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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출변

기본정보

수로왕과 허황옥의 혼인과 관련된 설화에서 허황옥의 배가 진홍빛 깃발을 달고 들어왔던 바닷가

일반정보

기출변은 수로왕과 허황옥의 혼인과 관련된 설화에서 허황옥의 배가 진홍빛 깃발을 달고 들어왔던 바닷가를 말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는 건무(建武) 24년(48)에 수로왕과 야유타국에서 온 허황옥의 혼인담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허황옥은 배를 타고 별포(別浦)에 상륙하여 처음으로 수로왕이 보낸 구간(九干)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어서 허황옥은 이동하여 별포(別浦)의 나루터에서 배를 매어 두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친다. 수로왕은 임시 궁궐(幔殿)을 설치하고 왕후를 기다렸다가 허황옥을 맞이하여 혼인이 진행된다. 허황옥이 사망한 후한(後漢)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189)에 장사를 지내고, 왕후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하여, 처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며, 진홍빛 깃발을 달고 들어왔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즉, 허황옥이 가락국을 향해서 항해하여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이라고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기출변(旗出邊)은 용어의 의미 그대로 깃발이 출현한 해변이라는 말로써 김해만의 입구해 해당하는 지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경상도(慶尙道)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고적(古蹟)조에서 “망산도(望山島)[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7월에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왔다. … 나라 사람들은 처음 와서 배를 매어 놓았던 곳을 주포촌(主浦村), 비단 바지 벗던 곳을 능현(綾峴), 꼭두서니 빛 깃발이 들어온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하는데, 주포촌 왼쪽에 있으며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 있다.](望山島[東漢建武二十四年七月 許王后自阿踰阤國渡海而至 … 國人號初來維舟處曰主浦村 解綾袴處曰綾峴 茜旗入海處曰旗出邊 在主浦村之左 至今猶存其名])”고 하였다. 여기서는 기출변이 주포촌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주목된다.

이러한 점을 근거로 삼아서 주포를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와룡마을에 비정하고, 김해시 장유면의 동쪽 끝에 해당하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의 조만포 나루터 부근을 기출변으로 추정한 연구가 있다.(김태식, 1998)

참고문헌

김태식, 1998, 「駕洛國記 所載 許王后 說話의 性格」『韓國史硏究』102.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 屬建<武>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 九干等朝謁之次 獻言曰 大王降靈已來 好仇未得 請臣等所有處女絶好者 選入宮闈 俾爲伉儷 王曰 朕降于玆天命也 配朕而作后 亦天之命 卿等無慮 遂命留天干押輕舟 持駿馬 到望山島立待 申命神鬼干就乘岾[望山島 京南島嶼也 乘岾 輦下國也]忽自海之西南隅 掛緋帆 張茜旗 而指乎北 留天等先擧火於島上 則競渡下陸 爭奔而來 神鬼望之 走入闕 奏之 上聞欣欣 尋遣九干等 整蘭橈 揚桂楫 而迎之 旋欲陪入內 王后乃曰 我與(爾)等素昧平生 焉敢輕忽相隨而去 留天等返 達后之語 王然之 率有司動蹕 從闕下西南六十步許地 山邊設幔殿祗候 王后於山外別浦津頭 維舟登陸 憩於高嶠 解所著綾<袴>爲贄 遺于山靈也 其地侍從媵臣二員 名曰申輔趙匡 其妻二人 號慕貞慕良 或臧獲幷計二十餘口 所齎錦繡綾羅 衣裳疋段 金銀珠玉 瓊玖服玩器 不可勝記 王后漸近行在 上出迎之 同入帷宮 媵臣已下衆人 就階下而見之卽退 上命有司 引媵臣夫妻曰 人各以一房安置 已下臧獲各一房五六人安置 給之以蘭液蕙醑 寢之以文茵彩薦 至於衣服疋段寶貨之類 多以軍夫遴集而護之 於是 王與后共在御國寢 從容語王曰 妾是阿踰陁國公主也 姓許 名黃玉 年二八矣 在本國時 今年五月中 父王與皇后顧妾而語曰 爺孃一昨夢中 同見皇天上帝 謂曰 駕洛國元君首露者 天所降而俾御大寶 乃神乃聖 惟其人乎 且以新莅家邦 未定匹偶 卿等<須>遣公主而配之 言訖升天 形開之後 上帝之言 其猶在耳 爾於此而忽辭親 向彼乎往矣 妾也浮海遐尋於蒸棗 移天夐赴於蟠桃 螓首敢叨 龍顔是近 王答曰 朕生而頗聖 先知公主自遠而屆 下臣有納妃之請 不敢從焉 今也淑質自臻 眇躬多幸 遂以合歡 兩過淸宵 一經白晝 於是 遂還來船 篙工楫師共十有五人 各賜粮粳米十碩 布三十疋 令歸本國 八月一日 廻鑾 與后同輦 媵臣夫妻齊鏕竝駕 其漢肆雜物 <咸>使乘載 徐徐入闕 時銅壺欲午 王后爰處中宮 勑賜媵臣夫妻私屬空閑二室分入 餘外從者以賓舘一坐二十餘間 酌定人數 區別安置 日給豊羡 其所載珍物 藏於內庫 以爲王后四時之費 一日 上語臣下曰 九干等俱爲庶僚之長 其位與名皆是宵人野夫之號 頓非簪履職位之稱 儻化外傳聞 必有嗤笑之恥 遂改我刀爲我躬 汝刀爲汝諧 彼刀爲彼藏 五<刀>爲五常 留水留天之名 不動上字 改下字留功留德 (神天)改爲神道 五天改爲五能 神鬼之音不易 改訓爲臣貴 取雞林職儀 置角干阿叱干級干之秩 其下官僚 以周判漢儀而分定之 斯所以革古鼎新 設官分職之道歟 於是乎 理國齊家 愛民如子 其敎不肅而威 其政不嚴而理 況與王后而居也 比如天之有地 日之有月 陽之有陰 其功也塗山翼夏 唐<媛>興<姚> 頻年夢有得熊羆之兆 誕生太子居登公 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一日后崩 壽一百五十七 國人如嘆坤崩 葬於龜旨東北塢 遂欲(不)忘子愛下民之惠 因號初來下纜渡頭村曰主浦村 解綾<袴>高岡曰綾峴 茜旗行入海涯曰旗出邊 媵臣泉府卿申輔宗正監趙匡等 到國三十年後 各産二女焉 夫與婦踰一二年而皆<抛>信也 其餘臧獲之輩 自來七八年間 未有玆子生 唯抱懷土之悲 皆首丘而沒 所舍賓館 圓其無人 元君乃每歌鰥枕 悲嘆良多 隔二五歲 以獻帝<建>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 而殂落 壽一百五十八歲矣 國中之人 若亡天只 悲慟甚於后崩之日 遂於闕之艮方平地 造立殯宮 高一丈 周三百步 而葬之 號首陵王廟也 自嗣子居登王 洎九代孫仇衝之享是廟 <須>以每歲孟春三之日七之日 仲夏重五之日 仲秋初五之日十五之日 豊潔之奠 相繼不絶 …
가락국기[문종조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48) 7월 27일에 구간 들이 조알(朝謁)할 때에 아뢰어 말하기를,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래로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臣)들의 딸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뽑아 궁중에 드려 배필로 삼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다. 나의 배필로 왕후가 되는 것도 또한 하늘의 명령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輕舟)와 좋은 말(駿馬)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또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다. 승점(乘岾)은 수레 아래(輦下)의 나라(國)이다.]으로 가게 하였다. 홀연히 바다 서남쪽 모퉁이로 부터 붉은 돛을 달고 진홍빛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을 향하여 오고 있었다. 유천간(留天) 등이 먼저 섬에 불을 피우고, 곧 물을 건너 육지에 내려와 앞 다투어 달려왔다. 신귀간(神鬼)이 이것을 바라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말하였다. 왕이 듣고 기뻐하며, 이어 구간 등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노(蘭橈)와 계수나무로 만든 노(桂楫)를 갖추어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에) 왕후(王后)가 말하기를, “나와 너희들은 평생 알지 못한 터인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겠느냐.”고 하였다. 유천간(留天) 등이 돌아와 왕후의 말을 전하였다. 왕은 그렇다고 여겨 여러 관리들을 거느리고 궁궐 서남쪽 60보쯤 되는 산의 주변(山邊)에 가서 장막으로 된 임시 궁궐(幔殿)을 설치하고 왕후를 기다렸다. 왕후는 산 너머의 별포(別浦)의 나루터에서 배를 매어두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며,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그 나라로부터 시종(侍從)하여 온 신하(媵臣) 2명이 있었는데,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라고 하였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은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라 불렀다. 혹은 노비가 도합 20여명 이었고, 가지고 온 각종 비단(錦繡綾羅)과 의복(衣裳疋段), 금․은․주옥과 각종 구슬과 보배로운 기물을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왕후가 점차 왕이 있는 행재소(行在所)에 가까이 오자, 왕이 나아가 맞이하여 함께 장막으로 들어왔다. 따라온 신하와 그 아래 무리들은 계단 아래에서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은 관원(有司)에게 명하여, 따라온 신하 부부들을 인도하게 하며 말하기를, “사람마다 각방에 두고, 그 이하 노비는 한 방에 대여섯 명씩 안치시키며, 난초로 만든 마실 것(蘭液)과 혜초로 만든 술(蕙醑)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하며, 의복과 비단과 보물들까지 주고 많은 군인들을 내어 보호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때에 왕과 왕후가 침전에 들었는데, (왕후가) 왕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저는 본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許氏)고, 이름은 황옥(黃玉)이고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중에 부왕(父王)이 황후(皇后)와 더불어 말씀하기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제 밤 꿈에 똑같이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뵈었는데, (황천상제가) 가락국(駕洛國) 원군(元君) 수로(首露)는 하늘에서 내려 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성하다고 하는 것은 오직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리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잠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 귀에 맴돌았다. 너는 이제 곧 우리와 작별하고 그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다를 건너서 멀리 증조(蒸棗)를 찾아가기도 하고 방향을 바꾸어(移天) 아득히 반도(蟠桃)로도 가보았습니다. 이제 보잘것없는 얼굴로 외람되게 용안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짐은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신하들의 왕비를 맞이하라는 청을 듣지 않았다. 지금 현숙(賢淑)한 그대가 저절로 왔으니 이 몸에게는 다행한 일이오.”라고 하였다. 드디어 동침하여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내었다. 이에 드디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낼 때, 뱃사공(篙工楫師) 15인에게 각각 쌀 10섬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이) 수레를 돌릴 때(廻鑾), 왕후와 한 수레를 탔으며, 따르는 신하와 부부도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수레를 탔으며,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漢肆雜物)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때를 알리는 물시계(銅壺)가 오정을 가리키려고 했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게하고, 따라온 신하 부부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에게는 빈 집 두 채를 주어 나누어 들게 하였으며, 나머지 종자(從者)들은 이십여 칸 되는 빈관(賓舘) 한 채에 사람 수를 적당히 배정하여 안치하고, 매일 풍부한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들의 싣고 온 진귀한 물품들은 내고(內庫)에 두어 왕후가 사시(四時)로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구간들은 모두 일반 관료의 우두머리이지만,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 미천한 촌사람들(宵人野夫)의 이름이요 고귀한 직위를 가진 사람들의 칭호가 될 수 없으니, 만일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고 하였다. 마침내 아도(我刀)를 아궁(我躬)으로, 여도(汝刀)를 여해(汝諧)로, 피도(彼刀)를 피장(彼藏)으로, 오도(五刀)을 오상(五常)으로 고쳤다.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냥 두고 아래 글자만 고치어 유공(留功)과 유덕(留德)으로 하고, 신천(神天)은 신도(神道)로, 오천(五天)은 오능(五能)으로 고쳤다. 신귀(神鬼)는 음은 그대로 두고 그 훈을 고쳐 신귀(臣貴)라 하였다. 그리고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하여 각간(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의 등급을 두고 그 아래의 관료들은 주(周)와 한(漢)의 제도로 나누어 정하였으니, 이것이 옛 것을 고쳐 새것을 세우고(革古鼎新)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도리이다. 이로부터 나라와 집안이 질서가 있게 되고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니, 그 교화는 엄숙치 아니하여도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아니하여도 잘 다스려졌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살게 되었으니 마치 하늘이 땅을, 해가 달을, 양이 음을 가진 것과 같았으니, 그 공은 도산씨(塗山氏)가 하(夏)를 돕고 도당씨의 딸들(唐媛)이 요(姚)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해마다 용맹한 아들을 나을 길조의 꿈이 있어,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189) 3월 1일에 왕후가 돌아가니, 나이가 157세였다. 국인(國人)은 마치 땅이 무너진 것과 같이 통탄하면서 구지(龜旨)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왕후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하여, 처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며, 진홍빛 깃발을 달고 들어왔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하였다. 함께 왔던 신하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가락국(駕洛國)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딸 둘씩을 낳았으며, 부부가 모두 일이 년을 지나 세상을 떠났다. 그 나머지 노비들은 온 지 칠팔년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다만 고향(故土)을 그리는 슬픔을 안고서 모두 고향 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죽었다. 그들이 살던 빈관(賓舘)은 한 사람도 없이 텅 비었다. 왕은 늘 외로운 베게에 의지하여 비탄에 잠겨 있다가, 10년(二五歲)후인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23일에 돌아가니, 나이가 158세였다. 나라의 사람들이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 슬퍼하였으니, 그 비통함은 왕후가 돌아가던 날보다 더하였다. 드디어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1장, 둘레가 3백보였는데, 이로서 장사지냈으며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불렀다. 왕위를 물려받은 거등왕(居登王)부터 9대손(九代孫) 구충(仇衝)에 이르기까지 제향을 이 사당에서 행하고, 모름지기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풍성하고 정결한 제사음식을 올렸는데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