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현화사

기본정보

고려 제8대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절

일반정보

고려 제8대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 경기도 개성시 장풍군 월고리에 세워진 절로, 오래 전에 폐사가 되어 절터에 있었던 현화사비는 북한 개성시 고려박물관에 있으며, 현재 절터에는 칠층석탑, 당간지주만이 유존하고 있다.

전문정보

현화사는 경기도 개성시 장풍군 월고리에 세워진 절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김부대왕(金傅大王)조에는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에 대해 서술하면서 세주로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을 인용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신성왕후 이씨의 원당(願堂)이 현화사(玄化寺)라고 전하고 있으며, 3월 25일이 기일로 정릉(貞陵)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아들 하나를 낳으니 안종(安宗)이다. 이를 통해 현화사는 신성왕후 김(이)씨의 원당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顯宗) 무오(戊午) 9년(1018)조에 “무신일에 대자은(大慈恩)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하여 왕이 죽은 부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戊申 始創大慈恩玄化寺以資考妣冥福)”고 전하고 있다.

현화사는 고려 제8대 현종(顯宗, 재위 1009-1031년)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 현종은 태조의 8번째 아들과 신성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안종(安宗)과 고려 제5대 경종(景宗, 재위 975-981년)의 4비(妃)인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현종의 아버지인 안종은 헌정왕후 황보씨와 사통함이 발각되어 성종 12년(993)에 사수현(泗水縣, 지금의 경남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어머니 헌정왕후는 현종을 낳고 곧 세상을 떠났다. 고아가 된 현종(대량원군, 大良院君)은 성종이 거두어 안종에게 보내어 기르게 하는 등 뒤를 돌보아 주었다. 그러나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천추태후(千秋太后, 경종의 비)의 핍박을 받아 중이 되기도 한다. 이후 현종은 목종의 뒤를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즉위하자 성종대와 목종대에 걸쳐서 일시 위축되었던 불교를 진흥시키면서 그 교단을 정비하려고 하였다. 이는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의 부활과 아울러 왕실의 원찰로서 현화사를 새로 창건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현화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북한 개성시 고려박물관에 있는 「현화사비(玄化寺碑)」(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1호)를 통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현화사비」는 현종 12년(1021)에 만들어진 비로서 사찰의 창건․내력․규모․연중행사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현종은 즉위년(1009) 4월에 자기 부모를 추존하여 안종을 안종헌경효의대왕(安宗憲景孝懿大王), 헌정왕후를 효숙인혜왕태후(孝肅仁惠王太后)로 추존하였다. 그리고 현종 8년(1017)에는 사주(泗州)에 있던 안종의 능을 개경으로 이장하였다. 이장이 완료된 후 현종 9년(1018)에 능의 근처 영취산(靈鷲山)에 헌정왕후의 원찰로서 현화사의 개창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는 4년 만에 완공하였는데, 사찰의 경내에는 서북쪽에 따로 진전(眞殿)을 세워 현종의 부모와 누나 성목장공주(成穆長公主) 및 부인 원정왕후(元貞王后)의 진영(眞影)을 그려 전내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현화사의 성격에 대해 현화사는 법상종(法相宗)의 종찰(宗刹)로 국가 왕실의 인정을 받아 크게 존숭을 받았던 사찰로 이해하기도 한다. 법상종은 후삼국시대에 유행한 후 고려 초에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가, 현종 때부터 다시 융성하게 되었다. 원래 고려왕실의 원찰로 창건되었던 현화사는 이후 당시 최대의 문벌귀족인 인주이씨 세력의 후원을 받으면서 법상종 교단을 더욱 크게 번창시켰다고 보았다.(최병헌, 1981)

한편 현화사는 오래 전에 폐사가 되어 현재는 절터에 칠층석탑, 당간지주만이 유존하고 있다. 이중 현화사 칠층석탑(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39호)은 각층 탑신 사방에 부조 조각상이 새겨 있어 예로부터 주목되어 왔다. 「현화사비」에 의하면 “경신(庚申, 1020) 10월에 … 드디어 이 절에 칠층석탑을 지었다.(庚申歲十月內 … 遂於當寺創造石塔一座七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화사 칠층석탑이 현종 11년(1020)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탑의 양식은 고려 초 주로 백제계 탑들에서 나타나는 단층기단에, 7층 탑신을 올리고 정상에 상륜을 갖춘 일반적 유형에 속하는 탑이다. 탑신이 탑 몸에 비해 안정된 넓이를 확보한 점, 기단 갑석 밑에 부연을 둔 점 등 세부적인 구조와 전반적인 짜임은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랐으나, 광활한 중심축을 중심으로 상하로 반전하고 있는 옥개석은 백제 계열의 양식으로 평가되고 있다.(강병희, 2000) 또한 7층의 탑신 사방에 새겨진 부조상은 불회도(佛會圖) 장면을 도상화한 최초의 탑상 조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당시의 불상 도상 형식과 양식 편년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고도 한다.(문명대, 2003)

현화사 당간지주(북한 보물 제38호)는 현재 북한에 남아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강우방, 1997), 기단은 판석형 석재를 여러 단으로 쌓아 구축하였다. 그리고 두 지주와 간대석이 결구되는 부위에는 넓은 사각형 석재를 마련하였으며, 기단 상면에 홈을 마련하여 지주를 끼워 세웠다. 지주부는 평면 사각 석주형으로 상부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모습인데, 이는 고려 전기에 건립된 당간지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엄기표, 2004)

참고문헌

최병헌, 1981, 「高麗中期 玄化寺의 創建과 法相宗의 隆盛」『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지식산업사.
강우방, 1997, 「당간지주」『北韓文化財解說集』1, 국립문화재연구소.
강병희, 2000, 「高麗 玄化寺址 七層石塔에 대하여」『韓國史의 構造와 展開』, 혜안.
문명대, 2003, 『한국의 불상 조각 4 : 高麗․朝鮮 佛敎彫刻史 硏究』, 예경.
엄기표, 2004,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학연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김부대왕)
金傅大王
第五十六金傅大王 諡敬順 天成二年丁亥九月 百濟甄萱侵羅至高鬱府 景哀王請救於太祖 命將以勁兵一萬往救之 救兵未至 萱以冬十一月掩入王京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四散奔走 爲賊所虜 無貴賤匍匐乞爲奴婢 萱縱兵摽掠公私財物 入處王宮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數人匿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而强淫王妃 縱其下亂其嬪妾 乃立王之族弟傅爲王 王爲萱所擧 卽位 前王尸殯於西堂 與群下慟哭 我太祖遣使弔祭 明年戊子春三月 太祖率五十餘騎巡到京畿 王與百官郊迎 入相對曲盡情禮 置宴臨海殿 酒酣 王言曰 吾以不天 侵致禍亂 甄萱恣行不義 喪我國家 何如之 因泫然涕泣 左右莫不鳴咽 太祖亦流涕 因留數旬乃廻駕 麾下肅靜不犯秋毫 都人士女相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 如見父母 八月 太祖遣使遺王錦衫鞍馬 幷賜群僚將士有差 淸泰二年乙未十月 以四方地盡爲他有 國弱勢孤 不已自安 乃與群下謀擧土降太祖 群臣可否紛然不已 王太子曰 國之存亡必有天命 當與忠臣義士收合心 力盡而後已 豈可以一千年之社稷 輕以與人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乃使侍郞金封休齎書 請降於太祖 太子哭泣辭王 徑往皆骨山 麻衣草食以終其身 季子祝髮 隷華嚴爲浮圖 名梵空 後住法水海印寺云 太祖受書 送太相王鐵迎之 王率百僚歸我太祖 香車寶馬連亙三十餘里 道路塡咽 觀者如堵 太祖出郊迎勞 賜宮東一區[今正承院] 以長女樂浪公主妻之 以王謝自國居他國 故以鸞喩之 改號神鸞公主 諡孝穆 封爲正承 位在太子之上 給祿一千石 侍從員將皆錄用之 改新羅爲慶州 以爲公之食邑 初王納土來降 太祖喜甚 待之厚禮 使告曰 今王以國與寡人 其爲賜大矣 願結婚於宗室 以永甥舅之好 王答曰 我伯父億廉[王之考孝宗角干追封神興大王之弟也]有女子 德容雙美 非是無以備內政 太祖娶之 是爲神成王后金氏[本朝登仕郞金寬毅所撰王代宗錄云 神成王后李氏 本慶州大尉李正言爲俠州守時 太祖幸此州 納爲妃 故或云俠州君 願堂玄化寺 三月二十五日立忌 葬貞陵 生一子 安宗也 此外二十五妃主中 不載金氏之事 未詳 然而史臣之論 亦以安宗爲新羅外孫 當以史傳爲是]
김부대왕
제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의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高鬱府)에 이르니, 경애왕(景哀王)은 고려 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하여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구하러 가게 했으나 구원병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겨울 11월에 서울로 쳐들어갔다. 왕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갑작스러워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척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기며 노비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관청과 개인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서 거처하였다. 이에 좌우에게 명하여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영 가운데로 잡아서 왕에게 자결하도록 명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族弟)인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바가 되었다. 왕위에 오르자 전왕의 시체를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이때 우리 태조는 사신을 보내서 조상하였다. 이듬해 무자(戊子, 928) 봄 3월에 태조가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경기(京畿, 신라의 서울)에 이르니, 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대궐로 들어가 서로에게 정성과 예의를 다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열었다. 술이 얼큰해지자 왕이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 화란을 불러들였고, 견훤은 불의한 짓을 마음껏 행하여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였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라 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우니, 좌우 사람들도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태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수십일을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부하 군사들은 엄숙하고 정제해서 조금도 범하지 않으니 왕경의 사녀들이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王公)이 온 것은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8월에 태조는 사자를 보내 왕에게 금삼과 안장 갖춘 말을 주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사들에게도 차등있게 물건을 주었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 935) 10월에 사방 땅이 모두 남의 나라 소유가 되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는 고립되어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분분하여 끝나지 않자 왕태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해서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 일이지, 어찌 천년의 사직을 경솔하게 남에게 내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외롭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으니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참혹한 죽음의 구렁으로 몰아넣게 하는 것은 내가 참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국서를 가지고 태조에게 가서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서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세상을 마쳤다. 막내 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중이 되어 범공(梵空)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뒤로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다고 한다. 태조는 국서를 받고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 귀의하니, 향차(香車)와 보물과 말들이 30여 리에 이르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고 구경꾼들이 담과 같이 늘어섰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주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자기 나라를 작별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고 해서 이를 난새에 비유하여 신란공주(神鸞公主)로 칭호를 고치고, 시호를 효목(孝穆)이라고 하였다. 왕을 봉해서 정승(正承)을 삼으니 자리는 태자의 위이며 녹봉 1천 석을 주었다. 시종과 관원․장수들도 모두 채용해서 쓰도록 했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고 하여 이를 공(경순왕)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항복해오자 태조는 무척 기뻐하여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이제 왕이 나에게 나라를 주시니 주시는 것이 매우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과 혼인을 해서 장인과 사위의 좋은 의를 길이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우리 백부 억렴(億廉)[왕의 아버지 효종(孝宗) 각간(角干), 추봉된 신흥대왕(新興大王)의 아우이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는 내정을 맡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그에게 장가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이다.[우리 왕조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는 “신성왕후 이씨는 본래 경주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俠州)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태조가 그 고을에 갔다가 그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 때문에 그를 협주군(俠州君)이라고도 한다. 그의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이며, 3월 25일이 기일로, 정릉(貞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하나를 낳으니 안종(安宗)이다”라고 하였다. 이 밖에 25비주(妃主) 중에 김씨의 일은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논(論)에 또한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고 했으니 마땅히 사전(史傳)이 옳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