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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수로왕릉

기본정보

지정명 : 수로왕릉(首露王陵)
지정번호 : 사적 제73호
소재지 : 경남 김해시 서상동(西上洞)

일반정보

수로왕릉으로 전해지는 고분은 경남 김해시 서상동(西上洞)에 위치해 있으며, 사적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형 토분으로 봉분에 다른 시설은 없고, 선조 13년(1580) 영남관찰사 허엽(許曄)이 왕릉을 수축하여 상석 ·석단 ·능묘 등을 갖추었고, 인조 25년(1647)에 능비를 세웠다.

전문정보

『삼국유사』권2 기이2 가락국기에 의하면,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우니 높이가 한 길이고 둘레가 300보(步)인데, 거기에 장사 지내고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하였다(以獻帝建安四年己卯 三月二十三日而殂落 壽一百五十八歲矣 國中之人 若亡天只 悲慟甚於后崩之日 遂於闕之艮方平地 造立殯宮 高一丈 周三百步而葬之 號首陵王廟也)”고 기록되었다.

수로왕릉의 위치에 대하여, 가락국(금관가야)의 왕궁터를 지금의 수로왕릉이 있는 숭선전(崇善展) 일대로 비정하면서, 수로왕릉의 위치가 “대궐의 동북쪽”이라는 기록에 따라, 조선시대 이래의 전승에 근거하여 1928년에 세워진 “가락고도궁허(駕洛古都宮墟)” 비석이 있는 함허정 유지(涵虛亭 遺址 : 현재 김해시 동상동 중앙시장 북문에 연접해 있는 蓮華寺 布敎堂 내)를 수로왕릉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즉 수로왕릉과 가락고도궁허(駕洛古都宮墟)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다고 보면서, 가락고도궁허(駕洛古都宮墟)에 있는 융기된 지대를 원래의 수로왕릉이 세월이 지나면서 퇴락하여 옛 모습을 잃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면서 궁궐구지에 있는 석축을 능 주위에 있었던 배열석(排列石)의 계통으로 생각하였으며, 현재의 수로왕릉은 주인공이 분명치 않은 또다른 고분으로 파악하였다.(이병도, 1976)

그러나 현재 전하는 왕릉과 왕후릉 사이에 있는 대성동 고분군에서 가야 초기인 2-4세기의 토광목곽묘가 다량 발굴되었으므로, 기존의 “가락고도궁허(駕洛古都宮墟)” 비석은 잘못 세워진 것이고, 가락국기에 전하는 수로왕릉과 허황후릉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고 보기도 한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릉은 199년에 조성되었으며, 그 위치도 현재의 서상동으로 볼 수 있다.(김태식, 1999)

대궐의 동북쪽에 만들어 세웠다는 빈궁(殯宮)의 성격은 분명치 않다. 여기서는 그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장사지냈다는 말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무덤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즉, 그 높이가 한 길(8자=2.4m)이라는 것으로 보아, 사당(祠堂)이나 빈소(殯所)와 같은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봉분(封墳)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2세기경의 이 지역 분묘에는 그처럼 높은 봉분을 가진 고총고분(古塚古墳)이 없으므로, 후대 어느 시기에 묘제를 성대하게 고친 이후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둘레가 300보(步)(1,800자=540m)라면, 지름이 170m 정도 되므로 봉분으로서는 지나치게 크다. 그래서 이를 능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를 구획한 배열석의 전체 연장으로 본 견해가 있으며,(이병도, 1976) 당시에 배열석의 존재 유무는 알 수 없으므로 능역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태식, 1999)

이를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이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묘(廟)는 사당(祠堂)만으로 이루어진 독립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빈소(殯宮)과 마찬가지로 묘(墓)를 포함하는 제사구역을 가리키고 있으며, 중점은 오히려 묘 자체에 있는 듯 하다. 가락국기 뒤의 기사에서는 같은 해인 거등왕 즉위 기묘년에 편방(便房)을 설치했다고 하였으므로(自居登王卽位己卯年置便房), 그 묘역 안에 무슨 건물을 세운 것이라고 하겠다. 편방(便房)이란 문자 그대로 휴게실이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제사 집기를 보관하고 음식을 마련하는 작은 건물을 의미하는 듯 하다.

수로왕묘에 대한 제사는 거등왕이 즉위한 이후 가야국이 멸망할 때까지 1년에 정월 3․7일, 5월 5일, 8월 5․15일의 5회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되어있다. 중국에서도 1년 5제(祭)를 지냈으나 그 시기는 사계(四季)의 맹월(孟月 : 2, 5, 8, 11월)과 납일(臘日 : 동지 후 3번째의 戌日)이니 그 시기가 다르며, 신라 하대의 오묘(五廟) 제사일인 정월 2․5일, 5월 5일, 7월 상순, 8월 1․15일과 같지만 7월 상순이 빠졌을 뿐이다. 신라와 마찬가지로 가야의 제사에도 정월, 단오, 추석과 같은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 가야 고유의 제사 습속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김태식, 1999)

가락국기에서는 “신라 제30대 법민(法敏)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 3월 어느 날에 왕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가야국(伽耶國) 원군(元君)의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이 세종(世宗)이고, 그 아들이 솔우공(率友公)이며, 그 아들이 서운잡간(庶云匝干)이고, 그의 딸이 문명황후(文明皇后)이니, 이 분이 나를 낳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원군(元君)은 어린 나에게 15대 시조이시다. 그분이 다스리던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장사지낸 사당은 아직 남아 있으니, 종조(宗祧)에 합하여 계속하여 제사지내는 일을 이어라(洎新羅第三十王法敏龍朔元年辛酉三月日 有制曰 朕是伽耶國元君九代孫仇衡王之降于當國也 所率來子世宗之子 率友公之子 庶云匝干之女 文明皇后 寔生我者 玆故 元君於幼冲人 乃爲十五代始祖也 所御國者已曾敗 所葬廟者今尙存 合于宗祧 續乃祀事)”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당시까지 남아있다는 소장묘(所葬廟)란 봉분을 포함한 묘역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종조(宗祧)의 종(宗)은 존조묘(尊祖廟)를 뜻하고 조(祧)는 원조묘(遠祖廟)를 뜻하는데, 합쳐서 왕이 조상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종묘를 말한다. 이 문장을 그대로 이해한다면, 수로왕을 신라 종묘에 합하여 모시라는 명령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신라가 일정 부분 가야를 계승하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이 되어 중요하다. 그러나 종묘는 왕의 부계(父系) 중에서도 직계(直系) 조상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수로왕은 문무왕에게 모계(母系)의 조상이므로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종조(宗祧)는 정식 종묘나 사당일 수 없고, 수로왕만의 제사를 위한 침전(寢殿)으로, 후대의 정자각(丁字閣)과 같이 그 안에 왕의 위패를 조각해 주도 제례 때에 이곳에 제물을 진설하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수로왕릉이 언제인가 묘제를 확장하여 크게 성토(盛土)를 하고 사당을 보수하였다면, 그것은 바로 이 문무왕 때로 생각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순화(淳化) 2년(991) 즉 고려 성종 10년에 김해부 양전사(量田使)에 의하여 수로왕릉의 왕위전(王位田) 15결(結)이 국가 공유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를 방어하려는 김해 지방 토호들의 노력도 거세었으니, 이들이 “포승과 도검을 쥔 7-8명의 귀신”으로 표현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 권84 형지(刑志)1 직제편(職制篇)에 의하면, 고려 문종 11년(1057)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 先王의 총묘(塚墓) 및 옛 성현(聖賢)의 묘 근처에서 경작하여 침훼하는 일을 금지케 하였는데, 이에 따라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는 수로왕릉을 보수하고 비문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가락국기를 지은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는 문종 31년(1076)까지 봉분, 묘역의 나무, 부장품들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찬탄하였다.

그러다가 몽고의 침략과 왜구의 횡행으로 주변이 황폐화되었으니, 『세종실록(世宗實錄)』 권86 세종(世宗) 21년 10월 기묘조(己卯條)에 수록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선(李宣)의 장계(狀啓) 내용에서는, 수로왕릉이 길 옆의 논 가운데에 아무런 보호시설도 없이 방치되어, 그 위로 길이 나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며, 소나 말을 놓아 기르는 장소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에는 묘역 내에 사당이나 담장 등의 건물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정비해달라는 이선(李宣)의 주장에 대하여 예조(禮曹)에서는 표석(表石)이나 수묘호(守墓戶)도 지정하지 않고, 다만 사방 30步의 경작 금지 조치만을 결정하였다.

그후 문종(文宗) 원년(1451)에 편찬된 『고려사』 권57 지리2 경상도 금주조(金州條)에서는 수로왕묘(首露王墓)가 주(州)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단종(端宗) 2년(1454)에 완성된 『세종실록』 권50 지리지 경상도 김해도호부조(金海都護府條)에서는 수로왕의 궁전터가 부(府) 안에 있고, 묘는 부(府) 서쪽 300보(步) 위치의 대기리(大岐里)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수로왕의 궁전터와 묘의 위치를 정확히 표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예종(睿宗) 원년(1469)에 작성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진주도(晉州道) 김해도호부조(金海都護府條)에서는 “가락국(駕洛國)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능(陵)은 읍성 서쪽 대기음리(大岐音里)에 있다. 수로왕비(首露王妃)는 남천축국(南天竺國) 공주인 황옥(黃玉)이고 시호(諡號)를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하였다. 능(陵)은 부(府) 북쪽 삼산리(三山里) 구지산(龜旨山)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경상도(慶尙道)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능묘조(陵墓條)에서는, “수로왕릉(首露王陵)은 부 서쪽 3백 보 지점에 있다. 해마다 봄가을에 부(府) 안의 父老들이 함께 모여서 제사지낸다. 한(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에 가야국 시조 수로왕이 훙(薨)하니, 성 북쪽 납릉(納陵)에 장사지내고, 능 곁에 있는 밭 30경(頃)을 바쳐 봄가을 제사하는 비용에 충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는 수로왕릉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능호를 납릉(納陵)이라고 제정한 사실이 보인다. 이 납릉(納陵)이라는 명칭은 “수로(首露)”라는 시조명을 능호에 함부로 붙여서 부를 수 없다고 판단한 재지사족(在地士族)들에 의해 붙여진 미칭(美稱)으로 생각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경상도(慶尙道)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궁실(宮室) 회로당조(會老堂條)에 의하면, 수로왕릉의 재실(齋室) 건물과 그 제사 비용을 대기 위한 전지(田地)가 대략 1491년보다 약간 앞선 성종년간에 그 지방 사람들의 노력으로 마련되고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수로왕 묘역이 완전히 황폐화된 이후이므로, 고려시대의 사당과는 무관하게 조선시대 당시의 사고 방식과 건축 양식에 따라 새로이 지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태식, 1999)

이후 선조(宣祖) 25년(1592)에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이 왜구(倭寇)에게 도굴되었는데, 수로왕릉 도굴 상황은 광해군(光海君) 6년(1614)에 이수광(李晬光)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 권19 궁실부(宮室部)에서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왜구들이 수로왕릉을 파헤쳤을 때, 구덩이 안은 매우 넓었고 두개골은 구리 대야만큼 컸으며, 관 바깥에 두 명의 미인이 있어서 안색이 살아있는 듯하였으나, 구덩이 바깥에 내놓고 해를 쪼이니 곧 녹아 없어졌는데, 이는 아마 순장(殉葬)한 사람인 듯하다는 내용이다. 그 순장자는 두 사람의 여자로서 나이 20세 정도였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인조 24년(1646)에 수로왕릉 앞에 비석(碑石)이 세워졌다. 현재 남아있는 비석의 문면(文面)으로 보아 그것은 임진․병자 양란 후에 허적(許積 1610~1680)이 마련한 것으로, 글씨도 선명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수로왕릉비에서는 동방(東方)의 허씨(許氏)가 수로왕의 두 아들로부터 기원하였고, 왕을 장사지낸 후 천여년이 지난 만력(萬曆) 경신년(庚申年 선조 13년 1580)에 방백(方伯) 허엽(許曄)이 묘를 수리하고 상체(床砌)를 마련하였다고 하였다. 이어서 경진(庚辰) 67년 무술(丙戌 인조 24년 1646)에 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수경상도관찰사(守慶尙道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 허적(許積)이 봉분을 더하고 비석을 세우고 글을 썼으며, 이때 상체(床砌)를 새것으로 갈고 생석(牲石)을 진열하여 정해(丁亥 1647) 중춘(仲春)에 일을 마쳤다고 하였다.

그후 대를 거듭하면서 수로왕릉의 부속 건물이 조금씩 늘어났고, 정조 17년(1793)에 당시 이 지방 주민들의 민원을 수용한 정조의 허락으로 거의 모든 건물들이 새로이 건축되어, 납릉정문(納陵正門), 가락루(駕洛樓) 같은 전각들의 원형이 조성되었다. 그후에도 여러 건물들이 건립되고 수리되다가, 고종 15년(1878)에 신라의 시조 사당과 마찬가지로 사당 건물인 숭선전(崇善展)이 임금의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옛 가락국 왕릉과 종묘 제도가 늦게나마 재확립되었다.

수로왕릉 안쪽 문인 납릉정문(納陵正門) 현판 좌우의 공포(栱包)에 있는 네 개의 장식판에는 남방식 불탑과 한쌍의 잉어, 두 개의 양궁(洋弓)과 두 마리의 코끼리 및 연꽃 봉오리가 그려져 있다. 여기서 한쌍의 잉어는 인도 아요디아국 전승의 신어(神魚)를 상징하며, 두 개의 洋弓은 태양신의 화신이며 활의 명수인 라아마를 상징한다고 하였다.(이종기, 1977) 쌍어문(雙漁文)은 이곳 이외에도 조선 후기 역대 왕들이 내린 향축(香祝)을 보관하는 안향각(安香閣) 문 위의 공포(栱包)에도 새겨져 있다.

납릉(納陵) 정문의 쌍어문 그림이 허황후의 출신국인 아요디아국의 문장(文章)이며, 1세기의 허황후 때부터 전승된 것이라면, 그 건물이 지속적으로 보수되면서 이어진 것이 확인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삼국유사』권2 기이2 가락국기에 나오는 수로왕과 허황후의 신비한 결혼설화가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납릉 정문의 원형은 적어도 정조 16년(1792) 이후에 처음으로 세워졌으며, 쌍어문이 가야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왔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기도 한다. 정조 16년(1792) 이후 왕명에 의하여 납릉에 배치된 능감(陵監)들의 기록을 정리하여 1903년에 편찬된 『숭선전지(崇善展誌)』에 의하면, 쌍어문이 있는 건물의 하나인 안향각(安香閣)은 순조 24년(1824)에 신축된 것이고, 또 하나인 납릉정문(納陵正門)은 정조 17년(1793)에 외삼문(外三門)으로 설치되었다가 헌종 8년(1843)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그러나 김해에는 신어산(神魚山)이 있고, 현존하는 신어(神魚)의 전승도 김해지역에 국한되어 있으므로,(이영식, 2001) 쌍어문이 가야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왔을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할 것이다.(김병모, 1994)

참고문헌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이종기, 1977, 『駕洛國探査』, 일지사.
三品彰英, 1979, 『三國遺事考証(中)』, 塙書房.
김병모, 1994, 『김수로왕비 허황옥』, 조선일보사.
김태식, 1998,「駕洛國記 所在 許王后 說話의 性格」『韓國史硏究』102.
김태식, 1999,「金海 首露王陵과 許王后陵의 補修過程 檢討」『韓國史論』41·42合.
이영식, 2001,「가야인의 정신세계-연구서설과 가야불교」『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백승충, 2001,「가야 건국신화의 재조명」『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3, 푸른역사.

관련원문 및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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