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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

기본정보

수로왕의 탄생과 관련된 설화를 전하는 산봉우리

지 정 명 : 구지봉
지정번호 : 사적 제429호
소 재 지 : 경남 김해시 구산동 산81-2번지 일대

일반정보

구지(龜旨)는 수로왕의 탄생과 관련된 설화를 전하는 산봉우리로 구지봉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경남 김해시 구산동 산81-2번지 일대를 말하는데, 사적 제4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서 수로왕의 탄생과 관련된 설화를 전하는 곳으로 구지가 언급되고 있다. 건무(建武) 18년(42) 3월 계욕일(禊欲日)에 가락국이 건국되기 이전의 선주민인 구간(九干)이 거주하는 북쪽인 구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무리 이삼백 명이 가보니, 형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났다. 그리고 황천(皇天)이 이곳을 다스려서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 하시고, 봉우리 정상의 흙을 파고 구지가(龜旨歌)를 부르며 왕을 맞이하라고 한다. 구간 등이 이를 따라서 노래하고 춤추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색(紫色)의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았고, 줄 끝에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있었다. 이를 열어보니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는데 이를 구간중의 한명인 아도(我刀)의 집에 보관해 두자 얼마 뒤 여섯 개의 알이 사내 아이(童子)가 되었으며, 이 중 한 명이 가락국을 건국한 수로왕이 되었다는 설화이다.

『삼국유사』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서는 “구지(龜旨)[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마치 거북이(十朋之龜)가 엎드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龜旨[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라고 세주를 붙여서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십붕상지상(十朋伏之狀)”은 『주역(周易)』65 손괘(損掛)에 언급되는 거북이를 지칭하는 “십붕지구(十朋之龜)”의 약칭으로 구지는 곧 거북이의 형상에서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권41 열전(列傳)1 김유신(金庾信) 상(上)에서, “수로(首露)는 어떤 사람인지를 모른다.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에 구봉(龜峯)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9촌(村)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 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 하였다.(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 開國 號曰加耶)”라고 되어있다. 『가락국기』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구지(龜旨)를 구봉(龜峯)으로 표기하였는데, 구봉(龜峯)은 구지봉(龜旨峯)의 약칭으로 생각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2 경상도(慶尙道)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산천(山川)조에서는 “구지봉(龜旨峯)[김해도호부 북쪽 3리 지점에 있다.](龜旨峯[在府北三里])”고 밝히고 있다. 또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김해부읍지(金海府邑誌) 산천(山川)조에는 “구지봉(龜旨峯)[김해도호부 북쪽으로 5리 지점에 있다. 분산(盆山) 중턱으로부터 서쪽으로 향해 내려와 엎드린 거북이 같으니 곧 수로왕이 탄강(誕降)한 곳이다.](龜旨峯[在府北五里 自盆山中麓西向 降伏如龜 卽首露王誕降處])”라고 하여 구체적으로 현재 김해시에서 가장 높은 산인 분산의 줄기에 해당하며, 구지봉의 명칭이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에서 따온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구지는 현재 경남 김해시 구산동 산81-2번지 일대의 해발 200m의 낮은 산이다. 이곳은 가야의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는 성지(聖地)로 인식되어 사적 제429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지봉의 정상에는 바둑판식 지석묘 1기가 있다. 상석은 타원형에 가까운데 좌우는 약 2.5m이고 높이는 0.6m로 하단에 3~5매의 원형 지석이 있다. 지석묘의 상단에는 한석봉의 필체로 전하는 “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고 글씨가 새겨져 있다. 출토된 유물이 없어서 구체적인 축조 시기와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세형동검이 출토된 기원전 4~3세기로 비정되는 인근의 내동지석묘(內洞支石墓)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된다.(이병태, 1991) 한편 이 지석묘의 외형에서 구지봉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창원문화재연구소·동아대학교 박물관, 1998) 그렇지만 구지봉이 원래는 거북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구수봉(龜首峰)이라 하였는데, 지금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이 있는 평탄한 위치가 거북의 몸체이고, 서쪽으로 쭉 내민 봉우리의 형상이 거북의 머리 모양 같다고 하여 이와 같이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지봉 남쪽의 완만한 경사면에서는 대성동 환호유적이 조사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환호 2기, 구상유구 2기 및 하도와 저습지가 조사되었다.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방어를 위한 시설이라기보다 제사를 위한 공간으로 판단되었다. 이를 통해서도 구지봉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김해지역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경남문화재연구원, 2003)

한편 과거 구지봉 정상에는 수로왕 설화와 관련된 석물들이 조성되어 있었다. 1908년에 건립된 “大駕洛國太祖王誕降之地(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라고 새겨진 비와 1976년에 만들어 세운 여섯 개의 알과 아홉 마리의 돌거북으로 구성된 천강육란석조상(天降六卵石造像)이 그것인데, 유적의 원형을 훼손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현재는 수로왕릉 부지로 이전되었다.

참고문헌

이병태, 1991, 『金海地方文化遺蹟』, 김해문화원.
창원문화재연구소·동아대학교 박물관, 1998, 『文化遺蹟分布地圖 -金海市-』.
경남문화재연구원, 2003, 『金海 北部 消防道路 開設區間內 大成洞 環濠遺蹟』.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開闢之後 此地未有邦國之號 亦無君臣之稱 越有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等九干者 是酋長 領總百姓 凡一百戶 七萬五千人 多以自都山野 鑿井而飮 耕田而食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 所居北龜旨[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 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爲君后 爲玆故降矣 爾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忻而歌舞 未幾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著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裹>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尋還 <裹>著抱持而歸我刀家 寘榻上 其衆各散 過浹辰 翌日平明 衆庶復相聚集開合 而六卵化爲童子 容貌甚偉 仍坐於床 衆庶拜賀 盡恭敬止 日日而大 踰十餘晨昏 身長九尺則殷之天乙 顔如龍焉則漢之高祖 眉之八彩則有唐之<堯> 眼之重瞳則有虞之舜 其於月望日卽位也 始現故諱首露 或云首陵[首陵是崩後諡也]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爲五伽耶主 東以黃山江 西南以濸海 西北以地理山東 北以伽耶山 南而爲國尾 俾創假宮而入御 但要質儉 茅茨不剪 土階三尺 二年癸卯春正月 王若曰 朕欲定置京都 仍駕幸假宮之南新畓坪[是古來閑田 新耕作故云也 畓乃俗文也]四望山嶽 顧左右曰 此地狹小如蓼葉 然而秀異 可爲十六羅漢住地 何況自一成三 自三成七 七聖住地 固合于是 托土開疆 終然允臧歟 築置一千五百步周廻羅城 宮禁殿宇及諸有司屋宇 <武>庫倉廩之地 事訖還宮 徧徵國內丁壯人夫工匠 以其月二十日資始金<湯> <曁>三月十日役畢 其宮闕屋舍 俟農隙而作之 經始于厥年十月 逮甲辰二月而成 涓吉辰御新宮 理萬機而懃庶務 忽有琓夏國含達王之夫人妊娠 彌月生卵 卵化爲人 名曰脫解 從海而來 身長三尺 頭圓一尺 悅焉詣闕 語於王云 我欲奪王之位 故來耳 王答曰 天命我俾卽于位 將令安中國而綏下民 不敢違天之命以與之位 又不敢以吾國吾民 付囑於汝 解云 若爾可爭其術 王曰 可也 俄頃之間 解化爲鷹 王化爲鷲 又解化爲雀 王化爲鸇 于此際也 寸陰未移 解還本身 王亦復然 解乃伏膺曰 僕也適於角術之場 鷹之(於)鷲 雀之於鸇 獲免焉 此蓋聖人惡殺之仁而然乎 僕之與王爭位良難 便拜辭而出 到 麟郊外渡頭 將中朝來泊之<水>道而行 王竊恐滯留謀亂 急發舟師五百艘而追之 解奔入雞林地界 舟師盡還 事記所載 多異與新羅 屬建<武>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 九干等朝謁之次 獻言曰 大王降靈已來 好仇未得 請臣等所有處女絶好者 選入宮闈 俾爲伉儷 王曰 朕降于玆天命也 配朕而作后 亦天之命 卿等無慮 遂命留天干押輕舟 持駿馬 到望山島立待 申命神鬼干就乘岾[望山島 京南島嶼也 乘岾 輦下國也]忽自海之西南隅 掛緋帆 張茜旗 而指乎北 留天等先擧火於島上 則競渡下陸 爭奔而來 神鬼望之 走入闕 奏之 上聞欣欣 尋遣九干等 整蘭橈 揚桂楫 而迎之 旋欲陪入內 王后乃曰 我與(爾)等素昧平生 焉敢輕忽相隨而去 留天等返 達后之語 王然之 率有司動蹕 從闕下西南六十步許地 山邊設幔殿祗候 王后於山外別浦津頭 維舟登陸 憩於高嶠 解所著綾<袴>爲贄 遺于山靈也 其地侍從媵臣二員 名曰申輔趙匡 其妻二人 號慕貞慕良 或臧獲幷計二十餘口 所齎錦繡綾羅 衣裳疋段 金銀珠玉 瓊玖服玩器 不可勝記 王后漸近行在 上出迎之 同入帷宮 媵臣已下衆人 就階下而見之卽退 上命有司 引媵臣夫妻曰 人各以一房安置 已下臧獲各一房五六人安置 給之以蘭液蕙醑 寢之以文茵彩薦 至於衣服疋段寶貨之類 多以軍夫遴集而護之 於是 王與后共在御國寢 從容語王曰 妾是阿踰陁國公主也 姓許 名黃玉 年二八矣 在本國時 今年五月中 父王與皇后顧妾而語曰 爺孃一昨夢中 同見皇天上帝 謂曰 駕洛國元君首露者 天所降而俾御大寶 乃神乃聖 惟其人乎 且以新莅家邦 未定匹偶 卿等<須>遣公主而配之 言訖升天 形開之後 上帝之言 其猶在耳 爾於此而忽辭親 向彼乎往矣 妾也浮海遐尋於蒸棗 移天夐赴於蟠桃 螓首敢叨 龍顔是近 王答曰 朕生而頗聖 先知公主自遠而屆 下臣有納妃之請 不敢從焉 今也淑質自臻 眇躬多幸 遂以合歡 兩過淸宵 一經白晝 於是 遂還來船 篙工楫師共十有五人 各賜粮粳米十碩 布三十疋 令歸本國 八月一日 廻鑾 與后同輦 媵臣夫妻齊鏕竝駕 其漢肆雜物 <咸>使乘載 徐徐入闕 時銅壺欲午 王后爰處中宮 勑賜媵臣夫妻私屬空閑二室分入 餘外從者以賓舘一坐二十餘間 酌定人數 區別安置 日給豊羡 其所載珍物 藏於內庫 以爲王后四時之費 一日 上語臣下曰 九干等俱爲庶僚之長 其位與名皆是宵人野夫之號 頓非簪履職位之稱 儻化外傳聞 必有嗤笑之恥 遂改我刀爲我躬 汝刀爲汝諧 彼刀爲彼藏 五<刀>爲五常 留水留天之名 不動上字 改下字留功留德 (神天)改爲神道 五天改爲五能 神鬼之音不易 改訓爲臣貴 取雞林職儀 置角干阿叱干級干之秩 其下官僚 以周判漢儀而分定之 斯所以革古鼎新 設官分職之道歟 於是乎 理國齊家 愛民如子 其敎不肅而威 其政不嚴而理 況與王后而居也 比如天之有地 日之有月 陽之有陰 其功也塗山翼夏 唐<媛>興<姚> 頻年夢有得熊羆之兆 誕生太子居登公 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一日后崩 壽一百五十七 國人如嘆坤崩 葬於龜旨東北塢 遂欲(不)忘子愛下民之惠 因號初來下纜渡頭村曰主浦村 解綾<袴>高岡曰綾峴 茜旗行入海涯曰旗出邊 媵臣泉府卿申輔宗正監趙匡等 到國三十年後 各産二女焉 夫與婦踰一二年而皆<抛>信也 其餘臧獲之輩 自來七八年間 未有玆子生 唯抱懷土之悲 皆首丘而沒 所舍賓館 圓其無人 元君乃每歌鰥枕 悲嘆良多 隔二五歲 以獻帝<建>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 而殂落 壽一百五十八歲矣 國中之人 若亡天只 悲慟甚於后崩之日 遂於闕之艮方平地 造立殯宮 高一丈 周三百步 而葬之 號首陵王廟也 自嗣子居登王 洎九代孫仇衝之享是廟 <須>以每歲孟春三之日七之日 仲夏重五之日 仲秋初五之日十五之日 豊潔之奠 相繼不絶 …
가락국기[문종조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천지가 개벽한 후 이 땅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윽고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9간(九干)이 있어 추장(酋長)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니 무릇 1백호에 7만 5천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산과 들에 자리 잡고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경작하여 먹었다. 후한(後漢)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42) 임인(壬寅) 3월 계욕일(禊欲日)에 그들이 사는 곳 북쪽의 구지(龜旨)[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마치 거북이(十朋之龜)가 엎드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무엇을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났다. 무리 이삼백 인이 이곳에 모였다. 사람의 소리와 같은 것이 나는데 그 형상은 감추고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여기에 사람이 없느냐?”라고 하였다. 구간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을 무엇이라 하느냐?”고 하였다. 대답하길, “구지(龜旨)입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시기를 이곳을 다스려서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 하셨는데, 이러한 이유로 내려온 것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에서 흙을 파서 노래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서 뛰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구간 등이 그 말과 같이 모두 기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자색(紫色)의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아있었는데,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있었다. 열어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무리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서 몸을 펴서 백번 절하였다. 얼마 있다가 다시 싸가지고 아도(我刀)의 집으로 돌아와 탁자(榻) 위에 두고 각기 흩어졌다. 열이틀(浹辰)이 지나고 다음날 동이 틀 무렵(平明)에 무리들이 다시 모여 상자를 여니, 여섯 개의 알이 변화하여 사내아이(童子)가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훌륭하였다. 이윽고 평상에 앉히고 무리들이 하례의 절을 올리고 극진히 공경하였다. 나날이 자라서 십 여일이 지나자 신장이 9척이나 되니 은(殷)의 천을(天乙)을 닮았고, 얼굴은 용과 같으니 한(漢)의 고조(高祖)를 닮았으며, 눈썹의 팔채(八彩)는 당(唐)의 요(堯)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虞)의 순(舜)과 같았다. 그 달 보름에 즉위(卽位)하였다. 처음으로 나왔으므로 이름(諱)을 수로(首露)라 하였는데, 혹은 수릉(首陵)이라 하였다[수릉은 죽은 뒤의 시호(諡號)이다] 나라의 이름은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고 하였는데, 곧 육가야(六伽耶)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 오가야(五伽耶)의 임금(主)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으로는 창해(滄海), 서북쪽으로는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으로는 가야산(伽耶山)을 경계(境界)로 하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임시궁궐(假宮)을 짓게 하여 들어가 살았는데 질박하고 검소하려 하여 (지붕의) 이엉(茅茨)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된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수로왕) 2년 계묘(癸卯, 43) 봄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짐이 도읍을 정하고자 한다.”하고, 곧 임시로 지은 궁궐(假宮)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이는 오래된 한전(閑田)이었는데, 새로 경작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답(畓)은 속문(俗文)이다.]에 행차하여 사방으로 산악(山岳)을 바라보고, 좌우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이 땅은 협소하기가 여귀 잎사귀(蓼葉)와 같으나, 수려하고 기이하니 16나한(十六羅漢)이 머물 곳이 될 만하다. 하물며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셋에서 칠을 이루니, 칠성(七聖)이 머무를 곳은 진실로 이곳이 마땅하다. 강토(疆土)를 개척하면 장차 좋은 곳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천 오백보(步) 둘레의 나성(羅城)과 궁궐(宮闕)의 전각과 여러 관서의 건물, 무기고(武庫)와 창고(倉廩)를 건축할 땅을 마련하였다. 일을 마치고 궁궐로 돌아왔는데, 국내(國內)의 장정 인부들과 공장(工匠)들을 두루 징발하여, 그 달 20일에 견고한 성곽(金城湯池)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3월 10일에 이르러 공사를 마쳤다. 궁궐과 옥사(屋舍)는 농한기를 기다렸다가 지었는데, 그 해 10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갑진년(甲辰, 44) 2월에 완공하였다. 좋은 날을 받아 왕이 새 궁궐에 들어가 모든 정사를 처리하고 서무에 힘썼다. 이때에 홀연히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임신하였는데, 달이 차서 알을 낳았고,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니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바다를 건너왔는데, 신장이 3척이고 머리의 둘레가 1척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궁궐을 찾아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하여 왔다.”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하늘이 나를 명하여 왕위에 올라 장차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라고 했는데, 감히 천명을 어기어 왕의 자리를 주지 못할 것이며, 또한 우리나라와 우리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고 하였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을 겨루어 보겠느냐.”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시 후 탈해가 매로 변하니, 왕은 독수리로 변하였다. 탈해가 참새로 변하니 왕은 새매로 변하였는데, 그 사이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래의 모습으로 변하자, 왕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탈해가 이에 항복하며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다투는 데 있어 독수리 앞의 매, 새매 앞의 참새가 되었으나 (죽음을) 면한 것은 대개 성인이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덕 소치이며, 내가 왕과 더불어 자리를 다툼이 실로 어렵다.”하고, 곧바로 작별인사를 하고 나가서, 교외에 있는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中國)의 배가 와서 닿은 물길을 따라 떠나려고 하였다. 왕은 그가 체류하여 난리를 꾀할까 염려하여 급히 배(舟師) 5백척을 보내어 쫓으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경계로 달아나므로 배가 모두 돌아왔다.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48) 7월 27일에 구간 들이 조알(朝謁)할 때에 아뢰어 말하기를,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래로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臣)들의 딸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뽑아 궁중에 드려 배필로 삼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다. 나의 배필로 왕후가 되는 것도 또한 하늘의 명령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輕舟)와 좋은 말(駿馬)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또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다. 승점(乘岾)은 수레 아래(輦下)의 나라(國)이다.]으로 가게 하였다. 홀연히 바다 서남쪽 모퉁이로 부터 붉은 돛을 달고 진홍빛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을 향하여 오고 있었다. 유천간(留天) 등이 먼저 섬에 불을 피우고, 곧 물을 건너 육지에 내려와 앞 다투어 달려왔다. 신귀간(神鬼)이 이것을 바라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말하였다. 왕이 듣고 기뻐하며, 이어 구간 등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노(蘭橈)와 계수나무로 만든 노(桂楫)를 갖추어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에) 왕후(王后)가 말하기를, “나와 너희들은 평생 알지 못한 터인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겠느냐.”고 하였다. 유천간(留天) 등이 돌아와 왕후의 말을 전하였다. 왕은 그렇다고 여겨 여러 관리들을 거느리고 궁궐 서남쪽 60보쯤 되는 산의 주변(山邊)에 가서 장막으로 된 임시 궁궐(幔殿)을 설치하고 왕후를 기다렸다. 왕후는 산 너머의 별포(別浦)의 나루터에서 배를 매어두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며,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그 나라로부터 시종(侍從)하여 온 신하(媵臣) 2명이 있었는데,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라고 하였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은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라 불렀다. 혹은 노비가 도합 20여명 이었고, 가지고 온 각종 비단(錦繡綾羅)과 의복(衣裳疋段), 금․은․주옥과 각종 구슬과 보배로운 기물을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왕후가 점차 왕이 있는 행재소(行在所)에 가까이 오자, 왕이 나아가 맞이하여 함께 장막으로 들어왔다. 따라온 신하와 그 아래 무리들은 계단 아래에서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은 관원(有司)에게 명하여, 따라온 신하 부부들을 인도하게 하며 말하기를, “사람마다 각방에 두고, 그 이하 노비는 한 방에 대여섯 명씩 안치시키며, 난초로 만든 마실 것(蘭液)과 혜초로 만든 술(蕙醑)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하며, 의복과 비단과 보물들까지 주고 많은 군인들을 내어 보호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때에 왕과 왕후가 침전에 들었는데, (왕후가) 왕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저는 본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許氏)고, 이름은 황옥(黃玉)이고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중에 부왕(父王)이 황후(皇后)와 더불어 말씀하기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제 밤 꿈에 똑같이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뵈었는데, (황천상제가) 가락국(駕洛國) 원군(元君) 수로(首露)는 하늘에서 내려 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성하다고 하는 것은 오직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리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잠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 귀에 맴돌았다. 너는 이제 곧 우리와 작별하고 그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다를 건너서 멀리 증조(蒸棗)를 찾아가기도 하고 방향을 바꾸어(移天) 아득히 반도(蟠桃)로도 가보았습니다. 이제 보잘것없는 얼굴로 외람되게 용안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짐은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신하들의 왕비를 맞이하라는 청을 듣지 않았다. 지금 현숙(賢淑)한 그대가 저절로 왔으니 이 몸에게는 다행한 일이오.”라고 하였다. 드디어 동침하여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내었다. 이에 드디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낼 때, 뱃사공(篙工楫師) 15인에게 각각 쌀 10섬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이) 수레를 돌릴 때(廻鑾), 왕후와 한 수레를 탔으며, 따르는 신하와 부부도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수레를 탔으며,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漢肆雜物)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때를 알리는 물시계(銅壺)가 오정을 가리키려고 했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게하고, 따라온 신하 부부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에게는 빈 집 두 채를 주어 나누어 들게 하였으며, 나머지 종자(從者)들은 이십여 칸 되는 빈관(賓舘) 한 채에 사람 수를 적당히 배정하여 안치하고, 매일 풍부한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들의 싣고 온 진귀한 물품들은 내고(內庫)에 두어 왕후가 사시(四時)로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구간들은 모두 일반 관료의 우두머리이지만,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 미천한 촌사람들(宵人野夫)의 이름이요 고귀한 직위를 가진 사람들의 칭호가 될 수 없으니, 만일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고 하였다. 마침내 아도(我刀)를 아궁(我躬)으로, 여도(汝刀)를 여해(汝諧)로, 피도(彼刀)를 피장(彼藏)으로, 오도(五刀)을 오상(五常)으로 고쳤다.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냥 두고 아래 글자만 고치어 유공(留功)과 유덕(留德)으로 하고, 신천(神天)은 신도(神道)로, 오천(五天)은 오능(五能)으로 고쳤다. 신귀(神鬼)는 음은 그대로 두고 그 훈을 고쳐 신귀(臣貴)라 하였다. 그리고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하여 각간(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의 등급을 두고 그 아래의 관료들은 주(周)와 한(漢)의 제도로 나누어 정하였으니, 이것이 옛 것을 고쳐 새것을 세우고(革古鼎新)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도리이다. 이로부터 나라와 집안이 질서가 있게 되고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니, 그 교화는 엄숙치 아니하여도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아니하여도 잘 다스려졌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살게 되었으니 마치 하늘이 땅을, 해가 달을, 양이 음을 가진 것과 같았으니, 그 공은 도산씨(塗山氏)가 하(夏)를 돕고 도당씨의 딸들(唐媛)이 요(姚)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해마다 용맹한 아들을 나을 길조의 꿈이 있어,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189) 3월 1일에 왕후가 돌아가니, 나이가 157세였다. 국인(國人)은 마치 땅이 무너진 것과 같이 통탄하면서 구지(龜旨)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왕후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하여, 처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며, 진홍빛 깃발을 달고 들어왔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하였다. 함께 왔던 신하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가락국(駕洛國)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딸 둘씩을 낳았으며, 부부가 모두 일이 년을 지나 세상을 떠났다. 그 나머지 노비들은 온 지 칠팔년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다만 고향(故土)을 그리는 슬픔을 안고서 모두 고향 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죽었다. 그들이 살던 빈관(賓舘)은 한 사람도 없이 텅 비었다. 왕은 늘 외로운 베게에 의지하여 비탄에 잠겨 있다가, 10년(二五歲)후인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23일에 돌아가니, 나이가 158세였다. 나라의 사람들이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 슬퍼하였으니, 그 비통함은 왕후가 돌아가던 날보다 더하였다. 드디어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1장, 둘레가 3백보였는데, 이로서 장사지냈으며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불렀다. 왕위를 물려받은 거등왕(居登王)부터 9대손(九代孫) 구충(仇衝)에 이르기까지 제향을 이 사당에서 행하고, 모름지기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풍성하고 정결한 제사음식을 올렸는데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