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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가

기본정보

노례왕(유리이사금) 대(代)에 지어진 노래

일반정보

노례왕(유리이사금) 대(代)에 지어진 노래로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전문정보

도솔가(兜率歌)는 노례왕(유리이사금)대에 처음 지어진 노래로서, 『삼국유사』 권1 기이1 노례왕(弩禮王)조에 “육부(六部)의 이름을 개정하고 또 육성(六姓)을 사(賜)하고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는데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改定六部號 仍賜六姓 始作兜率歌 有嗟辭 詞腦格)”라 전하며,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5년(28)조에 “이 해 민속(民俗)이 즐겁고 편안하여 비로소 왕이 도솔가(兜率家)를 지으니, 이는 가락(歌樂)의 시초였다.(是年 民俗歡康 始製兜率歌 此歌樂之始也)”라고 전하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5 감통7 월명사 도솔가조에 유례왕대의 도솔가와 같은 이름의 향가(鄕歌)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도솔의 의미에 대해서 노례왕대의 도솔가와 관련하여 논의가 이루어졌다. 먼저 도솔이 “돗”, “도리”의 음차자(音借字)이므로 도솔가는 “돗놀애”, “텃놀애”, “국가”가 아니면 “두리놀애”, “도리놀애”에 해당한다고 한 견해가 있다.(양주동, 1983) 또한 도솔이 둥글다는 말에서 나왔으며, 여러 사람이 회합한 상태 내지 원만하다는 의미로 군중적 회합 및 그 행사를 가리킨다고 본 견해가 있고,(홍기문, 1956) 노례왕시대는 불교윤입(佛敎輪入) 이전에 속하므로 도솔가는 토속음악으로서, “도솔푸리” 또는 “도살푸리”라 한 견해가 있다.(이혜구, 1957) 그리고 도솔가가 일본의 우방악무(右方樂舞) “도리소(鳥蘇)”와 동일한 신사무악(神事舞樂)으로 본 견해도 있다.(이두현, 1966)

『삼국유사』 권1 기이1 노례왕조에 의하면 이때에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라 건국 이전에 이미 노래가 있었으면서도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도솔가라는 장르의 노래를 처음 지은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 또한 처음 지었다는 말로 볼 때 도솔가는 그 이후 또 있는 것이므로, 한 사람이 지은 창작가요가 아니라 보통명사의 가악양식으로 보았다. 또한 노례왕대의 도솔가가 보통명사라면 월명사의 도솔가는 향가의 하위 장르의 고유명사라 하였다.(이도흠,1988)

그렇다면 도솔가의 성격은 어떠하였을까. 먼저 월명사의 도솔가는 이일병현(二日並現)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이를 물리치고자 제의적 성격으로 불리어졌다. 이러한 도솔가가 전제왕권강화의 통치이념으로 화엄사상을 수용한 경덕왕이 월명을 통해 재래신앙, 혹은 미륵신앙을 포용한 화엄만나다라를 지향하고 있는 노래라고 본 견해가 있다. 이일병현이라는 자연현상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아, 도솔가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루려했다는 것이다.(이도흠, 1988) 한편, 노례왕대 도솔가에 대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진 의례에서 불린 노래이며, 그 의례가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목적에서 행해진 것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월명사의 도솔가를 왕의 주재 하에 행해진 집단적 제의에서 불린 구지가와 가까운 형태의 주사(呪詞)로 보고 있기 때문에,(김열규 외, 1972) 노례왕대 도솔가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성격은 월명사의 도솔가와도 일치한다고 한다.(최선경, 2001)

도솔가의 내용에 관한 논의는 월명사의 도솔가 찬술 시대를 배경으로 논의되었다. 이 당시는 경덕왕이 즉위하고 있던 때로, 반란이 발생하는 등의 혼란이 있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이유로 월명사의 도솔가 창작배경 중 이일병현(二日並現)이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여 왕권에 도전하는 자의 출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양희철, 1997; 이도흠, 1988) 이와 달리 경덕왕대에 천재지변이 지속적으로 있었으므로 이일병현 역시 자연현상의 하나로 풀이한 견해가 있다.(신재홍, 2004) 또한 이러한 자연재앙을 혼돈과 무질서 상태로 돌아가 천지창조를 되풀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이해한 견해도 있다. 천지창조를 되풀이하는 것은 다시 세상을 정화, 갱신하고 새롭게 출발시키고자 함에서라고 한다.(최선경, 2001) 이 같은 해석의 차이로 도솔가를 전제왕권 강화에 힘쓴 경덕왕이 사회통합을 통한 안정을 얻어내기 위해 수용한 화엄사상을 전파하고자 한 데서 파생된 노래라는 견해가 있으며(이도흠, 1988), 이와 달리 천제의 이변에 대해 월명사를 택해 의식을 거행토록 하였을 때 불린 노래라는 견해가 있다. 이변으로 인해 나타날지도 모르는 재액을 미리 방지하여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잘 끌어가기 위해 미륵신앙과 합치시켜 재난 극복의지를 표현한 노래라는 것이다.(신재홍, 2004)

참고문헌

홍기문, 1956, 『향가해석』, 사회과학원.
이혜구, 1957, 『韓國音樂硏究』, 경향신문사.
이두현, 1966, 「新羅古樂再攷」『新羅伽倻文化』1.
김열규․정연찬․이재선, 1972, 『鄕歌의 語文學的 硏究』,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양주동, 1983, 『新訂 古歌硏究』, 일조각.
이도흠, 1988, 「도솔가와 화엄사상」『韓國學論集』14.
최선경, 2001, 「<兜率歌>의 祭儀的 性格」『淵民學志』9.
신재홍, 2004, 「향가에 나타난 정치의 이념과 현실」『古典文學硏究』26.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3노례왕)
第三弩禮王
朴弩禮尼叱今[一作 儒禮王] 初王與妹夫脫解讓位 脫解云 凡有德者多齒 宜以齒理試之 乃咬餅驗之 王齒多 故先立 因名尼叱今 尼叱今之稱 自此王始 劉聖公更始元年癸未卽位[年表云 甲申卽位] 改定六部號 仍賜六姓 始作兜率歌 有嗟辭詞腦格 始<犁>黎耜及藏氷庫 作車乘 建<武>十八年 伐伊西國滅之 是年 高麗兵來侵
제3 노례왕
박노례이질금[또는 유례왕이라고도 한다.]이 처음에 매부인 탈해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탈해가 말했다. “무릇 덕이 있는 사람은 이(齒)가 많으니 마땅히 이빨의 금으로 시험을 하여 봅시다.” 이에 떡을 물어 시험을 하여 보니 왕이 이가 많았으므로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이질금이라고 하니 이질금이란 칭호는 이 왕 때부터이다. 유성공(劉聖公) 경시(更始) 원년 계미(癸未)(23년)에 즉위하여[연표에는 갑신에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여섯 성(姓)을 내렸으며, 비로소 도솔가를 지었는데 차사와 사뇌격이 있었다. 비로소 보습과 얼음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무 18년(42년)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하였는데 이 해에 고구려 군사가 와서 침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