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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답평

기본정보

수로왕이 건국한 뒤에 나성과 궁궐을 건축한 지역의 이름

일반정보

신답평은 오래된 한전(閑田)이었는데, 새로 경작한 곳이라는 뜻의 지명으로서 수로왕이 건국한 뒤에 나성과 궁궐을 지은 곳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서는 “(수로왕) 2년 계묘(癸卯, 43) 봄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짐이 도읍을 정하고자 한다.’하고, 곧 임시로 지은 궁궐(假宮)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이는 오래된 한전(閑田)이었는데, 새로 경작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답(畓)은 속문(俗文)이다.]에 행차하여 사방으로 산악(山岳)을 바라보고, 좌우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이 땅은 협소하기가 여귀 잎사귀(蓼葉)와 같으나, 수려하고 기이하니 16나한(十六羅漢)이 머물 곳이 될 만하다. 하물며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셋에서 칠을 이루니, 칠성(七聖)이 머무를 곳은 진실로 이곳이 마땅하다. 강토(疆土)를 개척하면 장차 좋은 곳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천 오백보(步) 둘레의 나성(羅城)과 궁궐(宮闕)의 전각과 여러 관서의 건물, 무기고(武庫)와 창고(倉廩)를 건축할 땅을 마련하였다.(二年癸卯春正月 王若曰 朕欲定置京都 仍駕幸假宮之南新畓坪[是古來閑田 新耕作故云也 畓乃俗文也]四望山嶽 顧左右曰 此地狹小如蓼葉 然而秀異 可爲十六羅漢住地 何況自一成三 自三成七 七聖住地 固合于是 托土開疆 終然允臧歟 築置一千五百步周廻羅城 宮禁殿宇及諸有司屋宇 武庫倉廩之地)”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 사료를 통해서 가락국 건국 초기인 수로왕 2년(43)에 수로왕이 새로운 궁궐을 마련하기 위해서 장소를 물색하던 중에 임시로 지은 궁궐의 남쪽에 있는 신답평(新畓坪)을 택하여 나성과 궁궐을 조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가락국의 궁궐이 조성된 신답평(新畓坪)은 『가락국기』에서 세주를 통하여 오래된 한전(閑田)이었는데, 새로 경작하게 된 지역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다른 사료에서 신답평이라는 이름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이곳이 어느 곳에 해당하는지, 이름이 붙여진 시기나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지명을 통해서 신답평의 위치를 추정한 연구가 있다. 김해시 회현동패총과 봉황대 기슭에 위치한 평지를 “논실”이라고 부르는데, 논은 신답평의 답(畓)을 의미하고, 실은 평(平)을 말하는 것이므로, 신답평은 봉황대 일대에 비정된다는 것이다.(이종기, 1977)

또한 고고학적인 조사를 통해서 가락국의 중심지를 추정함으로써 신답평의 위치를 파악한 연구들도 있다. 현재 경남 김해시 봉황동 253번지 일대에 위치한 김해 봉황대유적(사적 제2호)은 봉황대(해발 45m) 자락을 중심으로 구(溝), 목책(木柵), 주거지(住居址), 패총(貝塚)등이 확인된다. 봉황대 외곽구간에도 성 내부에 위치한 취락과 관련된 유구들이 여러 시기에 걸쳐서 조밀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봉황대는 가락국의 중심 집단이 생활하였던 공간으로 추정되고 있다.(부산대학교박물관, 1998)

한편 봉황대 주변의 봉황동에서 토성(土城)도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는 봉황동의 북동쪽에서 실시되었는데, 봉황대 서쪽 구릉까지 이어질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구간이 발견되어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5세기 중엽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봉황대에서는 청동기시대 환호가 확인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가락국기』에 언급된 일천 오백보(步) 둘레의 나성(羅城)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경남고고학연구소, 2005)

그리고 봉황대 서쪽 편 충적지에서는 한전(旱田)형태의 수전(水田)도 확인되었는데,(경남발전연구소 역사문화센터, 2005) 이러한 경작유구를 통해서 농경의 흔적이 확인된 만큼 신답평의 지명을 비정하는데 참고가 된다.

이와 같이 봉황대 일대 유적지의 상한이 청동기시대까지 올라가고 삼한시기와 가락국 시기에 지속적으로 유적이 조영되었음이 확인되면서 이 일대가 신답평에 해당하는 가락국의 궁궐지로 파악하는데 연구자들의 견해가 모아지고 있다.(부산대학교박물관, 2006)

참고문헌

이종기, 1977, 『駕洛國探査』, 일지사.
부산대학교박물관, 1998, 『金海鳳凰洞遺蹟』.
경남고고학연구소, 2005, 『鳳凰土城 -金海 會峴洞事務所~盆城路間 消防道路 開設區間 發掘調査 報告書-』.
경남발전연구소 역사문화센터, 2005, 『加耶人生活體驗敷地 發掘調査報告書』.
부산대학교박물관, 2006, 『傳金海加耶宮墟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 二年癸卯春正月 王若曰 朕欲定置京都 仍駕幸假宮之南新畓坪[是古來閑田 新耕作故云也 畓乃俗文也]四望山嶽 顧左右曰 此地狹小如蓼葉 然而秀異 可爲十六羅漢住地 何況自一成三 自三成七 七聖住地 固合于是 托土開疆 終然允臧歟 築置一千五百步周廻羅城 宮禁殿宇及諸有司屋宇 <武>庫倉廩之地 事訖還宮 徧徵國內丁壯人夫工匠 以其月二十日資始金<湯> <曁>三月十日役畢 其宮闕屋舍 俟農隙而作之 經始于厥年十月 逮甲辰二月而成 涓吉辰御新宮 理萬機而懃庶務 …
가락국기[문종조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 (수로왕) 2년 계묘(癸卯, 43) 봄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짐이 도읍을 정하고자 한다.”하고, 곧 임시로 지은 궁궐(假宮)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이는 오래된 한전(閑田)이었는데, 새로 경작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답(畓)은 속문(俗文)이다.]에 행차하여 사방으로 산악(山岳)을 바라보고, 좌우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이 땅은 협소하기가 여귀 잎사귀(蓼葉)와 같으나, 수려하고 기이하니 16나한(十六羅漢)이 머물 곳이 될 만하다. 하물며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셋에서 칠을 이루니, 칠성(七聖)이 머무를 곳은 진실로 이곳이 마땅하다. 강토(疆土)를 개척하면 장차 좋은 곳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천 오백보(步) 둘레의 나성(羅城)과 궁궐(宮闕)의 전각과 여러 관서의 건물, 무기고(武庫)와 창고(倉廩)를 건축할 땅을 마련하였다. 일을 마치고 궁궐로 돌아왔는데, 국내(國內)의 장정 인부들과 공장(工匠)들을 두루 징발하여, 그 달 20일에 견고한 성곽(金城湯池)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3월 10일에 이르러 공사를 마쳤다. 궁궐과 옥사(屋舍)는 농한기를 기다렸다가 지었는데, 그 해 10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갑진년(甲辰, 44) 2월에 완공하였다. 좋은 날을 받아 왕이 새 궁궐에 들어가 모든 정사를 처리하고 서무에 힘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