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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허황후릉

기본정보

지정명 :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지정번호 : 사적 제74호
소재지 : 경남 김해시 구산동(龜山洞)

일반정보

수로왕비 허황옥의 능으로 전해지는 고분은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위치해 있으며 사적 제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형 토분으로 봉분에 다른 시설은 없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臺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다.능 앞에는 인조 25년(1647)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고 2행으로 각자(刻字)한 능비가 있다.

전문정보

가락국기에 의하면 허황후릉은 189년에 조성되었다. 그 위치는 “구지(龜旨)의 동북쪽 언덕”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현재의 구지봉(龜旨峯) 동북쪽 길 건너 언덕에 위치하는 허황후릉 그대로이다.

수로왕릉은 가락국기에 의하면 고려 문종대까지 존재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허황후릉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이 중에 또 수로왕을 사모해서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 29일엔 이 지방 사람들과 서리(胥吏)․군졸(軍卒)들이 승점(乘岾)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 이들이 동서쪽으로 서로 눈짓을 하면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서 망산도(望山島)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를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古浦)를 향해서 다투어 달리니, 이것은 대개 옛날에 유천간(留天干)과 신귀간(神鬼干)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고려 문종년간에 허황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재촉하여 임금에게 고하려 하였던 것을 모방한 경주(競走) 놀이가 거행되었으며, 이는 가락국기를 편찬한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의 지휘에 따른 것이었다고 추정되므로, 허황후릉을 위한 별도의 사당이 건립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런 관심의 고조 속에 수로왕릉과 함께 허황후릉의 분구(墳丘)도 보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곧, 수로왕릉에 대한 제사는 금관가야의 멸망과 함께 끊어졌다가 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수로왕릉에 묘(廟)를 신설하면서 봉분도 성토(盛土)하였고, 수로왕릉과 그 사당은 나말여초의 혼란기를 거쳐 12세기 중후반 고려 문종대에 와서 다시 능원을 보수하고 비문을 건립하였는데, 이 때 허황후의 능도 보수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몽고의 침략과 왜구의 횡행으로 주변이 황폐화되었고, 조선 시대인 세종 21년(1439)에 수로왕릉의 묘역이 사방 30보로 확보되면서, 허황후릉도 이때 보수된 것으로 생각된다.(김태식, 1999)

예종(睿宗) 원년(1469)에 작성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진주도(晉州道) 김해도호부조(金海都護府條)에서는 “가락국(駕洛國)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능(陵)은 읍성 서쪽 대기음리(大岐音里)에 있다. 수로왕비(首露王妃)는 남천축국(南天竺國) 공주인 황옥(黃玉)이고 시호(諡號)를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하였다. 능(陵)은 부(府) 북쪽 삼산리(三山里) 구지산(龜旨山)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은 허황후릉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록한 최초의 기록이며, 보주태후(普州太后)라는 시호 역시 처음 나타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다만 그 규모나 시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므로, 허황후릉이 이때 재발견된 것인지, 당시에 새로이 조성된 것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32 경상도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능묘조(陵墓條)에서는, “허왕후릉(許王后陵)은 구지산 동쪽에 있다. 전설에 왕비가 아유타국(阿踰陀國) 왕녀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왕녀라고도 한다.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보주태후(普州太后)라 부른다. 고을 사람들이 왕릉에 제사할 때에 함께 제사한다”고 기록하였다.

현재 허황후릉 앞에 세워져 있는 비석(碑石)은 임진․병자 양란 후인 조선 인조 25년(1647)에 허적(許積 1610~1680)에 의해 수로왕릉비와 함께 마련한 것이다. “가락국수로왕비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陵)”이라고 하였으며, 글씨도 선명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허황후릉의 비문 내용에 의하면, 태후의 성 허씨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고, 수로왕 7년에 세워서 후(后)로 삼고 이름을 보주태후(普州太后)로 불렀다고 하였다. 또한 열 아들 중에 두 아들에게 허씨 성을 잇게 하였다는 내용이 강조되었으며, 묘를 수리하고 비석을 세운 전말은 수로왕릉과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허황후 능비(陵碑)의 보주태후(普州太后)라는 문구에 대하여, 황후가 중국 사천성(四川省) 안악현(安岳縣) 출신이라는 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연구도 있다.(김병모, 1994) 그러나 허황후의 시호 보주태후(普州太后)는 조선 전기에 김해지역에 거주하던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예우할 필요성에 의하여, 미칭(美稱)으로 붙였다는 견해도 있다.(김태식, 1999)

참고문헌

김병모, 1994, 『김수로왕비 허황옥』, 조선일보사.
김태식, 1999,「金海 首露王陵과 許王后陵의 補修過程 檢討」『韓國史論』41·42合.

관련원문 및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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