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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사

기본정보

금관가야(金官, 김해)에 있었던 절

일반정보

금관가야(金官, 김해)에 세워졌던 절로 수로왕비 허황옥이 서역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파사석탑이 이곳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탑상4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조에 의하면 금관(金官)에 있는 호계사(虎溪寺)에 파사석탑(婆娑石塔)이 있었는데, 이 탑은 금관국(金官國) 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의 비 허황옥(許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48)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라고 한다. 이후 가야 제 8대 질지왕(銍知王) 2년(452)에 왕후사를 세웠다는 내용도 함께 전하고 있다.

그런데 본 기사 외에는 호계사와 관련된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유사한 내용을 전하는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에는 허황옥이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과 관련된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질지왕 2년(452)에 수로왕과 허황옥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왕후사(王后寺)를 세웠다는 내용만 확인될 뿐이다.

일단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본 기사의 내용을 신뢰한다면 『삼국유사』 찬술 당시 호계사에 파사석탑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허황후가 탑을 가지고 온 뒤 어떻게 보관이 되었는지의 내력도 알 수 없다. 다만, 금관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사찰인 왕후사에 탑이 모셔졌다가, 후에 호계사로 옮겨졌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는 있겠지만 이것도 명확히 입증할 수는 없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경상도(慶尙道)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산천조에는 “호계(虎溪) [부성(府城) 복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분산(盆山)에서 나오며, 남쪽으로 강창포(江倉浦)에 들어간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 기사를 통해서 현재 김해시의 중심에서 약간 북쪽에 치우쳐 있는 김해읍성(金海邑城) 내에 호계라는 지명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 고종 31년(1894)에 간행된 『영남읍지(嶺南邑誌)』 14책 김해읍지(金海邑誌) 고적조에는 파사석탑이 호계(虎溪)변에 있다는 내용도 확인된다. 이러한 점에서 파사석탑이 있었다는 “호계사”와 “호계”라는 지명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호계사라는 명칭은 『삼국유사』에서만 확인되고, 조선시대의 전적에 언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늦어도 조선전기에는 호계사가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강종훈, 2004)

참고문헌

강종훈, 2004, 「한국사적(고려시대 이전) 소재 가야사 사료」『譯註 加耶史史料集成』1-高麗以前篇,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開闢之後 此地未有邦國之號 亦無君臣之稱 越有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等九干者 是酋長 領總百姓 凡一百戶 七萬五千人 多以自都山野 鑿井而飮 耕田而食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 所居北龜旨[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 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爲君后 爲玆故降矣 爾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忻而歌舞 未幾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著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裹>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尋還 <裹>著抱持而歸我刀家 寘榻上 其衆各散 過浹辰 翌日平明 衆庶復相聚集開合 而六卵化爲童子 容貌甚偉 仍坐於床 衆庶拜賀 盡恭敬止 日日而大 踰十餘晨昏 身長九尺則殷之天乙 顔如龍焉則漢之高祖 眉之八彩則有唐之<堯> 眼之重瞳則有虞之舜 其於月望日卽位也 始現故諱首露 或云首陵[首陵是崩後諡也]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爲五伽耶主 東以黃山江 西南以濸海 西北以地理山東 北以伽耶山 南而爲國尾 俾創假宮而入御 但要質儉 茅茨不剪 土階三尺 二年癸卯春正月 王若曰 朕欲定置京都 仍駕幸假宮之南新畓坪[是古來閑田 新耕作故云也 畓乃俗文也]四望山嶽 顧左右曰 此地狹小如蓼葉 然而秀異 可爲十六羅漢住地 何況自一成三 自三成七 七聖住地 固合于是 托土開疆 終然允臧歟 築置一千五百步周廻羅城 宮禁殿宇及諸有司屋宇 <武>庫倉廩之地 事訖還宮 徧徵國內丁壯人夫工匠 以其月二十日資始金<湯> <曁>三月十日役畢 其宮闕屋舍 俟農隙而作之 經始于厥年十月 逮甲辰二月而成 涓吉辰御新宮 理萬機而懃庶務 忽有琓夏國含達王之夫人妊娠 彌月生卵 卵化爲人 名曰脫解 從海而來 身長三尺 頭圓一尺 悅焉詣闕 語於王云 我欲奪王之位 故來耳 王答曰 天命我俾卽于位 將令安中國而綏下民 不敢違天之命以與之位 又不敢以吾國吾民 付囑於汝 解云 若爾可爭其術 王曰 可也 俄頃之間 解化爲鷹 王化爲鷲 又解化爲雀 王化爲鸇 于此際也 寸陰未移 解還本身 王亦復然 解乃伏膺曰 僕也適於角術之場 鷹之(於)鷲 雀之於鸇 獲免焉 此蓋聖人惡殺之仁而然乎 僕之與王爭位良難 便拜辭而出 到 麟郊外渡頭 將中朝來泊之<水>道而行 王竊恐滯留謀亂 急發舟師五百艘而追之 解奔入雞林地界 舟師盡還 事記所載 多異與新羅 屬建<武>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 九干等朝謁之次 獻言曰 大王降靈已來 好仇未得 請臣等所有處女絶好者 選入宮闈 俾爲伉儷 王曰 朕降于玆天命也 配朕而作后 亦天之命 卿等無慮 遂命留天干押輕舟 持駿馬 到望山島立待 申命神鬼干就乘岾[望山島 京南島嶼也 乘岾 輦下國也]忽自海之西南隅 掛緋帆 張茜旗 而指乎北 留天等先擧火於島上 則競渡下陸 爭奔而來 神鬼望之 走入闕 奏之 上聞欣欣 尋遣九干等 整蘭橈 揚桂楫 而迎之 旋欲陪入內 王后乃曰 我與(爾)等素昧平生 焉敢輕忽相隨而去 留天等返 達后之語 王然之 率有司動蹕 從闕下西南六十步許地 山邊設幔殿祗候 王后於山外別浦津頭 維舟登陸 憩於高嶠 解所著綾<袴>爲贄 遺于山靈也 其地侍從媵臣二員 名曰申輔趙匡 其妻二人 號慕貞慕良 或臧獲幷計二十餘口 所齎錦繡綾羅 衣裳疋段 金銀珠玉 瓊玖服玩器 不可勝記 王后漸近行在 上出迎之 同入帷宮 媵臣已下衆人 就階下而見之卽退 上命有司 引媵臣夫妻曰 人各以一房安置 已下臧獲各一房五六人安置 給之以蘭液蕙醑 寢之以文茵彩薦 至於衣服疋段寶貨之類 多以軍夫遴集而護之 於是 王與后共在御國寢 從容語王曰 妾是阿踰陁國公主也 姓許 名黃玉 年二八矣 在本國時 今年五月中 父王與皇后顧妾而語曰 爺孃一昨夢中 同見皇天上帝 謂曰 駕洛國元君首露者 天所降而俾御大寶 乃神乃聖 惟其人乎 且以新莅家邦 未定匹偶 卿等<須>遣公主而配之 言訖升天 形開之後 上帝之言 其猶在耳 爾於此而忽辭親 向彼乎往矣 妾也浮海遐尋於蒸棗 移天夐赴於蟠桃 螓首敢叨 龍顔是近 王答曰 朕生而頗聖 先知公主自遠而屆 下臣有納妃之請 不敢從焉 今也淑質自臻 眇躬多幸 遂以合歡 兩過淸宵 一經白晝 於是 遂還來船 篙工楫師共十有五人 各賜粮粳米十碩 布三十疋 令歸本國 八月一日 廻鑾 與后同輦 媵臣夫妻齊鏕竝駕 其漢肆雜物 <咸>使乘載 徐徐入闕 時銅壺欲午 王后爰處中宮 勑賜媵臣夫妻私屬空閑二室分入 餘外從者以賓舘一坐二十餘間 酌定人數 區別安置 日給豊羡 其所載珍物 藏於內庫 以爲王后四時之費 一日 上語臣下曰 九干等俱爲庶僚之長 其位與名皆是宵人野夫之號 頓非簪履職位之稱 儻化外傳聞 必有嗤笑之恥 遂改我刀爲我躬 汝刀爲汝諧 彼刀爲彼藏 五<刀>爲五常 留水留天之名 不動上字 改下字留功留德 (神天)改爲神道 五天改爲五能 神鬼之音不易 改訓爲臣貴 取雞林職儀 置角干阿叱干級干之秩 其下官僚 以周判漢儀而分定之 斯所以革古鼎新 設官分職之道歟 於是乎 理國齊家 愛民如子 其敎不肅而威 其政不嚴而理 況與王后而居也 比如天之有地 日之有月 陽之有陰 其功也塗山翼夏 唐<媛>興<姚> 頻年夢有得熊羆之兆 誕生太子居登公 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一日后崩 壽一百五十七 國人如嘆坤崩 葬於龜旨東北塢 遂欲(不)忘子愛下民之惠 因號初來下纜渡頭村曰主浦村 解綾<袴>高岡曰綾峴 茜旗行入海涯曰旗出邊 媵臣泉府卿申輔宗正監趙匡等 到國三十年後 各産二女焉 夫與婦踰一二年而皆<抛>信也 其餘臧獲之輩 自來七八年間 未有玆子生 唯抱懷土之悲 皆首丘而沒 所舍賓館 圓其無人 元君乃每歌鰥枕 悲嘆良多 隔二五歲 以獻帝<建>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 而殂落 壽一百五十八歲矣 國中之人 若亡天只 悲慟甚於后崩之日 遂於闕之艮方平地 造立殯宮 高一丈 周三百步 而葬之 號首陵王廟也 自嗣子居登王 洎九代孫仇衝之享是廟 <須>以每歲孟春三之日七之日 仲夏重五之日 仲秋初五之日十五之日 豊潔之奠 相繼不絶 洎新羅第三十王法敏龍朔元年辛酉三月日 有制曰 朕是伽耶國元君九代孫仇衝王之降于當國也 所率來子世宗之子率友公之子庶云匝干之女文明皇后寔生我者 玆故元君於幼冲人 乃爲十五代始祖也 所御國者已曾敗 所葬廟者今尙存 合于宗祧 續乃祀事 仍遣使於黍離之趾□近廟上上田三十頃 爲供營之資 號稱王位田 付屬本土 王之十七代孫賡世級干 祗禀朝旨 主掌厥田 每歲時釀醪醴 設以餠飯茶菓庶羞等奠 年年不墜其祭日 不失居登王之所定年內五日也 芬苾孝祀 於是乎在於我 自居登王卽位己卯年置便房 降及仇衝朝末 三百三十載之中 享廟禮曲 永無違者 其乃仇衝失位去國 逮龍朔元年辛酉 六十年之間 享是廟禮 或闕如也 美矣哉 文武王[法敏王諡也] 先奉尊祖 孝乎惟孝 繼泯絶之祀 復行之也 新羅季末 有忠至匝干者 攻取金官高城 而爲城主將軍 爰有英規阿干 假威於將軍 奪廟享而淫祀 當端午而致告祠 堂梁無故折墜 因覆壓而死焉 於是將軍自謂 宿因多幸 辱爲聖王所御國城之奠 宜我畵其眞影 香燈供之 以酬玄恩 遂以鮫絹三尺 摸出眞影 安於壁上 旦夕膏炷 瞻仰虔至 才三日 影之二目 流下血淚 而貯於地上 幾一斗矣 將軍大懼 捧持其眞 就廟而焚之 卽召王之眞孫圭林而謂曰 昨有不祥事 一何重疊 是必廟之威靈 震怒余之圖畵而供養不孫 英規旣死 余甚怖畏 影已燒矣 必受陰誅 卿是王之眞孫 信合依舊以祭之 圭林繼世奠酹 年及八十八歲而卒 其子間元卿續而克禋 端午日謁廟之祭 英規之子俊必又發狂 來詣廟 俾徹間元之奠 以已奠陳享 三獻未終 得暴疾 歸家而斃 然古人有言 淫祀無福 反受其殃 前有英規 後有<俊>必 父子之謂乎 又有賊徒 謂廟中多有金玉 將來盜焉 初之來也 有躬擐甲冑 張弓挾矢 猛士一人從廟中出 四面<雨>射 中殺七八人 賊徒奔走 數日再來 有大蟒長三十餘尺 眼光如電 自廟旁出 咬殺八九人 粗得完免者 皆僵仆而散 故知陵園表裏 必有神物護之 自<建>安四年己卯始造 逮今上御<國>三十一載大康二年丙辰 凡八百七十八年 所封美土 不騫不崩 所植佳木 不枯不朽 況所排列萬蘊玉之片片 亦不頹<坼> 由是觀之 辛替否曰 自古迄今 豈有不<亡>之國不破之墳 唯此駕洛國之昔曾亡 則替否之言有徵矣 首露廟之不毁 則替否之言未足信也 此中更有戱樂思慕之事 每以七月二十九日 土人吏卒陟乘岾 設帷幕 酒食歡呼 而東西送目 壯健人夫 分類以左右之 自望山島 駮蹄駸駸 而競湊於陸 鷁首泛泛 而相推於水 北指古浦而爭趨 蓋此昔留天神鬼等 望后之來 急促告君之遺迹也 國亡之後 代代稱號不一 新羅第三十一政明王卽位開耀元年辛巳 號爲金官京 置太守 後二百五十九年 屬我太祖統合之後 代代爲臨海縣 置排岸使 四十八年也 次爲臨海郡 或爲金海府 置都護府 二十七年也 又置防禦使 六十四年也 淳化二年 金海府量田使中大夫趙文善申省狀稱 首露陵王廟屬田結數多也 宜以十五結仍舊貫 其餘分折於府之役丁 所司傳狀奏聞 時廟朝宣旨曰 天所降卵 化爲聖君 居位而延齡 則一百五十八年也 自彼三皇而下 鮮克比肩者歟 崩後自先代 俾屬廟之壟畝 而今減除 良堪疑懼 而不允 使又申省 朝廷然之 半不動於陵廟中 半分給於鄕人之丁也 節使[量田使<稱>也]受朝旨 乃以半屬於陵園 半以支給於府之徭役戶丁也 幾臨事畢 而甚勞倦 忽一夕夢 見七八介鬼神 執縲紲握刀劒而至云 儞有大憝 故加斬戮 其使以謂受刑而慟楚 驚懼而覺 仍有疾瘵 勿令人知之 宵遁而行 其病不間 渡關而死 是故量田都帳 不著印也 後人奉使來 審檢厥田 <十>一結十二負九束也 不足者三結八十七負一束矣 乃推鞠斜入處 報告內外官 勅理足支給焉 又有古今所嘆息者 元君八代孫金銍王 克勤爲政 又切崇眞 爲世祖母許皇后 奉資冥福 以元嘉二十九年壬辰 於元君與皇后合婚之地創寺 額曰王后寺 遣使審量近側平田十結 以爲供億三寶之費 自有是寺五百(年)後 置長遊寺 所納田柴 幷三百結 於是右寺三<綱> 以王后寺在寺柴地東南標內 罷寺爲莊 作秋收冬藏之場 秣馬養牛之廐 悲夫 世祖已下九代孫曆數 委錄于下 銘曰 元胎肇啓 利眼初明 人倫雖誕 君位未成 中朝累世 東國分京 雞林先定 駕洛後營 自無銓宰 誰察民氓 遂玆玄造 顧彼蒼生 用授符命 特遣精靈 山中降卵 霧裏藏<形> 內猶漠漠 外亦冥冥 望如無象 聞乃有聲 群歌而奏 衆舞而呈 七日而後 一時所<寧> 風吹雲卷 空碧天靑 下六圓卵 垂一紫纓 殊方異土 比屋連甍 觀者如堵 覩者如羹 五歸各邑 一在玆城 同時同蹟 如弟如兄 實天生德 爲世作程 寶位初陟 寰區欲淸 華構徵古 土階尙平 萬機始勉 庶政施行 無偏無儻 惟一惟精 行者讓路 農者讓耕 四方奠枕 萬姓迓衡 俄晞薤露 靡保椿齡 乾坤變氣 朝野痛情 金相其躅 玉振其聲 來苗不絶 薦藻惟馨 日月雖逝 規儀不傾
居登王 父首露王 母許王后 <建>安四年己卯三月十三日卽位 治三十九年 嘉平五年癸酉九月十七日崩 王妃泉府卿申輔女慕貞 生太子麻品 開皇曆云 姓金氏 蓋國世祖從金卵而生 故以金爲姓爾
麻品王 一云馬品 金氏 嘉平五年癸酉卽位 治三十九年 永平元年辛亥一月二十九日崩 王妃宗正監趙匡孫女好仇 生太子居叱彌
居叱彌王 一云今勿 金氏 永平元年卽位 治五十六年 永和二年丙午七月八日崩 王妃阿躬阿干孫女阿志 生王子伊品
伊尸品王 金氏 永和二年卽位 治六十二年 義熙三年丁未四月十日崩 王妃司農卿克忠女貞信 生王子坐知
坐知王 一云金叱 義熙三年卽位 娶傭女以女黨爲官 國內擾亂 雞林國以謀欲伐 有一臣名朴元道 諫曰 遺草閱閱 亦含羽 況乃人乎 天亡地陷 人保何基 又卜士筮得解卦 其辭曰 解而<拇> 朋至斯孚 君鑑易卦乎 王謝曰 可 擯傭女 貶於荷山島 改行其政 長御安民也 治十五年 永初二年辛酉五月十二日崩 王妃道寧大阿干女福壽 生子吹希

吹希王 一云叱嘉 金氏 永初二年卽位 治三十一年 元嘉二十八年辛卯二月三日崩 王妃進思角干女仁德 生王子銍知
銍知王 一云金銍王 元嘉二十八年卽位 明年 爲世祖許黃玉<王>后 奉資冥福 於初與世祖合御之地創寺 曰王后寺 納田十結充之 治四十二年 永明十年壬申十月四日崩 王妃金相沙干女邦媛 生王子鉗知
鉗知王 一云金鉗王 永明十年卽位 治三十年 正光二年辛丑四月七日崩 王妃出忠角干女淑 生王子仇衡
仇衡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保定二年壬午九月 新羅第二十四君眞興王 興兵薄伐 王使親軍卒 彼衆我寡 不堪對戰也 仍遣同氣脫知爾叱今 留在於國 王子上孫卒支公等 降入新羅 王妃分叱水尒叱女桂花 生三子 一世宗角干 二茂刀角干 三茂得角干 開皇錄云 梁中大通四年壬子 降于新羅 議曰 案三國史 仇衡以梁中大通四年壬子 納土投羅 則計自首露初卽位東漢建武十八年壬寅 至仇衡末壬子 得四百九十年矣 若以此記考之 納土在元魏保定二年壬午 則更三十年 摠五百二十年矣 今兩存之

가락국기[문종조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천지가 개벽한 후 이 땅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윽고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9간(九干)이 있어 추장(酋長)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니 무릇 1백호에 7만 5천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산과 들에 자리 잡고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경작하여 먹었다. 후한(後漢)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42) 임인(壬寅) 3월 계욕일(禊欲日)에 그들이 사는 곳 북쪽의 구지(龜旨)[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마치 거북이(十朋之龜)가 엎드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무엇을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났다. 무리 이삼백 인이 이곳에 모였다. 사람의 소리와 같은 것이 나는데 그 형상은 감추고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여기에 사람이 없느냐?”라고 하였다. 구간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을 무엇이라 하느냐?”고 하였다. 대답하길, “구지(龜旨)입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시기를 이곳을 다스려서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 하셨는데, 이러한 이유로 내려온 것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에서 흙을 파서 노래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서 뛰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구간 등이 그 말과 같이 모두 기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자색(紫色)의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아있었는데,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있었다. 열어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무리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서 몸을 펴서 백번 절하였다. 얼마 있다가 다시 싸가지고 아도(我刀)의 집으로 돌아와 탁자(榻) 위에 두고 각기 흩어졌다. 열이틀(浹辰)이 지나고 다음날 동이 틀 무렵(平明)에 무리들이 다시 모여 상자를 여니, 여섯 개의 알이 변화하여 사내아이(童子)가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훌륭하였다. 이윽고 평상에 앉히고 무리들이 하례의 절을 올리고 극진히 공경하였다. 나날이 자라서 십 여일이 지나자 신장이 9척이나 되니 은(殷)의 천을(天乙)을 닮았고, 얼굴은 용과 같으니 한(漢)의 고조(高祖)를 닮았으며, 눈썹의 팔채(八彩)는 당(唐)의 요(堯)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虞)의 순(舜)과 같았다. 그 달 보름에 즉위(卽位)하였다. 처음으로 나왔으므로 이름(諱)을 수로(首露)라 하였는데, 혹은 수릉(首陵)이라 하였다[수릉은 죽은 뒤의 시호(諡號)이다] 나라의 이름은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고 하였는데, 곧 육가야(六伽耶)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 오가야(五伽耶)의 임금(主)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으로는 창해(滄海), 서북쪽으로는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으로는 가야산(伽耶山)을 경계(境界)로 하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임시궁궐(假宮)을 짓게 하여 들어가 살았는데 질박하고 검소하려 하여 (지붕의) 이엉(茅茨)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된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수로왕) 2년 계묘(癸卯, 43) 봄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짐이 도읍을 정하고자 한다.”하고, 곧 임시로 지은 궁궐(假宮)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이는 오래된 한전(閑田)이었는데, 새로 경작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답(畓)은 속문(俗文)이다.]에 행차하여 사방으로 산악(山岳)을 바라보고, 좌우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이 땅은 협소하기가 여귀 잎사귀(蓼葉)와 같으나, 수려하고 기이하니 16나한(十六羅漢)이 머물 곳이 될 만하다. 하물며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셋에서 칠을 이루니, 칠성(七聖)이 머무를 곳은 진실로 이곳이 마땅하다. 강토(疆土)를 개척하면 장차 좋은 곳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천 오백보(步) 둘레의 나성(羅城)과 궁궐(宮闕)의 전각과 여러 관서의 건물, 무기고(武庫)와 창고(倉廩)를 건축할 땅을 마련하였다. 일을 마치고 궁궐로 돌아왔는데, 국내(國內)의 장정 인부들과 공장(工匠)들을 두루 징발하여, 그 달 20일에 견고한 성곽(金城湯池)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3월 10일에 이르러 공사를 마쳤다. 궁궐과 옥사(屋舍)는 농한기를 기다렸다가 지었는데, 그 해 10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갑진년(甲辰, 44) 2월에 완공하였다. 좋은 날을 받아 왕이 새 궁궐에 들어가 모든 정사를 처리하고 서무에 힘썼다. 이때에 홀연히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임신하였는데, 달이 차서 알을 낳았고,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니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바다를 건너왔는데, 신장이 3척이고 머리의 둘레가 1척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궁궐을 찾아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하여 왔다.”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하늘이 나를 명하여 왕위에 올라 장차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라고 했는데, 감히 천명을 어기어 왕의 자리를 주지 못할 것이며, 또한 우리나라와 우리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고 하였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을 겨루어 보겠느냐.”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시 후 탈해가 매로 변하니, 왕은 독수리로 변하였다. 탈해가 참새로 변하니 왕은 새매로 변하였는데, 그 사이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래의 모습으로 변하자, 왕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탈해가 이에 항복하며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다투는 데 있어 독수리 앞의 매, 새매 앞의 참새가 되었으나 (죽음을) 면한 것은 대개 성인이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덕 소치이며, 내가 왕과 더불어 자리를 다툼이 실로 어렵다.”하고, 곧바로 작별인사를 하고 나가서, 교외에 있는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中國)의 배가 와서 닿은 물길을 따라 떠나려고 하였다. 왕은 그가 체류하여 난리를 꾀할까 염려하여 급히 배(舟師) 5백척을 보내어 쫓으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경계로 달아나므로 배가 모두 돌아왔다.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48) 7월 27일에 구간 들이 조알(朝謁)할 때에 아뢰어 말하기를,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래로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臣)들의 딸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뽑아 궁중에 드려 배필로 삼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다. 나의 배필로 왕후가 되는 것도 또한 하늘의 명령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輕舟)와 좋은 말(駿馬)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또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다. 승점(乘岾)은 수레 아래(輦下)의 나라(國)이다.]으로 가게 하였다. 홀연히 바다 서남쪽 모퉁이로 부터 붉은 돛을 달고 진홍빛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을 향하여 오고 있었다. 유천간(留天) 등이 먼저 섬에 불을 피우고, 곧 물을 건너 육지에 내려와 앞 다투어 달려왔다. 신귀간(神鬼)이 이것을 바라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말하였다. 왕이 듣고 기뻐하며, 이어 구간 등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노(蘭橈)와 계수나무로 만든 노(桂楫)를 갖추어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에) 왕후(王后)가 말하기를, “나와 너희들은 평생 알지 못한 터인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겠느냐.”고 하였다. 유천간(留天) 등이 돌아와 왕후의 말을 전하였다. 왕은 그렇다고 여겨 여러 관리들을 거느리고 궁궐 서남쪽 60보쯤 되는 산의 주변(山邊)에 가서 장막으로 된 임시 궁궐(幔殿)을 설치하고 왕후를 기다렸다. 왕후는 산 너머의 별포(別浦)의 나루터에서 배를 매어두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며,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그 나라로부터 시종(侍從)하여 온 신하(媵臣) 2명이 있었는데,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라고 하였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은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라 불렀다. 혹은 노비가 도합 20여명 이었고, 가지고 온 각종 비단(錦繡綾羅)과 의복(衣裳疋段), 금․은․주옥과 각종 구슬과 보배로운 기물을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왕후가 점차 왕이 있는 행재소(行在所)에 가까이 오자, 왕이 나아가 맞이하여 함께 장막으로 들어왔다. 따라온 신하와 그 아래 무리들은 계단 아래에서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은 관원(有司)에게 명하여, 따라온 신하 부부들을 인도하게 하며 말하기를, “사람마다 각방에 두고, 그 이하 노비는 한 방에 대여섯 명씩 안치시키며, 난초로 만든 마실 것(蘭液)과 혜초로 만든 술(蕙醑)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하며, 의복과 비단과 보물들까지 주고 많은 군인들을 내어 보호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때에 왕과 왕후가 침전에 들었는데, (왕후가) 왕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저는 본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許氏)고, 이름은 황옥(黃玉)이고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중에 부왕(父王)이 황후(皇后)와 더불어 말씀하기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제 밤 꿈에 똑같이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뵈었는데, (황천상제가) 가락국(駕洛國) 원군(元君) 수로(首露)는 하늘에서 내려 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성하다고 하는 것은 오직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리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잠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 귀에 맴돌았다. 너는 이제 곧 우리와 작별하고 그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다를 건너서 멀리 증조(蒸棗)를 찾아가기도 하고 방향을 바꾸어(移天) 아득히 반도(蟠桃)로도 가보았습니다. 이제 보잘것없는 얼굴로 외람되게 용안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짐은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신하들의 왕비를 맞이하라는 청을 듣지 않았다.

지금 현숙(賢淑)한 그대가 저절로 왔으니 이 몸에게는 다행한 일이오.”라고 하였다. 드디어 동침하여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내었다. 이에 드디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낼 때, 뱃사공(篙工楫師) 15인에게 각각 쌀 10섬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이) 수레를 돌릴 때(廻鑾), 왕후와 한 수레를 탔으며, 따르는 신하와 부부도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수레를 탔으며,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漢肆雜物)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때를 알리는 물시계(銅壺)가 오정을 가리키려고 했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게하고, 따라온 신하 부부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에게는 빈 집 두 채를 주어 나누어 들게 하였으며, 나머지 종자(從者)들은 이십여 칸 되는 빈관(賓舘) 한 채에 사람 수를 적당히 배정하여 안치하고, 매일 풍부한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들의 싣고 온 진귀한 물품들은 내고(內庫)에 두어 왕후가 사시(四時)로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구간들은 모두 일반 관료의 우두머리이지만,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 미천한 촌사람들(宵人野夫)의 이름이요 고귀한 직위를 가진 사람들의 칭호가 될 수 없으니, 만일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고 하였다. 마침내 아도(我刀)를 아궁(我躬)으로, 여도(汝刀)를 여해(汝諧)로, 피도(彼刀)를 피장(彼藏)으로, 오도(五刀)을 오상(五常)으로 고쳤다.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냥 두고 아래 글자만 고치어 유공(留功)과 유덕(留德)으로 하고, 신천(神天)은 신도(神道)로, 오천(五天)은 오능(五能)으로 고쳤다. 신귀(神鬼)는 음은 그대로 두고 그 훈을 고쳐 신귀(臣貴)라 하였다. 그리고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하여 각간(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의 등급을 두고 그 아래의 관료들은 주(周)와 한(漢)의 제도로 나누어 정하였으니, 이것이 옛 것을 고쳐 새것을 세우고(革古鼎新)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도리이다. 이로부터 나라와 집안이 질서가 있게 되고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니, 그 교화는 엄숙치 아니하여도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아니하여도 잘 다스려졌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살게 되었으니 마치 하늘이 땅을, 해가 달을, 양이 음을 가진 것과 같았으니, 그 공은 도산씨(塗山氏)가 하(夏)를 돕고 도당씨의 딸들(唐媛)이 요(姚)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해마다 용맹한 아들을 나을 길조의 꿈이 있어,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189) 3월 1일에 왕후가 돌아가니, 나이가 157세였다. 국인(國人)은 마치 땅이 무너진 것과 같이 통탄하면서 구지(龜旨)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왕후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하여, 처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며, 진홍빛 깃발을 달고 들어왔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하였다. 함께 왔던 신하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가락국(駕洛國)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딸 둘씩을 낳았으며, 부부가 모두 일이 년을 지나 세상을 떠났다. 그 나머지 노비들은 온 지 칠팔년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다만 고향(故土)을 그리는 슬픔을 안고서 모두 고향 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죽었다. 그들이 살던 빈관(賓舘)은 한 사람도 없이 텅 비었다. 왕은 늘 외로운 베게에 의지하여 비탄에 잠겨 있다가, 10년(二五歲)후인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23일에 돌아가니, 나이가 158세였다. 나라의 사람들이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 슬퍼하였으니, 그 비통함은 왕후가 돌아가던 날보다 더하였다. 드디어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1장, 둘레가 3백보였는데, 이로서 장사지냈으며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불렀다. 왕위를 물려받은 거등왕(居登王)부터 9대손(九代孫) 구충(仇衝)에 이르기까지 제향을 이 사당에서 행하고, 모름지기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풍성하고 정결한 제사음식을 올렸는데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신라 제30대왕 법민(法敏)이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 3월 □일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가야국(伽耶國) 원군(元君) 9대손 구충왕(仇衝王)이 우리나라(本國)에 항복할 때에 거느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인 서운(庶云) 잡간(匝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가 곧 나(幼冲人)를 낳으신 분이므로, 원군(元君)은 나에게 15대 시조가 되는 것이다. 다스리던 나라는 이미 없어졌으나 그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宗祧)에 합하여 계속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사자를 옛 터에 보내어 사당 근처에 있는 상상전(上上田) 30경(頃)을 주어서 제사의 재원으로 삼게 하고, 왕위전(王位田)이라고 이름하여 사당 소유의 땅에 붙였다. 왕의 17세손 갱세(賡世) 급간(級干)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왕위전을 관장하여, 때에 맞추어 술을 빚고, 떡, 밥, 다과 등의 제물을 차리기를 해마다 어김이 없었다. 제사일은 거등왕이 제정한 1년에 다섯 날을 그대로 지켰는데, 정성스러운 제사가 이제는 우리의 책임이 되었다. 그 제사는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己卯年)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이후로 구충왕(仇衝)에 이르기까지 330년 동안 제사를 거행함에는 한 번도 어김이 없었다. 그러나 구충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까지 60년 동안에 이 사당에 제향이 간혹 빠짐이 있기도 하였다. 아름답다! 문무왕(文武王)[법민왕(法敏王)의 시호이다.]이여, 먼저 조상을 높이 받들 지극한 효성으로 끊어졌던 제사를 이어서 다시 시행하게 하였다. 신라 말에 충지(忠至) 잡간(匝干)이라는 자가 있어 금관(金官)의 옛 성을 쳐서 빼앗고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이때에 영규(英規) 아간(阿干)이라는 자가 장군(將軍)의 위세를 빌려 사당(廟享)을 빼앗아 음사(淫祀)를 지내더니 단오(端午)를 맞이하여 고사(告祀)를 지내는데 사당의 대들보가 이유 없이 부러져 떨어지면서 밑에 깔려 죽고 말았다. 이에 장군이 스스로 말하기를, “묵은 인연(宿因)으로 다행히 성스러운 왕(聖王)께서 다스린 국성(國城)에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마땅히 내가 그 영정(影幀)을 그려 모시고, 향을 피우고 등을 밝혀 그 은혜를 갚고자 한다.”고 하였다. 드디어 3척의 비단에 진영을 그려서 벽에 봉안(奉安)하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밝히고 정성을 다해 받들었다. 그런데 겨우 3일 만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바닥에 거의 한 말(斗)이나 괴이었다. 장군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모시고 사당으로 가서 불살랐다. 곧 왕의 직계자손(眞孫)인 규림(圭林)을 불러 말하기를, “어제 불상사가 있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거듭 일어나는가. 이는 반드시 사당에 모신 영혼(威靈)이 내가 영정을 그려놓고 공양이 불손한 것에 진노한 것이다. 영규(英規)가 죽었으니 내가 매우 두려운데, 영정을 태웠으니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직계자손이니 꼭 종전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진실로 합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규림(圭林)이 대를 이어서 제사를 모시다가 나이 88세에 죽으니,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계속하여 제사를 지냈다. 단오날에 사당을 참배하고 제사를 지내는데 영규(英規)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발광하여 사당에 와서 간원(間元)의 제물(祭需)을 걷어치우고 자기의 제물을 베푸니, 세 번째 술잔을 다 바치기도 전에 갑자기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 죽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의 말에 음사(淫祀)는 복을 받지 못하며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앞서 영규(英規)와 뒤의 준필(俊必) (이들) 아버지와 아들을 두고 말한 것이다. 또 도적들이 사당 내에 보물들(金玉)이 많이 있다 하여, 장차 와서 도둑질을 하려고 하였다. 처음 (그들이) 왔을 때 갑옷과 투구를 두른 채 화살을 끼워 활을 당긴 용맹한 무사 한 사람이 사당으로부터 나와 사방으로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 칠팔 명의 도적을 맞추어 죽이니, 도적들이 달아났다. 수일 만에 다시 오니, 길이가 30여척이나 되는 큰 이무기가 눈을 번갯불처럼 번쩍이면서 사당 옆으로부터 나와 팔구 명을 물어 죽였는데, 겨우 (죽음을) 면한 사람도 모두 엎더지고 넘어지면서 달아났다. 그러므로 능원 안팎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호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에 이 사당이 처음 세운 뒤로부터 지금의 임금이 나라를 다스린지 31년째가 되는 대강(大康) 2년 병진(丙辰, 1076)까지 무릇 878년 동안 무덤을 덮었던 좋은 흙(美土)이 조금도 허물어지지 않았고, 무덤주위에 심은 아름다운 나무(佳木)들도 전혀 마르지도 썩지도 않았으니, 더욱이 배열된 수만 가지 보물들도 역시 상하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이로써 본다면 신체부(辛替否)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망하지 아니한 나라와 허물어지지 아니한 무덤이 어찌 있으리오.”라고 하였는데, 가락국(駕洛國)은 이미 멸망해 없어졌으니 체부의 말이 옳다고 하겠지만, 수로왕의 사당은 허물어지지 않았으니 체부의 말은 족히 믿을 수가 없다. 이 무렵에 다시 놀고 즐기면서 (수로왕을) 사모(思慕)하는 일이 있으니, 매년 7월29일에 이 지방 사람들과 향리와 군졸들이 승점(乘岾)으로 올라가 장막을 설치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며 환호하였다. 동서로 눈길을 보내며, 장건(壯健)한 인부들을 좌우로 나누어 망산도(望山島)로부터 말을 급히 달려 육지로 달리고, 훌륭한 배(鷁船)는 물 위에 떠서 북쪽으로 옛 포구를 향하여 다투어 나갔다. 대체로 이것은 옛적에 유천(留天)·신귀(神鬼)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임금에게 보고하던 자취이다. 나라가 망한 후 대대로 칭호(稱號)가 하나가 아니더니, 신라 제31대 정명왕(政明王)이 즉위한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681)에 이름을 금관경(金官京)이라 하고 태수(太守)를 두었다. 259년 후 우리 태조(太祖)가 통합(統合)한 후로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를 설치하여 48년에 달하였다. 다음에는 임해군(臨海郡)이라 하고 혹은 김해부(金海府)라 하였는데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한 것이 27년 동안이었다. 또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한 것이 64년에 달하였다. 순화(淳化) 2년(991)에 김해부(金海府) 양전사(量田使)인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의 조사보고(申省狀)에서 말하기를, “수로왕묘(露陵王廟)에 속한 전결(田結) 수가 많으니, 마땅히 15결(結)로써 예전 관행대로 따르게 하고, 나머지는 김해부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해당 관청에서 그 장계를 전하여 임금께 아뢰니, 조정에서 지령(指令)하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성스러운 임금(聖君)으로 화생(化生)하여, 왕위에 있으면서 나이가 158세였다. 저 삼황(三皇) 이후로 이에 견줄 자가 드물 것이다. 돌아가신 후 선대로부터 묘(廟)에 속하게 한 전지(田地)인데, 지금에 줄여 없애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송구스러운 일이므로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양전사(量田使)가 거듭하여 아뢰니 조정(朝廷)에서는 그렇게 여겨서 절반은 능묘(陵廟)에 계속 속하게 하고, 절반은 그 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었다. 절사(節使)[양전사(量田使)를 칭한다.]가 조정의 뜻을 받고, 절반은 능원에 소속케 하고, 절반은 김해부의 요역에 동원되는 호정(戶丁)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양전사가) 몹시 피로하였는데, 갑자기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칠팔 명의 귀신이 밧줄을 잡고 칼을 쥐고 와서 말하기를, “네가 큰 잘못이 있으니, 목을 베어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 양전사가 형벌을 받는다며 아프다고 말하고, 놀라고 두려워서 깨어났다. (이로 인하여) 병이 들어서 남에게 알리지도 않고 밤에 도망하여 갔는데, 그 병은 조금도 낫지 않고 관문(關門)을 지나다가 죽었다. 이러한 까닭에 토지측량대장(量田都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사람들이 사명을 받들고 와서 그 밭을 자세히 조사해 보니 11결(結) 12부(負) 9속(束)뿐이고, 부족한 밭이 3결(結) 87부(負) 1속(束)이었다. 이에 잘못 들어간 부분(斜入處)을 추문(推問)하여 내외의 관서에 보고하고 칙명(勅命)으로 부족분을 지급하도록 처리하였다. 또한 고금에 탄식할 일이 있는데, 원군(元君)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이 정사(政事)에 부지런하고 또 진리를 숭상함(崇眞)이 간절하여 세조(世祖)의 어머니인 허황후(許皇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 452)에 원군과 황후가 혼례를 치룬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는 편액을 달았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 10결(結)을 측량하여 삼보(三寶)에 이바지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이 절이 생긴지 5백년 후에 또 장유사(長遊寺)를 설치하였는데, (그 절에) 납부된 전시(田柴)가 모두 3백결(結)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剛)이 왕후사(王后寺)가 이 절의 시지(柴地)의 동남쪽 표식 내에 있다고 하여, (왕후사를) 폐하고 전장(田莊)을 만들어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기르는 축사를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세조(世祖)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는 아래에 기록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천지가 비로소 개벽하자 해와 달(利眼)이 처음으로 밝았다.
인륜(人倫)이 비록 생겼으나 임금의 지위(君位)는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하였으나, 동국(東國)은 서울(首府)이 나뉘어 있었다.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駕洛)이 후에 경영되었다.
처음에는 다스릴 이(主宰)가 없었으니 누가 백성을 살피랴.
마침내 하늘이 만드시어 창생(蒼生)을 돌보았다.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내셨다.
산중(山中)에 알이 내려오니, 안개가 그 형상을 감추었다.
안으로 밝지 않았으며, 밖도 역시 드러나지 않고 어두웠다.
바라보면 형상은 없으나 들으면 소리가 났다.
군중이 노래를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쳤다.
7일이 지난 후에 일시적으로 편안하였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걷히자, 공중과 하늘이 푸르렀다.
6개의 둥근 알이 자주색 끈에 달려 내려왔다.
다른 지방에 기와집이 즐비하게 되었다.
관람자가 담과 같이 늘어섰고 국처럼 들끓었다.
다섯은 각 읍에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城)에 남았다.
때도 같고 자취도 같아 형제(兄弟)와 같았다.
진실로 하늘이 덕이 있는 사람을 내어 세상을 위하여 규정(規程)을 만들었다.
보위(寶位)에 처음 오르니 천하는 청명(淸明)하였다.
화려한 구조(構造)는 옛 것을 따르고, 흙 계단(土階)은 오히려 평평하였다.
만기(萬機)에 비로소 힘쓰니, 어진 정사(庶政)를 시행(施行)하였다.

치우침과 구차함이 없으니(無偏無黨) 오직 하나에 정성을 썼다.
길을 가는 자는 서로 양보하고, 농사 짖는 자는 경작을 양보하였다.
사방이 안전해 지고 만백성은 치평을 맞이하였다.
부추 잎의 이슬처럼 마르니 장수(椿齡)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몹시 슬퍼하였다.
황금의 바탕(金相) 같은 자취이 옥과 같은 성예를 떨쳤다.
후예가 끊어지지 않으니 제사장(祭奠)이 오직 향기롭다.
세월은 비록 가나 규범과 의식은 기울지 아니하였다.
거등왕(居登王). 아버지는 수로왕(首露王), 어머니는 허왕후(許王后)이다.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13일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39년이었으며,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 9월 17일에 죽었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인 모정(慕貞)이며,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 이르기를,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게 세조(世祖)가 황금 알에서 난 까닭에 성을 김씨로 삼았다.”고 한다.
마품왕(麻品王). 마품(馬品)이라고도 한다. 김씨이다.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에 즉위하여 치세는 39년이며, 영평(永平) 원년 신해(辛亥, 291) 1월 29일에 죽었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인 호구(好仇)인데,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왕(居叱彌王). 금물(今勿)이라고도 한다. 김씨이다. 영평(永平) 원년(291)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56년이며, 영화(永和) 2년 병오(丙午, 346) 7월 8일에 죽었다. 왕비는 아궁(阿躬) 아간(阿干)의 손녀인 아지(阿志)인데, 왕자 이시품(伊尸品)을 낳았다.
이시품왕(伊尸品王). 김씨이다. 영화(永和) 2년(346)에 즉위하여, 치세는 62년이며, 의희(義熙) 3년 정미(丁未, 407) 4월 10월에 죽었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인 정신(貞信)으로, 왕자인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왕(坐知王).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 3년(407)에 즉위하였다. 용녀(傭女)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그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나라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계림국(雞林國)이 그 틈을 이용하여 치고자 하였다. 이때에 박원도(朴元道)라고 하는 신하가 간언하기를, “시든 풀도 많이 모이면 비를 머금는데, 하물며 사람의 경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면, 사람이 어느 터전인들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복사(卜士)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말에 ‘엄지손가락을 풀면 벗들이 와서 성의껏 돕는다.’고 하였으니, 왕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피옵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사례하며 “옳다.”하고,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을 보내었다. 그리고 정치를 고쳐서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이며, 영초(永初) 2년 신유(辛酉, 421) 5월 12일에 죽었다. 왕비는 도령(道寧) 대아간(大阿干)의 딸인 복수(福壽)인데,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취희왕(吹希王). 질가(叱嘉)라고도 한다. 김씨이다. 영초(永初) 2년(421)에 즉위하였는데, 치세는 31년이며, 원가(元嘉) 28년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었다. 왕비는 진사(進思) 각간(角干)의 딸인 인덕(仁德)으로 왕자 질지(銍知)를 낳았다.
질지왕(銍知王).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8년(451)에 즉위하여 다음해에 세조(世祖) 허황옥(許黃玉)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조와 왕후가 처음 만났던 곳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고 이름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다. 치세는 42년이며, 영명(永明) 10년 임신(任申, 492) 10월 4일에 죽었다. 왕비는 금상(金相) 사간(沙干)의 딸인 방원(邦媛)인데,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겸지왕(鉗知王).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永明) 10년(492)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30년이며,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인 숙(淑)인데,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구형왕(仇衡王). 김씨이다. 정광(正光) 2년(521)에 즉위하였는데, 치세는 42년이다.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에 왕은 동기(同氣)인 탈지(脫知) 이질금(爾叱今)으로 하여금 본국에 머무르게 하고 왕자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分叱水) 이질(爾叱)의 딸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角干)이고,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角干)이며,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서 이르기를, “양(梁)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논평해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살펴보건대, 구형(仇衡)은 양(梁)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땅을 바쳐 신라에 항복하였다. 즉, 처음 수로왕이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으로부터 계산하면 구형왕 말년 임자(壬子, 532) 까지는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가 된다. 그러므로 다시 30년을 더하게 되면 총 520년이 된다. 여기에 두 설을 다 적어둔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금관성파사석탑)
金官城婆娑石塔
金官虎溪寺婆裟石塔者 昔此邑爲金官國時 世祖首露王之妃 許皇后名黃玉 以東漢建武二十四年<戊>申 自西域阿踰陁國所載來 初公主承二親之命 泛海將指東 阻波神之怒 不克而還 白父王 父王命載玆塔 乃獲利涉來泊南涯 有緋帆茜旗珠玉之美 今云主浦 初解綾袴於岡上處曰綾峴 茜旗初入海涯曰旗出邊 首露王聘迎之 同御國一百五十餘年 然于時海東<未>有創寺奉法之事 蓋像敎未至 而土人不信伏 故本記無創寺之文 逮第八代銍知王二年壬辰 置寺於其地 又創王后寺[在阿道訥祗王之世 法興王之前] 至今奉福焉 兼以鎭南倭 具見本國本記 塔方四面五層 其彫鏤甚奇 石微赤<斑>色 其質良脆 非此方類也 本草所云 點鷄冠血爲驗者 是也 金官國亦名駕洛國 具載本記 讚曰 載厭緋帆茜旆輕 乞靈遮莫海濤驚 豈徒到岸扶黃玉 千古南倭遏怒鯨

금관성의 파사석탑
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은 옛날 이 읍이 금관국(金官國)일 때, 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 재위 42-199)의 부인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48)에 서역(西域)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실어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다가 파신(波神, 파도신)의 노여움을 만나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부왕에게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하였다. 이내 바다를 건너는데 이로움을 얻어 (금관국)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는데, 배는 붉은 비단 돛과 붉은 깃발과 주옥으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곳을) 지금은 주포(主浦)라고 하고, 처음에 언덕 위에서 비단바지를 벗었던 곳을 능현(綾峴)이라고 하며, 붉은 깃발이 처음 해안에 들어온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한다. 수로왕이 (이를) 맞아들여 함께 나라를 다스린 지 150여년이 되었다. 그런데 이때에 해동에는 절을 지어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像敎,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 그 지방의 사람들이(土人) 믿지 않았으므로 본기(가락국기)에도 절을 지었다는 글이 없는 것이다. 제 8대 질지왕(銍知王, 재위 451-492) 2년 임인(452)에 이르러 그 땅에 절을 두었다. 또 왕후사(王后寺)를 지었는데,[아도(阿道)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의 시대에 해당하고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대 이전이다.] 지금까지 복을 빌고 있다. 더하여 남쪽의 왜(倭)를 진압하는 것이 본국본기(가락국기)에 구체적으로 보인다. 탑은 방형으로 4면에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은 미세한 붉은 반점이 있는데, 그 성질이 부드럽고 좋아서 이 지역의 종류가 아니다. 『본초(本草)』에서 말하는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하는데, 「본기(가락국기)」에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찬한다. “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거친 바다를 헤치고 왔다. 어찌 황옥만 도와 이 언덕에 왔겠느냐, 천고에 두고 남쪽 왜의 노경(怒鯨, 침략)을 막고자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