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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계 임도대감주첩

기본정보

강주계(康州界)의 임도대감(任道大監)이 작성한 일종의 주첩공문(柱貼公文)

일반정보

강주는 현재 경상남도 진주이다. 임도는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지만 대감은 그 지역의 무관, 혹은 지방관 등의 관직으로 추정되며 주첩은 일종의 공문을 의미한다. 결국 강주계임도대감 주첩은 경남 진주지역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파견된 관리가 작성한 공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를 보면 백엄사와 관련된 기록으로 강주계임도대감주첩을 인용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개운(開運) 3년(946)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任道大監) 주첩(柱貼)에 백엄선사(伯嚴禪寺)는 지금의 초계(草溪), 초팔현(草八縣)에 있었는데, 절의 스님 간유(偘遊) 상좌(上座)의 나이가 39세였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강주(康州)는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晋州)의 옛 지명 중 하나이다. 강주는 신라 9주의 하나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4 잡지3 지리1 신라조에 따르면 신라가 당과 함께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멸한 후에 9주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 중 신라 경계 안에 설치한 세 개의 주 중 서쪽을 강주라고 하였다. 또한 같은 책 신라 강주(康州)조에 따르면, 강주(康州)는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이 당나라 수공(垂拱) 원년(685)에 거타주(居陁州)를 나누어 청주(菁州)를 설치하였는데,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대에 강주(康州)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후삼국시대 왕건(王建)과 견훤(甄萱)의 전쟁 기사 중에도 강주와 관련된 기록이 보인다. 신라본기12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 4년(920)조에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또한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조에는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 2년 무자(928) 5월에 견훤이 강주를 습격하여 3백여 인이 살해당하고, 장군 유문(有文)이 항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高麗史)』 권57 지11 지리2 진주목(晋州牧)조를 살펴보면, “진주목은 원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혹은 거타(居陁)라고도 하는데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2년(662)에 빼앗아 주를 설치하였고, 신문왕(神文王) 4년(684)에 거타주를 나누어 청주총관(菁州摠管)을 설치하였으며, 경덕왕은 강주라고 고쳤는데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이 다시 청주(菁州)로 고쳤다. 태조(太祖)는 다시 강주로 고쳤고, 성종(成宗) 2년(983)에 처음으로 전국에 12개의 목을 설치하였을 때 진주(晋州)는 그 중 하나였다. 14년(995)에는 12개 주 절도사를 두면서 진주정해군(晋州定海軍)이라고 불렀으며 이를 산남도(山南道)에 소속시켰다. 현종(顯宗) 3년(1012)에 절도사를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하였으며, 9년(1018)에 목으로 정하여 8개 목 중의 하나로 하였다. 진강(晋康) 또는 청주(菁州) 및 진양(晋陽)이라고도 부른다. 여기는 화개(花開), 살천(薩川) 2개의 부곡이 있고 또한 창선도(彰善島)가 있으며 이 주에 소속된 군이 2개, 현이 7개 있으며 그 관할 하에 지사군(知事郡)이 1개, 현령관(縣令官)이 3개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한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晋州牧) 건치연혁(建置沿革)조가 있는데, 내용상의 차이는 거의 없으나 다만, “본조(조선)에서는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시켰는데,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때에 지금 명칭(진주;晋州)으로 고쳐서 목으로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대감은 신라 때 병부(兵部)와 시위부(侍衛府)․ 패강진전(浿江鎭典)에 두었던 무관직으로 병부대감의 경우 진평왕(眞平王) 45년(623)에 설치하여 두 명이 정원이었으나 문무왕(文武王) 때 한 명을 증원하였다고 한다. 그 지위는 부서마다 각각 달랐다. 병부의 경우 대감은 관등이 급찬에서 아찬(阿湌)까지인 자를 뽑았고, 시위부에서는 대나마(大奈麻)에서 아찬인 자로 6명을, 패강진전에서는 사지(舍知)에서 중아찬(重阿湌)까지인 자 중 7명을 뽑았다. 『고려사』 권3 성종 6년(984)조를 보면 대감을 촌장(村長) 혹은 촌정(村正)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를 근거로 대감을 읍장(邑長)으로도 보는 견해가 있다.(강인구 외, 2003) 결국 대감은 적어도 관직명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나 임도(任道)가 의미하는 바는 불확실하다.

『삼국유사』 백엄사석탑사리조에 등장하는 이 임도대감에 대하여는 크게 세 가지의 견해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임도(任道)를 지명으로 보고 임도대감을 중앙의 공무를 위임 받고 그 지역을 순행하는 사자(使者)로 본 견해가 있다.(김두진, 1979) 두 번째는 임도를 사람의 이름으로 보고 대감을 직명으로 이해하 견해이다. 이는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성씨(姓氏)조에 임씨(任氏)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北村秀人, 1984) 마지막으로 임도를 주현(主縣)의 지방 세력으로 이해하고, 임도대감을 속현(屬縣) 소재의 지방 세력을 파악하여 실태를 보고하였던 직책으로 이해한 견해가 있다.(김일우, 1998) 그리고 이러한 견해 중에는 구체적으로 대감이 장리(長吏)에 의해 만들어진 문서를 계(界)의 중심지에서 모아 정리 및 검토를 하였을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김아네스, 1999)

주첩은 일반적으로 공문으로 이해되는데, 고려시대 상부(上府)에서 발행하는 포고문(布告文) 또는 통달문(通達文)으로 첩(貼)이라고도 하며, 신라시대로까지 올려보기도 한다.(點貝房之進, 1931) 현존하는 첩문(貼文)으로는 1262년에 작성된 상서도관첩(尙書都官貼)과 1357년에 작성된 승록사첩(僧錄司貼)이 있다. 두 가지 모두 행정에 관한 관서에서 작성한 장권(長券)의 문서를 의미하며, 주첩(柱貼)의 주(柱)자로 인해 기둥에 붙인 첩(貼)이라고 짐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허흥식, 1988)

참고문헌

鮎貝房之進, 1931, 『雜攷』第6輯 下卷, 朝鮮印刷株式會社.
김두진, 1979, 「고려광종대 전제왕권과 호족」『韓國學報』15.
北村秀人, 1984, 「高麗初期の在地支配機構管見」『人文硏究』36-9, 大阪市立大.
허흥식, 1988, 「한국 고문서학의 이론」『한국의 고문서』, 민음사.
김일우, 1998, 「고려초 국가권력의 지방지배와 그 체계」『고려초기 국가의 지방지배체계 연구』, 일지사.
김아네스, 1999, 「고려초기 지방지배와 使」『國史館論叢』87.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
伯嚴寺石塔舍利
開運三年丙午十月二十九日 康州界任道大監柱貼云 伯嚴禪寺坐草八縣[今草溪] 寺僧偘遊上座 年三十九云 寺之經始則不知 但古傳云 前代新羅時 北宅廳基捨置玆寺 中間久廢 去丙寅年中 沙木谷陽孚和尙 改造住持 丁丑遷化 乙酉年 曦陽山兢讓和尙來住十年 又乙未年 却返曦陽 時有神卓和尙 自南原白嵓藪 來入當院 如法住持 又咸雍元年十一月 當院住持得奧微定大師釋秀立 定院中常規十條 新竪五層石塔 眞身佛舍利四十二粒安邀 以私財立寶 追年供養條<第>一 當寺護法敬僧嚴欣伯欣兩明神及近岳等三位前 立寶供養條[諺傳 嚴欣伯欣二人 捨家爲寺 因名曰伯嚴 仍爲護法神] 金堂藥師前木鉢 月朔遞米條等 已下不錄

백엄사(伯嚴寺) 석탑 사리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任道大監) 주첩(柱貼)에 “백엄선사(伯嚴禪寺)는 초팔현(草八縣)[지금의 초계(草溪)]에 있는데, 절의 스님 간유(偘遊) 상좌(上座)는 나이가 39세이다.”라고 하였다. 절을 짓기 시작한 때는 알 수 없으나, 다만 고전(古傳)에 이르기를, “전대(前代)인 신라시대에 북택(北宅)에서 집터를 희사하여 이 절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중간에 오랫동안 폐사되었는데, 지난 병인년(丙寅年, 906)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陽孚) 화상(和尙)이 고쳐 짓고 주지를 하다가 정축년(丁丑年, 917)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乙酉年, 925)에 희양산(曦陽山) 긍양(兢讓) 화상이 와서 10년을 머물다가 다시 을미년(乙未年, 935)에 희양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신탁(神卓) 화상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에서 와서 이 절에 들어가 법에 따라 주지를 하였다. 또한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에서 늘 지켜야할 규칙 10조를 정하고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진신 불사리 42낱을 가져다 봉안하였다. 사재(私財)로써 보(寶)를 만들어 해마다 공양할 것을 제일로 하고, 이 절에서 불법을 수호하던 존경받는 스님 엄흔(嚴欣)과 백흔(伯欣)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岳) 등 세분 앞으로 보를 세워 공양할 것[세간에 전하기를, 엄흔과 백흔 두 사람은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름을 백엄(伯嚴)이라 하였고, 이에 호법신이 되었다고 한다], 금당의 약사여래 앞 나무 바리때에는 매월 초하루마다 쌀을 바꾸어 넣을 것 등이었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