게 명하여 꿰매드리라고 하니, 아해가 말하기를 “어찌 작은 일로써 귀공자를 가벼이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사양하였다.[고본(古本)에는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아지(阿之)에게 명하였더니 공이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관계하였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하였다. 유신이 그의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어 말하길 “네가 부모님께 고하지 않고 임신을 했으니 어찌된 일이냐?”라고 하고, 이에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리고 누이를 태워 죽인다고 하였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것을 기다려, 뜰 가운데 땔감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연기가 일어났다.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가 아뢰기를 “아마도 유신이 그의 누이를 태우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그의 누이가 남편도 없이 임신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이 누구의 짓인가?”라고 하였는데, 마침 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안색이 크게 변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공이 한 일이니 가서 구하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이를 막고, 그 후 드러내어 혼례를 행했다. 진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永徽) 5년 갑인(654)에 왕위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 신유(661)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59세였다. 애공사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를 세웠다. 왕은 유신과 더불어 지모와 힘을 합해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사직(社稷)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고 하였다.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 인문(仁問), 각간 문왕(文王), 각간 노차(老且), 각간 지경(智鏡), 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의 소생이니, 당시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서 나타났다. 서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 거득(車得) 영공(令公) 마득(馬得) 아간과 딸을 합하여 모두 5명이다. 왕의 식사는 하루에 쌀 3말과 꿩 9마리였는데, 경신년(660) 백제를 멸망시킨 후로는 점심은 하지 않고 다만 조석만 들 뿐이었다. 그러나 하루를 계산해보면 쌀 6말, 술 6말, 꿩 10마리였다. 성 중 시장의 값은 베 한 필에 조(租) 30석 혹은 50석이었다.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했다. 동궁에 있을 때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청하러 당나라에 들어갔더니, 당나라 황제가 그 풍채를 보고 신성한 사람이라고 하고는, 굳이 머물러두고 시위(侍衛)하게 했으나, 힘써 청하여 이에 돌아왔다. 이때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義慈)는 무왕(武王)의 맏아들로서 용감하고 담력이 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정관(貞觀) 15년 신축(641)에 왕위에 오르자 주색에 빠져 정사가 문란해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좌평(佐平)[백제의 관작 이름] 성충(成忠)이 극력으로 간해도 듣지 않고 옥에 가두니, 몸이 여위고 지쳐 거의 죽게 되었다. 글을 써서 아뢰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원컨대 한 말씀 드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시세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전쟁이 있겠습니다. 무릇 군사를 씀에는 그 지세를 잘 가려야 할 것이니, 상류에 머물러 적을 맞이하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해처이다]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곧 장암(長嵓)이니 또는 손량(孫梁), 혹은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 한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막은 연후에 가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은 살피지 않았다. 현경(顯慶) 4년 기미(659)에 백제의 오회사(烏會寺)[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한다]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하루 종일 절을 돌아다녔다. 2월에는 여우떼가 의자의 궁중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하였고 5월에는 사비[부여의 강 이름] 언덕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3장이었으며 그 고기를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의 괴수(槐樹)가 울었는데 사람이 우는 것과 같았고,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 위에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