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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가야

기본정보

경상남도 창녕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가야제국의 하나

일반정보

경상남도 창녕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가야제국의 하나인데, 비자벌(比子伐)·비자발(比自鉢)·불사국(不斯國) 등으로도 불리었다.

전문정보

비화가야(非火伽耶)는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지역에 비정되는 옛 가야국의 국명이다. 『삼국유사』 기이1 오가야(五伽耶)조에서 인용하고 있는 “「본조사략(本朝史略)」에 고려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940)에 오가야의 명칭을 고쳤는데, “비화가야.[지금의 창녕이니 아마 고령의 잘못인 듯하다]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비화가야를 나타내는 다른 이름은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의 “비자벌(比子伐)”과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神功) 섭정(攝政) 49년조에 나타나는 “비자발(比自鉢)”과 『삼국지(三國志)』 한(韓)전 변진(弁辰) 기사에는 “불사국(不斯國)”으로 나타나고 있다.(천관우, 1991)

“비(比)”, “불(不)”, “비(非)”는 모두 빛(光)이라는 우리말을 한자화한 것이다. 그리고 “화(火)”, “벌(伐)”은 삼국시대에 성·촌·읍을 의미하는 신라의 명칭으로, 들판의 의미를 가지는 “벌”과 “들”을 한자화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비사벌, 비자벌, 비화 등의 표기는 “빛벌”이라는 순수 우리말을 한자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백승옥, 2003)

창녕지역은 낙동강 이동에 위치하여 다른 가야제국들이 낙동강 서쪽에 주로 위치한 것과 지리적 차이가 난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볼 때 5세기 후반 이후로 이 지역에는 신라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기 때문에 비화가야가 가야 7국중에 하나로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2001)

또한 이 지역은 『일본서기』의 5세기 중엽 이후 기사 중에는 가야국 중에 비자발만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하여 신공기 49년조의 연대를 180년 인하하여 비자발과 관련한 기사를 492년의 사실로 보거나 그 내용이 후일 백제 성왕대의 사실을 근거로 소급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6세기에 신라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기록에서 사라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박천수, 1993)

6세기에 신라에 귀속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가야 지역 국가들의 자주성 회복운동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관계 속에서 가야제국은 서서히 붕괴되었으며, 비자벌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6세기전반기 신라에 귀속되었고, 555년 신라의 하주(下州) 설치로 인해 완전히 멸망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특히 비자발은 전략적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좀더 일찍 주변국들의 선점 대상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백승옥, 2003)

이와 다르게 5세기대로 보는 견해는 1-3세기에 창녕지역은 불사국이 되었고, 진한연맹체의 한 구성체로 존재하였으며, 3세기말에서 4세기초 변한에서 가야사회로 전화되었다고 보았다. 이때의 국명은 비자발로, 이 이름이 후일 비화가야로 불리게 된 역사적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이후 창녕지역은 백제가 이 지역을 평정할 때 평정 대상의 하나로 되었으나 자신의 국명을 가지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립하다가 5세기 후반 이후의 어느 시기에 신라영역으로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박천수, 1993)

참고문헌

박천수, 1993, 「三國時代 昌寧地域 集團의 性格硏究」『嶺南考古學』13.
노중국, 2001, 「가야사 연구의 어제와 오늘」『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백승옥, 2003, 『가야 각국사 연구』, 혜안.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오가야)
五伽耶[按駕洛記贊云 垂一紫纓 下六圓卵 五歸各邑 一在玆城 則一爲首露王 餘五各爲五伽耶之主 金官不入五數當矣 而本朝史略 並數金官 而濫記昌寧 誤]
阿羅[一作耶]伽耶[今咸安] 古寧伽耶[<今>咸寧] 大伽耶[今高靈] 星山伽耶[今京山 (一)云碧珍] 小伽耶[今固城] 又本朝史略云 太祖天福五年庚子 改五伽耶名 一金官[爲金海府] 二古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寧 恐高靈之訛] 餘二阿羅星山[同前 星山或作碧珍伽耶]
오가야(五伽耶)[가락기찬(駕洛記贊)을 살펴보면, 한 개의 자색 끈이 내려와 6개의 둥근 알을 주었는데, 그 중 다섯은 각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다고 한다. 곧 하나는 수로왕(首露王)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오가야(五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하니 금관(金官)이 다섯에 들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까지 아울러 헤아리고 또 창녕(昌寧)을 추가로 기록하였으니 잘못이다.]
아라(阿羅)[야(耶)라고도 한다]가야(伽耶)[지금 함안(咸安)], 고령가야(古寧伽耶)[지금 함녕(咸寧)], 대가야(大伽耶)[지금 고령(高靈)], 성산가야(星山伽耶)[지금 경산(京山)이니, 혹은 벽진(碧珍)이라고도 함], 소가야(小伽耶)[지금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 이르길, 태조(太祖) 천복(天福) 5年(940) 경자에 오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첫째는 금관[김해부(金海府)가 되었다], 둘째는 고령[가리현(加利縣)이 되었다], 셋째는 비화(非火)[지금 창녕(昌寧)이니 아마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하다],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라 하였다[위와 같다. 성산은 혹은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