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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암

기본정보

경주 남산에 있는 바위

일반정보

신라에서 신성시하였던 경주 남산에 있는 바위로, 이곳에서 신라의 대신(大臣)들이 모여 귀족회의를 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에 등장하고 있는 우지암 회의는 선덕․진덕 두 여왕의 정체성을 설명할 때 매우 중요시되는 자료이다. 그것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즉위문제가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반란”과 “상대등 비담의 반란”과 연결되어 있고, 중고기가 새로운 체제로 변화되는 중요한 시기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 6인의 대신회의는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정용숙, 1994)

우지암 회의 기사는 중고기 화백회의의 성격을 밝히는 주요한 자료로도 이용되어 왔다. 여기에 참여한 6명은 진덕왕대(647-654) 화백회의의 구성원으로, 진덕왕 1년에 상대등이 된 알천공을 중심으로 대등(大等)의 후신인 대신(大臣)들이 본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리고 알천이 상대등의 자격으로 이 회의를 주재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이에 근거하여 화백회의 의장은 상대등이라는 등식이 통설화되었다.(이기백, 1974)

우지암 회의의 성격에 대해서는 진덕왕이 죽은 뒤에 알천을 추대하기 위한 회의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1977)

이에 대하여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무림공(茂林公)․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 등 당대 최고 대신(大臣)들의 이력을 분석하여 우지암회의는 진덕왕때가 아니라 자장이 출가하기 전인 선덕여왕 초년의 기사였다고 보기도 한다. 곧, 이 기사는 진덕왕이 즉위하여 당 태종에게 올린 태평가에 뒤이어 기록되고 있어 그 내용의 일관성을 찾기가 힘들며, 그 중심 소재가 알천공의 완력을 드러내는데 역점을 두고 있는 듯 하면서도 유신공의 위엄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김유신이 김춘추와 함께 권력을 잡은 이후에 윤색된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우지암 회의에서 결정코자 한 국사(國事)를 선덕왕의 즉위와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곧, 선덕왕은 국인(國人)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는데, 진평왕이 죽었을 때 당은 그를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봉하면서도 선덕왕을 곧바로 책봉하지 않고, 즉위 4년만에야 당나라로부터 책봉된 사실은 선덕왕의 실제 재위 시기가 『삼국사기』 기년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회의 관계기사 중 국왕이 참석하지 않은 회의는 국왕 추대의 경우에 한정된다고 한다.(박남수, 1992)

진평왕대 이후의 귀족회의는 앞 시기의 대등회의(大等會議)와는 성격이 다르며, 여러 관부의 장관이 주로 참석하는 군신회의(群臣會議)로서의 성격이 강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곧, 군신회의는 국가적인 중대사(重大事)가 있을 경우 중앙 관부의 장관이나 고위 관료가 모여 논의하는 회의였으며, 중고(中古) 말엽에는 “대신회의(大臣會議)”란 회의체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군신회의 구성원이 더욱 축소된 형태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에 나타나는 우지암회의는 “대신회의(大臣會議)”라는 회의체를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는 모습이라고 한다.(주보돈, 1994)

한편, 국왕이 주재한 회의를 남당회의로, 국왕이 참석하지 않으면서 집정자가 주재하고 신료들이 합좌하여 국사(國事)를 의논하던 회의를 정사당회의로 나누면서,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의 우지암회의를 정사당회의의 운영과 관련하여 살펴본 견해가 있다. 이 우지암회의에서는 당시 관직이 상대등(上大等)이었던 알천이 수석(首席)에 앉았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중고기에 상대등은 정사당회의를 주재하면서 국사를 총괄하였으며, 그 회의의 주요 구성원은 대등(大等)이라고 한다. 『수서(隋書)』 신라전에서는 “국가에 큰 일이 생기면, 여러 관리들이 모여 자세히 논의한 다음에 결정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로 보아 당시에 중요한 국사(國事)는 정사당회의에서 주로 논의되었고, 그 의결사항을 상대등이 왕에게 상주(上奏)하여 재가를 받아 실행에 옮기는 국정운영방식이 관행화되었다고 한다.(전덕재, 2004)

우지암(于知巖)의 위치에 대해서는, “남산(南山) 우지암(于知巖)”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경주 남산에 있는 바위로 추정된다. 이에 도당산(都堂山) 남쪽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윤경열, 1979) 왕정곡(王井谷)의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도당산(都堂山)은 남산 정상에서 북으로 뻗어내린 마지막 끝에 솟아 있는 세 봉우리의 작은 산으로서 반월성에서 가장 가까운 남산의 일부이다. 전인용사지(傳仁容寺址)와 도당산(都堂山) 사이의 계곡을 왕정곡(王井谷)이라 한 연유도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김동윤, 1990)

한편, 우지암(于知巖)의 위치를 경주 남산 삼릉계(三陵溪)의 속칭 기암(碁岩)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곳은 남산에서 서라벌 전체를 조망하기에 매우 좋은 곳으로, 상선암(上仙巖) 마애불의 북봉에 해당된다고 한다.(강인구 외, 2002)

참고문헌

이기백,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노태돈, 1977, 「삼국의 정치구조와 사회․경제」 『한국사』 2, 국사편찬위원회.
윤경열, 1979, 『慶州 南山 古蹟巡禮』, 경주시.
김동윤, 1990, 「新羅 中代 阿彌陀信仰과 慶州南山」 『考古歷史學志』 5․6合.
박남수, 1992, 「新羅 和白會議의 機能과 性格」『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上, 탐구당.
주보돈, 1994, 「毗曇의 亂과 善德王代의 政治運營」『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 上, 일조각.
정용숙, 1994, 「新羅 善德王代의 정국동향과 毗曇의 亂」『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上, 일조각.
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2002, 『(譯註)三國遺事』Ⅰ, 이회문화사.
전덕재, 2004, 「新羅 和白會議의 성격과 그 변화」『歷史學報』182.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
眞德王
第二十八眞德女王 卽位自製太平歌 織錦爲紋 命使往唐獻之[一本 命春秋公爲使 往仍請兵 太宗嘉之 許蘇<定>方云云者 皆謬矣 <顯>慶前春秋已登位 <顯>慶庚申非太宗 乃高宗之世 定方之來在<顯>慶庚申 故知織錦爲紋 非請兵時也 在眞德之世 當矣 盖請放金欽純之時也] 唐帝嘉賞之 改封爲雞林國王 其詞曰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威定 修文契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軍邁虞唐 幡旗何赫赫 錚鼓何鍠鍠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疑幽現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方方 維嶽降輔宰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王之代有閼川公林宗公述宗公<武>林公[慈藏之父]廉長公庾信公 會于南山于知巖議國事 時有大虎走入座間 諸公驚起 而閼川公略不移動 談笑自若 捉虎尾 撲於地而殺之 閼川公膂力如此 處於席首 然諸公皆服庾信之威 新羅有四靈地 將議大事 則大臣必會其地謀之 則其事必成 一<曰東>靑松山 二曰南于知山 三曰西皮田 四曰北金剛山 是王代 始行正旦禮 始行侍郞號
진덕왕(眞德王)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하여 스스로 태평가를 짓고,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 당나라에 바쳤다.[어떤 책에 “춘추공을 사신으로 삼아, 가서 군사를 청하니 태종이 그것을 기뻐하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한 것은 모두 잘못이다. 현경(顯慶) 전에 춘추는 이미 왕위에 올랐고, 현경 경신년(660)은 태종이 아니라 고종 때이며, 소정방이 온 것은 현경 경신년이다. 그러므로 비단을 짜서 무늬를 수놓아 보낸 것은 청병 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진덕왕의 재위 때인 것이 마땅하니, 대개 김흠순을 놓아 돌려보내기를 청하던 때였다.] 당나라 황제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계림국왕(雞林國王)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 가사는 이렇다. “대당(大唐)이 왕업을 개창하니, 어마어마한 황제의 계책이 창성하도다. 전쟁이 그치니 군사(戎衣)는 안정되고, 문치를 닦으니 모든 왕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통령하매 고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체모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은 해와 달과 같아, 운수를 다스림이 우당(虞唐)보다 앞서네. 번(幡)과 기(旗)는 어찌 그리 빛나며, 징소리와 북소리는 어찌 그리 웅장한가.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을 어긴 자는, 뒤집히고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한 풍속이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가 옥촉(玉燭)과 같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비치네. 산악의 정기는 재상을 내려, 황제는 충량(忠良)한 이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나라 황제를 밝게 빛내리.” 왕의 시대에 알천공․임종공․술종공․무림공(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유신공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산 우지암에 모여서 국사(國事)를 의논했다. 이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좌중에 뛰어들어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를 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수석(首席)에 앉았으나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런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대신들이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의논하면 그 일이 꼭 이루어졌다.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 셋째는 서쪽의 피전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다. 이 왕 때 비로소 설날 아침의 조례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란 칭호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