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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

기본정보

가야제국 중 하나로 현재 경상남도 함안지역에 위치했던 나라

일반정보

가야제국 중 하나로 현재의 경상남도 함안지역에 위치했던 나라로, 아시량국, 아나가야, 안야국, 안라로도 불린다. 대체로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부터 6세기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문정보

현재 경상남도 함안지역에 위치했던 나라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오가야조에서는 가야의 다섯 나라 중 하나로 아라가야를 들고 있으며 그 주에 그 지역이 함안이라고 기록하였다. 아라가야는 『삼국사기』지리지 강주 함안군조에 “아시량국” 혹은 “아나가야”라 하였고,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한조에서는 “안야”, 「광개토왕릉비」에는 “안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기록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한조에서 언급된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이다. 『삼국지』에서는 변진에 12국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12국 중 하나로 변진안야국을 기록하였다.

안야국이 위치했던 함안지역에는 각지의 지석묘 분포도를 보아 늦어도 기원전 4세기 이전부터 토착민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안야국의 정확한 성립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고조선의 정권 교체시 일어난 준왕과 측근들의 남하와 위만조선에서 한나라와 전쟁시 의견대립으로 인한 조선상 역계경 무리의 남하가 이미 기원전 2세기 한반도 남부사회에 정치적․문화적으로 변화를 일으켰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철기제작기술이 빠르게 확산되어 “국(國)”의 형성이 촉진되었으므로 변진안야국의 성립을 토광묘 성립의 상한시기와 연결시켜 기원전 1세기로 추정하였다.(권주현, 1993)

이와 비슷하게 고고학적 측면에서 토광목관묘와 와질토기(瓦質土器)의 출현을 근거로 안야국의 형성시기를 추측하기도 한다. 창원문화재연구소는 제1차년도 발굴조사를 통해 함안의 도항리 고분군 북단에 위치한 목관묘 11기에서 흑색조합 우각형파수부장경호를 비롯하여 주머니호, 흑색양이부옹 등의 와질토기를 주로 발견하였다. 이 중 조합우각형파수부호와 주머니호는 와질토기 중 전기(기원전 1세기 후반-기원후 2세기 전반, 목관묘 단계)에 속하므로 함안 도항리 고분군의 조성시기는 늦어도 기원후 1세기대로 추정하며, 안야국의 형성시기도 이때로 유추하는 것이다.(남재우, 2003)

안야국이 변진의 제국 중 유력한 국이었다는 것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 보이는 신지의 가부호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그 기사를 보면 “신지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이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신운신국・안야국・신분고국・구야국과 관련된 칭호를 나열해 놓은 것으로 해석하는데 이 중 안야국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중국 군현과 교섭하고 있던 변한의 유력한 정치집단으로 추정하는 것이다.(남재우, 2003)

아라가야의 멸망 시기는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강중 함안군조에서 “함안군(咸安郡) 은 법흥왕이 많은 군사로 아시량국(阿尸良國)[또는 아나가야(阿那加耶)라고도 하였다]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咸安郡 法興王以大兵 滅阿尸良國[一云阿那加耶] 以其地爲郡)”라고 하여 법흥왕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안라국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보면 540년대 가야제국(加耶諸國) 중 가장 뚜렷한 외교적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법흥왕 연간에 멸망했다는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연구자에 따라 아라가야의 멸망 시기를 관산성전투와 완산주 설치시기인 554-555년으로 보는 설(백승충, 1995)과 『일본서기』 흠명기 23년조 세주에 흠명 21년(560) 임나가 멸망하였다는 기사에 근거해 560년으로 보는 설이 있다.(김태식, 1994)

참고문헌

권주현, 1993, 「阿羅加耶의 成立과 發展」『啓明史學』4.
김태식, 1994, 「咸安 安羅國의 成長과 變遷」『韓國史硏究』86.
백승충, 1995, 「弁韓의 成立과 發展 -弁辰狗邪國의 성격과 관련하여-」『三韓의 社會와 文化』, 신서원.
남재우, 2003, 『安羅國史』, 혜안.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오가야)
五伽耶[按駕洛記贊云 垂一紫纓 下六圓卵 五歸各邑 一在玆城 則一爲首露王 餘五各爲五伽耶之主 金官不入五數當矣 而本朝史略 並數金官 而濫記昌寧 誤]
阿羅[一作耶]伽耶[今咸安] 古寧伽耶[<今>咸寧] 大伽耶[今高靈] 星山伽耶[今京山 (一)云碧珍] 小伽耶[今固城] 又本朝史略云 太祖天福五年庚子 改五伽耶名 一金官[爲金海府] 二古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寧 恐高靈之訛] 餘二阿羅星山[同前 星山或作碧珍伽耶]
오가야(五伽耶)[가락기찬(駕洛記贊)을 살펴보면, 한 개의 자색 끈이 내려와 6개의 둥근 알을 주었는데, 그 중 다섯은 각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다고 한다. 곧 하나는 수로왕(首露王)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오가야(五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하니 금관(金官)이 다섯에 들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까지 아울러 헤아리고 또 창녕(昌寧)을 추가로 기록하였으니 잘못이다.]
아라(阿羅)[야(耶)라고도 한다]가야(伽耶)[지금 함안(咸安)], 고령가야(古寧伽耶)[지금 함녕(咸寧)], 대가야(大伽耶)[지금 고령(高靈)], 성산가야(星山伽耶)[지금 경산(京山)이니, 혹은 벽진(碧珍)이라고도 함], 소가야(小伽耶)[지금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 이르길, 태조(太祖) 천복(天福) 5年(940) 경자에 오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첫째는 금관[김해부(金海府)가 되었다], 둘째는 고령[가리현(加利縣)이 되었다], 셋째는 비화(非火)[지금 창녕(昌寧)이니 아마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하다],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라 하였다[위와 같다. 성산은 혹은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