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대가야

기본정보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 지방에 있었던 가야제국의 한 나라이다. 금관국에 뒤이어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일반정보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 지방에 있었던 가야제국의 한 나라이다. 금관국에 뒤이어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고 전하고 있다. 5세기 이후 고령·합천 등 경상도 내륙 산간지방의 농업에 유리한 입지조건과 제철(製鐵)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중심지로 떠올랐다. 481년 백제·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활동의 폭이 매우 제한되었다. 554년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오히려 562년 신라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전문정보

대가야(大伽耶)는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1 오가야(五伽耶)조의 다섯 가야 중의 하나이다. 그 지역은 지금의 경상남도 고령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유사』 기이1 오가야조에서는 대가야의 이름과 지역만을 기록하고 있으며, 본문의 「본조사략(本朝史略)」에 대가야의 이름이 빠지는 것은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을 제외하였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대가야의 역년과 교빙관계 기사, 시조 신화 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그리고 중국 측 사료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권34 잡지(雜志)3 지리(地理)1에 의하면 대가야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42년에 개국하고, 제 16대왕 도설지왕(道說智王)에 이르러 신라 진흥왕(眞興王) 23년(562)에 멸망하였다고 전하는데, 전체 역년은 520년이 된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를 통해 신라와 가야의 교빙관계의 기사를 찾아 볼 수 있다. 탈해왕(脫解王) 21년(77)부터 내해왕(奈解王) 17년(213)까지 관계기사가 12개조가 나오다가 끊어지고, 다시 소지왕(炤知王) 3년(481) 진흥왕 23년(562)까지 8개 기사가 나온다. 이 중 나해왕대 이전의 가야(加耶)·가라(加羅)는 모두 김해(金海) 가락국(駕洛國)을 가리키고 소지왕대 이후의 가야(加耶)·가양(加良)은 모두 대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400년경까지는 김해의 가락국이 가야를 칭하였고, 5세기 후반 이후로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가야라고 칭하였기 때문이다.(김태식, 1993)

대가야 지역의 시조신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고령현(高靈縣) 건치연혁조에 최치원이 쓴 『석리정전(釋利貞傳)』의 내용 일부가 전하고 있는데,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비가지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의 별칭이다.(伽倻山神正見母主 乃爲天神夷毗訶之所感 生大伽倻王惱窒朱日金官國王惱窒靑裔 裔二人 則惱窒朱日爲夷毗訶之王之別稱 靑裔爲首露王之別稱)”는 기록이 있다.

위의 신화의 전체적인 구조는 천신(天神)과 지모신(地母神)이 결합에 의한 출생 신화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신화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서 난생(卵生)의 요소는 보이지 않으나, 이는 『석리정전(釋利貞傳)』이라는 전기의 성격상 계보만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고령 양전동 암각화 소재지의 지명이 알터이고, 또는 정견모주가 알을 두 개 낳아 하나는 두고, 하나는 낙동강 하류로 흘려보냈다는 민간전승이 남아 있는 것에서도 난생 요소가 원래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대가야 시조신화의 특징으로 가야 산신 정견모주의 강조를 들 수가 있다. 즉 천신 이비가지가 나오지만, 수로왕 신화와는 달리 강림(降臨)의 여부가 분명치 않고 단순한 감응에 그치고 있어, 그보다 가야산신의 권위가 선행된다는 점에서 삼한시대 이래 고령지방의 토착 재지 세력이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김태식, 1993)

대가야의 발전정도가 어느 단계까지 도달했느냐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논의가 분분하다. 가야 내부의 발전이 복합군장사회 단계까지 도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태식, 1990) 그리고 최근에는 부체제단계 또는 고대 국가로의 발전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가야에 부체제가 성립했는지 여부를 사료검토를 통해 살펴본 연구도 있다. 연맹소속국들의 대외관계의 창구 단일화가 이루어지는 현상까지 포함하는 것이 부체제라면 대가야의 경우 그것이 성립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고 하면서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경우와 엄밀하게 비교하여 재검토해야한다는 것이다.(김태식, 2000)

반면 이보다 더 낮게 보아 소국 단계 정도까지 발전한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즉 성읍국가단계로 보는 견해(천관우, 1991)와 도시국가까지 수준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이영식, 1993)가 있다. 하지만 개별국가로서의 대가야의 발전상에 대해 검토한 연구자들은 이보다 진전된 단계였던 것으로 보는데, 대가야가 연맹체 단계를 지나 부체제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보는 견해(노중국, 1995)와 신라의 마립간(麻立干) 시기에 준하는 단계로 보는 견해(주보돈, 1995)가 있으며 대가야가 고대국가 단계까지 진입했던 것을 보는 견해도 있다.(이희준, 1995)

고령지역은 남해안에서 낙동강을 이용해 거슬러 올라 올 수 있는 지역으로 고령을 기점으로 거창, 함양 등의 내륙 지역과 통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소백산맥을 넘어 무주·장수·임실·남원 등으로 통할 수 있다. 그리고 북으로는 성주·김천을 거쳐 추풍령을 넘어 황간·영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역이다. 동으로는 낙동강을 건너면 곧바로 대구를 나아갈 수 있는 지역이다. 고령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이점이 곧 가야 후기의 가장 강력한 국(國)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백승옥, 2003)

대가야는 이러한 기반으로 국제사회에도 등장하게 되는데 『남제서(南齊書)』 권58 열전(列傳) 39 동남이전(東南夷傳) 가라국(加羅國)조를 통해 479년 가라의 이름으로 남제에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작호를 받았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新羅本紀)3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3년 조를 통해서 소지마립간 3년(48)에는 백제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의 미질부(영일군 흥해읍) 침입에 대하여 구원병을 보낼 정도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6세기초 대가야는 서쪽으로 팽창하여 소백산맥 서쪽의 남원·임실 지방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나 백제의 반격으로 곧 도로 빼앗겼으나, 백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대가야와 왜의 교역장이었던 섬진강 하류 하동의 영유권을 빼앗으려고 획책하였다. 그러나 대가야는 이에 불복하고 거창 등지의 변경에 축성하여 세력권을 정비하였고, 백제·왜가 하동을 그들의 교역장소로 이용하여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 안정을 도모하였다. 가야지역 통합의 움직임은 522년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 이후 얼마 안 있어 분열되기 시작한다.

대가야의 멸망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존속 기간이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시王)부터 마지막왕 도설지왕(道說智王)까지 16세(世) 520년인데, 신라 진흥왕이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흥왕 23(562) 가야가 배반했기 때문에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해 사다함(斯多含)과 함께 쳐서 멸망시켰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가야는 고령의 대가야로 추측된다. 이 때 금관가야는 이미 멸망하고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가야가 어떠한 선제 군사행위를 취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사다함의 5천기병이 대가야 국도까지 먼저 쳐들어 갔다. 신라측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이 이사부에게 가락국을 습격케 하였으며, 가라 사람들은 뜻밖에 신라 군대가 갑자기 쳐들어오므로 너무 놀라서 막을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대가야는 신라 대군의 기습 공격에 의해 멸망하였던 것이다.

대가야 연구에서 가장 주목되는 성과는 대가야의 영역과 국가적 성격에 대해서이다. 대가야의 영역에 대해서는 고령양식의 토기 확산을 통해 시기별로 추정하는 견해이다. 고령양식의 토기의 분포권을 통해 가야의 범위를 가름해보고,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 파악 할 수는 있다. 고령양식의 토기출현을 통해서 대가야는 5세기에 중기에는 황강 유역 및 남강 상류역을 포괄하는 맹주국이 되고 5세기 말에는 그 대부분 지역을 간접 지배하는 영역국가화하였으며, 6세기 대에는 고령에 가까운 지역부터 직접지배하기 시작하여 점차 그 범위를 넓혀 나갔으며 그와 더불어 대가야의 권역도 꾸준히 확대되어 신라의 낙동강 이서지역으로의 진출에 따른 가야 제국의 연합에 힘입어 가야 전역을 포괄하는 연맹체의 주도국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이희준, 1995)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견해와 반대로 대가야 지역의 묘제와 대가야양식의 확산과 문화권의 의미, 순장고분 자료에 나타나는 사회 문화적 의미를 검토하여 1세기경 고령 반운리를 중심으로 읍락국가 반로국이 성립되었으며, 제사장성격이 강한 소국단계였으며 이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반운리 목곽묘유적으로 보았다. 4세기초 반로군은 석곽묘를 사용하고 군사적 성격이 강해지면서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국가적 명칭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았다. 그 후 5세기후반이 되면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는 대가야식 묘제와 대가야양식의 토기 일색이 만들어 졌으며, 이 결실은 479년 남제 사신 파견과 479년에서 530년까지의 주변 소국을 통합하여 영역을 확보 하였다.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던 대가야는 6세기 후반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영토전쟁 사이에서는 굳건한 자기 방어력과 국가통치력은 가지지 못하여, 대가야연맹의 맹주국이 아니였음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세기, 2003)

참고문헌

천관우, 1991, 『加耶史硏究』, 일조각.
김태식, 1993, 『加耶聯盟史』, 일조각.
이영식, 1993, 『加耶諸國と任那日本府』, 吉川弘文館.
노중국, 1995, 「大伽耶의 政治·社會構造」『加耶史硏究』, 경상북도.
이희준, 1995, 「토기로 본 大伽耶의 圈域과 그 변천」『加耶史硏究』, 경상북도.
주보돈, 1995, 「序說-加耶史의 새로운 定立을 위하여」『加耶史硏究』, 경상북도.
김태식, 2000, 「加耶聯盟體의 部體制 成立與否에 대한 小論」『한국고대사연구』17.
김세기, 2003, 『고분 자료로 본 대가야 연구』, 학연문화사.
백승옥, 2003, 『가야 각국사 연구』, 혜안.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오가야)
五伽耶[按駕洛記贊云 垂一紫纓 下六圓卵 五歸各邑 一在玆城 則一爲首露王 餘五各爲五伽耶之主 金官不入五數當矣 而本朝史略 並數金官 而濫記昌寧 誤]
阿羅[一作耶]伽耶[今咸安] 古寧伽耶[<今>咸寧] 大伽耶[今高靈] 星山伽耶[今京山 (一)云碧珍] 小伽耶[今固城] 又本朝史略云 太祖天福五年庚子 改五伽耶名 一金官[爲金海府] 二古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寧 恐高靈之訛] 餘二阿羅星山[同前 星山或作碧珍伽耶]
오가야(五伽耶)[가락기찬(駕洛記贊)을 살펴보면, 한 개의 자색 끈이 내려와 6개의 둥근 알을 주었는데, 그 중 다섯은 각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다고 한다. 곧 하나는 수로왕(首露王)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오가야(五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하니 금관(金官)이 다섯에 들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까지 아울러 헤아리고 또 창녕(昌寧)을 추가로 기록하였으니 잘못이다.]
아라(阿羅)[야(耶)라고도 한다]가야(伽耶)[지금 함안(咸安)], 고령가야(古寧伽耶)[지금 함녕(咸寧)], 대가야(大伽耶)[지금 고령(高靈)], 성산가야(星山伽耶)[지금 경산(京山)이니, 혹은 벽진(碧珍)이라고도 함], 소가야(小伽耶)[지금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 이르길, 태조(太祖) 천복(天福) 5年(940) 경자에 오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첫째는 금관[김해부(金海府)가 되었다], 둘째는 고령[가리현(加利縣)이 되었다], 셋째는 비화(非火)[지금 창녕(昌寧)이니 아마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하다],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라 하였다[위와 같다. 성산은 혹은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