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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옥대

기본정보

신라 삼보(三寶) 중 하나로, 천사(天使)가 궁중에 내려와 신라 진평왕(眞平王)에게 주었다는 옥대(玉帶)

일반정보

천사옥대(天賜玉帶)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원년(579)에 천사(天使)가 궁중에 내려와 왕에게 주었다는 옥대(玉帶)로,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과 함께 신라 3보로 일컬어진다. 하늘로부터 왕의 권위를 인정받는 왕권의 상징으로 보여진다.

전문정보

천사옥대(天賜玉帶)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원년(579)에 천사(天使)가 궁중에 내려와 왕에게 주었다는 옥대(玉帶)로,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과 함께 신라 3보로 일컬어진다. 『고려사』 권2 세가 태조 20년(938)조에 의하면 “성제대(聖帝帶)”,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 5년(921)에 의하면 “성대(聖帶)”, “보대(寶帶)”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조에는 “(진평왕이) 즉위한 원년(579)에 천사(天使)가 궁전의 뜰에 내려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상황(上皇)께서 나에게 옥대를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친히 꿇어 앉아서 받으니 그 후에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큰 제사 때에는 모두 이 띠를 사용하였다.”라는 설화가 전한다. 『동경잡기(東京雜記)』 권2 고적 옥대조에도 천사옥대조와 같이 유사한 기록이 전해지며『삼국유사』에서 “상황(上皇)”, “천사(天使)”라고 표현된 것이 “상제(上帝)”, “신인(神人)”이라고 기록된 것 이외에는 차이가 없다.

천사옥대는 다른 신라 3보인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과 성격이 약간 다르다. 천사옥대 설화의 배경이 되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대는 법흥왕(法興王)과 진흥왕(眞興王) 대에 행해졌던 왕권강화에 힘입어 중고기의 왕권강화가 거의 마무리되던 단계로 신라 왕실은 왕의 권위를 가시적(可視的)으로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당시는 이미 신라 초기와 같은 대형고분이 권위의 상징물로서 가지고 있던 가치가 현격히 감소되어 사회 전반적으로 새로운 상징체계를 찾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천사옥대는 국가적 규모에서 체계적인 신분질서를 위해 복식(服飾), 과대(銙帶)가 사용되면서 만들어진 설화로 보기도 한다.(홍보식, 1996)

기록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천사옥대를 전해준 “상황(上皇)”, “상제(上帝)”를 제석(帝釋)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신라 중고기에 진평왕의 국정(國政)에 대한 자신감이 표출된 것은 바로 제석신앙(帝釋信仰)의 수용이었다. 진평왕이 성골(聖骨) 관념을 바탕으로 다른 왕족들과 차별을 두게 되면서, 이전부터 공유하였던 천(天)으로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천(天)의 관념으로 제석을 등장시키게 되었으며, 우리 고유의 천신(天神)이 불교 수용 후 제석천(帝釋天)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제석(帝釋)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욕계(欲界)로 일컬어지는 세계의 두 번째 천으로 지거천(地居天)의 수미산(須彌山)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여 도리천(忉利天)을 다스린다. 제석이 거느리는 도리천은 욕계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지상의 맨꼭대기인 수미산 봉우리에 있는 천상의 장엄세계로 연결되어 관념적으로 다른 제천(諸天)들보다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쉬운 신이었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권속들을 이끌고 불법을 수호하는 제석의 관념은 석가모니 왕실을 그대로 재현한 신라 왕실에서 차용되었다. 그러므로 신라 왕실은 제석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진평왕 자신도 제석의 호위를 받는 부처와 같은 존재로 군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안지원, 1997) 따라서 진평왕은 제석으로부터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받으면서 수호되고 있으며, 또한 나라의 제사에 옥대를 착용함으로써 절대권을 과시하려한데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이정숙, 1999)

그러나 전통적인 천(天) 관념은 불교가 수용된 이후에도 왕의 권위와 위엄을 뒷받침해주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천사옥대 설화는 왕의 권위가 직접적으로 “천(天)”에 의해 보증받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이같은 견해에서는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조에서 진평왕이 옥대를 착용하고 나아갔다는 국가의 제사인 “교묘대사(郊廟大祀)”를 “교묘와 같은 큰 제사”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교묘”는 곧 신궁(神宮)이며 진평왕이 신궁에서 제사지낼 때 천사옥대를 착용함으로써 성골 왕의 위엄과 권위, 신성성이 강조되었으며, 곧 진평왕대 이후 신궁제사는 성골 왕만이 지낼 수 있는 제사로 여겨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채미하, 2008)

이러한 옥대의 실재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진덕왕(眞德王) 2년(648)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文武王) 4년(664)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聖德王) 29년(720)조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고대 중국의 황제가 신라의 지배계층에게 의대(衣帶)를 하사한 여러 사례를 보아 이는 수(隋) 황제가 하사한 옥대로 보기도 한다.(전창범, 2000)

또한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조에서 서술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옥대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20년(937)조에도 보이는 내용인데, 이에 의하면 대대로 전해져 경주의 남고(南庫)에 보관되어 있다가 고려 태조 20년(937) 김부(金傅)에 의하여 왕건에게 바쳐졌는데, 그 형태는 금을 새겨서 옥을 박아 만든 네모난 판형 62과(銙)를 연결한 요대(腰帶)로 길이가 10위(圍)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종류의 금은제(金銀製) 과대(銙帶)는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다수 출토되었으며, 설화에서와 같이 진평왕의 키가 평균보다 월등히 컸으므로 10위(圍) 즉 150cm 가량 되는(이우태, 1984) 과대는 성장한 후에 제례복(祭禮服)으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안지원, 1997)

참고문헌

이우태, 1984, 「한국 고대의 尺度」『泰東古典硏究』 1.
홍보식, 1996, 「古墳文化를 통해 본 6-7세기대의 사회변화 -嶺南地域을 중심으로-」『韓國古代史論叢』7.
안지원, 1997, 「신라 眞平王代 帝釋信仰과 왕권」『歷史敎育』63.
이정숙, 1999, 「眞平王代 王權强化와 帝釋信仰」『新羅文化』16.
전창범, 2000, 「眞平王 天賜玉帶의 再考察」『東岳美術史學』1.
채미하, 2008,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혜안.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
天賜玉帶[淸泰四年丁酉五月 正承金傅獻鐫金粧玉排方腰帶一條 長十圍 鐫銙六十二 <曰>是眞平王天賜帶也 太祖受之 藏之內庫]
第二十六白淨王 諡眞平大王 金氏 大建十一年己亥八月卽位 身長十一尺 駕幸內帝釋宮[亦名天柱寺 王之所創] 踏石梯 二石幷折 王謂左右曰 不動此石 以示後來 卽城中五不動石之一也 卽位元年 有天使降於殿庭 謂王曰 上皇命我傳賜玉帶 王親奉跪受 然後其使上天 凡郊廟大祀皆服之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 何謂也 皇龍寺丈六尊像一 其寺九層塔二 眞平王天賜玉帶三也 乃止其謀 讚曰 雲外天頒玉帶圍 辟雍龍袞雅相宜 吾君自此身彌重 准擬明朝鐵作墀
하늘이 내려준 옥대[청태 4년 정유(937) 5월에 정승 김부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치니, 길이가 10위요, 새겨 넣은 장식이 62개였다. 이것을 진평왕(眞平王)이 하늘에서 받은 띠라한다. 고려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서 내고(內庫)에 두었다.]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는 진평대왕(眞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다. 대건 11년 기해(579) 8월 왕위에 올랐는데 키가 11척이었다. 내제석궁에 행차하여[또한 천주사라고도 하는데 왕이 창건하였다.] 돌계단을 밟으니 돌 2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 돌을 옮기지 말고 뒷사람들에게 보여라”고 하였으니, 성 안에 있는 움직이지 못하는 다섯 개의 돌 중 하나이다. 즉위 원년에 천사(天使)가 궁전의 뜰에 내려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상황(上皇)께서 나에게 명하여 옥대(玉帶)를 전해주라 하였습니다.”하니 왕은 친히 꿇어앉아서 받았다. 그 후에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무릇 큰 제사 때에는 모두 이 옥대를 착용하였다. 그 후에 고구려왕이 장차 신라를 치려고 계획하면서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할 수 없다하니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라고 하니,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첫째요, 그 절의 9층탑이 둘째요,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셋째입니다.”하고 이에 왕은 그 계획을 중지하였다. 찬하여 말하였다. 구름 위의 하늘이 옥대를 내리니, 임금의 곤룡포에 알맞게 둘렀구나, 우리 임금 이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엔 쇠로써 섬돌을 만들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