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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가야

기본정보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 지방에 있었다고 하는 가야제국의 한 나라로 벽진가야(碧珍加耶)라고도 한다.

일반정보

성산가야는 가야제국의 한 나라로 지금의 경상남도 성주군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산가야는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성산가야라는 국명(國名)은 성산군이라는 관념이 경산(京山) 및 벽진(碧珍) 일대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던 신라 말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대체로 추정한다. 이 지역에는 벽진국(碧珍國)이 있었다가 4세기 말 이후 신라 영향권에 편입되었고, 결국 6세기 초반 무렵에 완전히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본다.

전문정보

성산가야(星山伽耶)는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에 있던 옛 가야국의 국명이다. 성산가야의 위치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1 오가야(五伽耶)조를 통해 “지금(고려)의 경산(京山)으로 벽진(碧珍)이라고도 한다.(今京山 一云碧珍)”를 통해 알 수 있다. 경산은 오늘날 성주군의 중심인 성주면에 있는데, 옛 지명인 경산부(京山府)가 그대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에 따르면 성산군의 4개 영현 중의 하나였으며, 『고려사(高麗史)』 권57 지리(地理)2 경상목(慶尙牧)조에 따르면, 경산부는 본래 “신라 본피현으로 경덕왕이 신안현으로 개명하고 성산군의 영현으로 삼았으며, 후에 벽진군으로 바꿨다.(京山府 本新羅本彼縣 景德王改名新安爲星山郡領縣 後改爲碧珍郡)”고 하여 경덕왕대에 신안현으로 바뀌었으며, 신라말기에 벽진군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김태식, 1993) 이와 달리 고려 개국공신 이총언 가문의 영향으로 벽진군으로 개명되었고 이러한 지명의 혼란이 결국 벽진가야라고도 불리어진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형기, 1998)

성주지역의 가야 당시의 국명에 대하여 『삼국지』 동이전의 반로국(半路國)을 성주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대게는 로(路)를 파(跛)의 착오로 『일본서기』에 보이는 반파국으로 이해하면서 지금의 성주지역으로 비정하였던 것이다. 반로국과 반파국을 동일 소국으로 보는 것과 달리 반로국과 반파국을 각각의 소국으로 보면서 반로국은 그 위치를 알 수 없지만 합천-진주-함양방면으로 비정하고 반파국은 성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천관우, 1991)

최근의 대체적인 견해는 반파국을 고령지역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반로국이 고령지역으로 비정될 때 성주지역은 어떠한 소국이 존재하고 있었는가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에 주목되는 것이 벽진국이다. 벽진국의 이름은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벽진국의 이름이 보인다. 신라는 소국을 편입시킨 뒤 그 소국명을 그대로 지방의 주현명으로 사용하여 신라의 지방체제로 편입되었으며, 벽진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는 것과 『경상도지리지』에서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성주지역에 벽진국이 존재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성주읍 성산동, 벽진면 해평동, 매수동, 월항면 수죽동, 선남면 도흥동 등에 지석묘가 분포하는 각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이래의 일정 정도의 계급성을 띤 집단의 상정이 가능한데 이들의 통합 정복과정에서 벽진국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벽진국이 어느 시기에 성산가야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다만 늦어도 3세기초에는 소가야가 형성되었고(이형기, 1998) 삼한지역에 3세기 대에 들어서서 지역연맹체가 구성되었다는 사실로 볼 때(노중국, 1995), 성산가야도 대체로 3세기중엽 이후에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성산가야의 중심세력은 성산동고분군을 축조하던 집단으로 볼 수 있다.(계명대학교박물관, 1998)

참고문헌

천관우, 1991, 『加耶史硏究』, 일조각.
김태식, 1993, 『加耶聯盟史』, 일조각.
이형기, 1998, 「星山伽耶聯盟體의 成立과 그 推移」『민족문화논집』18·19合.
계명대학교박물관, 1998, 『星州星山洞古墳群 特別展圖錄』.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오가야)
五伽耶[按駕洛記贊云 垂一紫纓 下六圓卵 五歸各邑 一在玆城 則一爲首露王 餘五各爲五伽耶之主 金官不入五數當矣 而本朝史略 並數金官 而濫記昌寧 誤]
阿羅[一作耶]伽耶[今咸安] 古寧伽耶[<今>咸寧] 大伽耶[今高靈] 星山伽耶[今京山 (一)云碧珍] 小伽耶[今固城] 又本朝史略云 太祖天福五年庚子 改五伽耶名 一金官[爲金海府] 二古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寧 恐高靈之訛] 餘二阿羅星山[同前 星山或作碧珍伽耶]
오가야(五伽耶)[가락기찬(駕洛記贊)을 살펴보면, 한 개의 자색 끈이 내려와 6개의 둥근 알을 주었는데, 그 중 다섯은 각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다고 한다. 곧 하나는 수로왕(首露王)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오가야(五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하니 금관(金官)이 다섯에 들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까지 아울러 헤아리고 또 창녕(昌寧)을 추가로 기록하였으니 잘못이다.]
아라(阿羅)[야(耶)라고도 한다]가야(伽耶)[지금 함안(咸安)], 고령가야(古寧伽耶)[지금 함녕(咸寧)], 대가야(大伽耶)[지금 고령(高靈)], 성산가야(星山伽耶)[지금 경산(京山)이니, 혹은 벽진(碧珍)이라고도 함], 소가야(小伽耶)[지금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 이르길, 태조(太祖) 천복(天福) 5年(940) 경자에 오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첫째는 금관[김해부(金海府)가 되었다], 둘째는 고령[가리현(加利縣)이 되었다], 셋째는 비화(非火)[지금 창녕(昌寧)이니 아마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하다],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라 하였다[위와 같다. 성산은 혹은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