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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야

기본정보

가야의 다섯 나라를 합쳐서 부르는 용어

일반정보

가야의 다섯 나라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오가야조에서는 오가야를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를 언급하였으나 『본조사략』을 인용하여 오가야의 이름이 금관, 고령, 비화, 아라, 성산으로 서로 다르게 전한다고 하였다

전문정보

가야의 다섯 나라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오가야조에서는 오가야를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를 언급하였으나 『본조사략』을 인용하여 오가야의 이름이 금관, 고령, 비화, 아라, 성산으로 서로 다르게 전한다고 하였다. 또한 오가야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육가야라는 것을 「가락기」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오가야조와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서 전하는 금관가야를 포함한 육가야연맹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보았다. 『삼국유사』의 오가야와 『본조사략』의 오가야가 다른 것은 각기 의거한 기록이 달랐기 때문이며 모두 각각의 맹주국을 제외하고 기록하였기 때문에 오가야의 이름만 열거되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서 기재한 오가야는 전기 금관가야 맹주시대의 오가야이며, 『본조사략』에서 기재한 오가야는 후기 대가야 맹주시대의 오가야라는 것이다.(이병도, 1976)

한편 『삼국유사』 권1 기이1 오가야조와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서 전하는 가야의 시조설화를 분석하여 육가야연맹의 실체를 부정한 연구가 있다. 곧 육가야연맹은 신라말 고려초의 지방호족들이 대두하는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가야시대 이래의 전승이 반영된 관념일 뿐이라고 한다.(김태식, 1993) 그리고 대개 가야제국(加耶諸國)은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한조 변한의 12국이 발전하면서 성립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가야사에서 가야제국과의 상호관계를 연맹이라 규정하고 역사상 발전단계를 설정하는 연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전기가야연맹과 5세기 이후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가야연맹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금관가야는 기원후 2세기 경 국가로서 성립하게 되는데, 3세기 낙랑에서 왜로 가는 배가 금관가야를 거쳐감을 볼 때 입지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처음 연맹이 결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4세기 이후 낙랑군이 멸망하면서 한방도내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고구려․백제와의 패권다툼에서 백제가 대패하고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이 신라를 도와 낙동강 하류지역까지 내려와 가야를 토벌함으로써 김해해안지방의 세력들은 연맹의 핵을 잃고 쇠잔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5세기 후반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규모나 출토량을 볼 때 5세기 이후에는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가야연맹이 성립했다고 하였다.(김태식, 1993)

반면 육가야 연맹을 부정하기도 한다. 전기가야연맹의 중심국인 김해의 금관가야가 국제 교역을 독점했다고 보는 기존견해가 있지만,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변진의) 나라에서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라고 하여 철의 공급이 김해의 금관가야와 같은 일정 소국에게 독점되어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지』 왜인전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낙랑과 대방군에서 교역선들이 해안선을 따라 연안항해를 하였다고(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하였으므로 경남 해안일대의 소국(小國)들은 지리적으로 외부 세력과의 접촉이 용이한 개방상태에 놓여 있는 셈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소국들은 그 자체가 개별적인 관문 지역사회(Gateway Community)로 기능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이현혜, 1988)

이와 다르게 가야제국의 연맹체를 인정하면서도 단일연맹체의 “대연맹”에 대응하여 가야제국의 “지역연맹” 혹은 “소연맹”을 상정하는 의견도 있다. 가야에서는 통일된 정치․문화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즉 “연맹”의 속성은 인정하면서도 가야라는 지역에 여러 권역별로 발달한 정치․문화상의 국지적․분기적 특성에 주목하여 가락국․가라국․안라국 등 3-4개의 다수 정치체가 가야지역권에 독자적인 “지역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백승충, 1995)

참고문헌

이현혜, 1988, 「4세기 加耶社會의 交易體系의 변천」『韓國古代史硏究』1.
김태식, 1993, 『加耶聯盟史』, 일조각.
백승충, 1995, 「弁韓의 成立과 發展 -弁辰狗邪國의 성격과 관련하여-」『三韓의 社會와 文化』, 신서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오가야)
五伽耶[按駕洛記贊云 垂一紫纓 下六圓卵 五歸各邑 一在玆城 則一爲首露王 餘五各爲五伽耶之主 金官不入五數當矣 而本朝史略 並數金官 而濫記昌寧 誤]
阿羅[一作耶]伽耶[今咸安] 古寧伽耶[<今>咸寧] 大伽耶[今高靈] 星山伽耶[今京山 (一)云碧珍] 小伽耶[今固城] 又本朝史略云 太祖天福五年庚子 改五伽耶名 一金官[爲金海府] 二古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寧 恐高靈之訛] 餘二阿羅星山[同前 星山或作碧珍伽耶]
오가야(五伽耶)[가락기찬(駕洛記贊)을 살펴보면, 한 개의 자색 끈이 내려와 6개의 둥근 알을 주었는데, 그 중 다섯은 각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다고 한다. 곧 하나는 수로왕(首露王)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오가야(五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하니 금관(金官)이 다섯에 들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까지 아울러 헤아리고 또 창녕(昌寧)을 추가로 기록하였으니 잘못이다.]
아라(阿羅)[야(耶)라고도 한다]가야(伽耶)[지금 함안(咸安)], 고령가야(古寧伽耶)[지금 함녕(咸寧)], 대가야(大伽耶)[지금 고령(高靈)], 성산가야(星山伽耶)[지금 경산(京山)이니, 혹은 벽진(碧珍)이라고도 함], 소가야(小伽耶)[지금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 이르길, 태조(太祖) 천복(天福) 5年(940) 경자에 오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첫째는 금관[김해부(金海府)가 되었다], 둘째는 고령[가리현(加利縣)이 되었다], 셋째는 비화(非火)[지금 창녕(昌寧)이니 아마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하다],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라 하였다[위와 같다. 성산은 혹은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