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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회

기본정보

신라가 망한 후 옛 수도인 경주의 황폐한 모습을 보고 서리리의 탄식을 노래한 인물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외직(外職)에 있다가 신라가 망한 후 경주에 돌아왔으나 옛 수도였던 경주의 황폐한 모습을 보고 서리리의 탄식을 노래한 인물. 그 노래는 사라져 알 수가 없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김부대왕조에는 “신라가 이미 땅을 바쳐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阿干) 신회는 외직을 내놓고 돌아왔는데 도성이 황폐한 것을 보고 서리리의 탄식함이 있어 이에 노래를 지었다. 그 노래는 없어져서 알 수가 없다.(新羅旣納土國除 阿干神會罷外署還 見都城離潰 有黍離離嘆 乃作歌 歌亡未詳)”라고 하여 신회(神會)라는 인물이 서리리와 같은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 기사가 전하고 있다.

신회는 여기 이외에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지만 외직(外職)에 있다가 신라가 망한 후 관직을 포기하고 도성에 돌아왔다고 하므로 아간(阿干)의 위계를 가지고 있었던 경주 출신의 인물로 보인다. 그가 노래한 것은 전해지지 않지만 서리리와 같은 탄식을 하면서 지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라의 옛 수도였던 경주의 황폐한 모습을 보고 그 슬픔을 노래한 곡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서리리(黍離離)란 『시경(詩經)』 국풍(國風)의 왕풍(王風)편에 나오는 시를 가리킨다. 주(周)의 유왕(幽王)은 폭정으로 인하여 견융(犬戎)의 침입을 받아 살해되고, 평왕(平王)은 이를 피해 낙양으로 동천하였다. 몇 년 후에 주(周)의 대부(大夫)가 공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옛 도성이었던 호경(鎬京)에 이르렀는데, 호화롭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폐허 위에 기장만 무성하게 남아 있는 황폐한 모습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여기서 리리(離離)는 무성한 모습을 말한다. 그 시구는 다음과 같다.

땅에는 기장이 무성하게 자라고 기장의 싹은 매우 푸르구나(彼黍離離 彼稷之苗)
앞으로 가는 걸음걸이 천근만근, 마음은 떨려 정신은 혼미하다(行迈靡靡 中心摇摇)
나를 아는 사람은 근심이 있다고 할 것이요(知我者 谓我心忧)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을 구하느냐고 할 것이다(不知我者 谓我何求)
푸른 하늘은 저렇게 높건만 누가 이런 풍경을 만들었던고(悠悠苍天 此何人哉)

땅에는 기장이 무성하게 자라고, 기장엔 이삭이 올라왔구나(彼黍離離 彼稷之穗)
앞으로 가는 걸음걸이 천근만근, 마음은 혼란하여 술 취한 듯하구나(行迈靡靡 中心如醉)
나를 아는 사람은 근심이 있다고 할 것이요(知我者 谓我心忧)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을 구하느냐고 할 것이다(不知我者 谓我何求)
푸른 하늘은 저렇게 높건만 누가 이런 풍경을 만들었던고(悠悠苍天 此何人哉)

땅에는 기장이 무성하게 자라고, 기장엔 이미 열매가 맺혔구나(彼黍離離 彼稷之實)
앞으로 가는 걸음걸이 천근만근, 마음은 답답하여 기가 막혀 숨조차 쉴 수 없다)行迈靡靡 中心如噎)
나를 아는 사람은 근심이 있다고 할 것이요(知我者 谓我心忧)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을 구하느냐고 할 것이다(不知我者 谓我何求)
푸른 하늘은 저렇게 높건만 누가 이런 풍경을 만들었던고(悠悠苍天 此何人哉)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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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김부대왕)
太祖之孫景宗伷 聘政承公之女爲妃 是爲憲承皇后 仍封政承爲尙父 太平興國三年戊寅崩 諡曰敬順 冊尙父誥曰 勅姬周啓聖之初 先封呂主 劉漢興王之始 首<冊><蕭>何 自大定寰區 廣開基業 立龍圖三十代 躡麟趾四百年 日月重明 乾坤交泰 雖自無爲之主 乃<關>致理之臣 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承食邑八千戶金傅 世(處)鷄林 官分王爵 英烈振凌雲之氣 文章騰擲地之才 富有春秋 貴居茅土 六韜三略拘入胸襟 七縱五申撮歸指掌 我太祖<始修陸隣>{擲}之好 早認餘風 尋{時}頒駙馬之姻 內酬大節 家國旣歸於一統 君臣宛合於三韓 顯播令名 光崇懿範 可加號尙父都省令 仍賜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號 勳封如故 食邑通前爲一萬戶 有司擇日備禮冊命 主者施行 開寶八年十月日 大匡內議令兼摠翰林臣翮宣奉行 奉勅如右 牒到奉行 開寶八年十月日 侍中署 侍中署 內奉令署 軍部令署 軍部令無署 兵部令無署 兵部令署 廣坪侍郞署 廣坪侍郞無署 內奉侍郞無署 內奉侍郞署 軍部卿無署 軍部卿署 兵部卿無署 兵部卿署 告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尙父都省令上柱國樂浪{都}王食邑一萬戶金<傅> 奉勅如右 符到奉行 主事無名 郞中無名 書令史無名 孔目無名 開寶八年十月日下 史論曰 新羅朴氏昔氏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櫃>而降 或云乘金車 此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爲實事 今但<原>厥初在上者其爲己也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略 其行事也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宿衛 入學而誦習 于以襲聖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又憑王師之威靈 平百濟高句麗 取其地郡縣 可謂盛矣 然而奉浮屠之法 不知其弊 至使閭里比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農<浸>小 而國家日衰 幾何其不亂且亡也哉 於是時 景哀王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出遊鮑石亭 置酒燕<衍> 不知甄萱之至 與門外韓擒虎樓頭張麗華 無以異矣 若敬順之歸命太祖 雖非獲已 亦可佳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卽必覆其<宗>族 害及于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籍<郡><縣>以歸之 其有功於朝廷,有德於生民甚大 昔錢<氏>以吳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新羅功德過於彼遠矣我太祖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而顯宗自新羅外孫卽寶位 此後繼統者皆其子孫 豈非陰德也歟 新羅旣納土國除 阿干神會罷外署還 見都城離潰 有黍離離嘆 乃作歌 歌亡未詳
태조의 손자 경종 주는 정승공의 딸을 맞아 비를 삼으니, 이가 헌승황후이다. 이에 정승을 봉해서 상보(尙父)라고 하였고, 태평흥국 3년 무인(978)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이라고 하였다. 상보로 책봉하는 고(誥)에서 말하기를 “조칙을 내리노니 희주(姬周)가 성인의 사업을 열기 시작하였을 때 먼저 여주(呂主)를 봉했고, 유한(劉漢)이 왕업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먼저 소하(蕭何)를 봉하였다. 이로부터 온 천하를 평정하였고 기업을 널리 열었다. 용도(龍圖) 30대를 세우고 인지(麟趾) 4백년을 밟아 해와 달이 거듭 밝고 천지가 서로 조화하였으니, 비록 무위(無爲)의 군주로서 시작하였으나, 역시 보좌하는 신하로 해서 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8천호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거주하였고 벼슬은 왕의 작위를 받았고, 그 영특한 기상은 구름을 뚫고 올라서고 문장의 재주는 땅을 진동할만한 하였다. 장래가 넉넉하고, 봉토에서 귀하게 거주하였으며, 가슴 속에는 육도삼략(六韜三略)이 들어 있었고, 손바닥에는 칠종오신(七縱五申)을 잡아 쥐었다. 우리 태조는 비로소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는 우호를 닦으시니, 일찍이 전해 내려오는 풍도를 알아서 이내 부마의 혼인를 맺어 안으로 큰 절의에 보답하였다. 이미 나라가 통일되고 군신이 완전히 삼한으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올바른 규범은 빛나고 높았다. 상보 도성령의 호를 더해 주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의 호를 주니, 훈과 봉작은 전과 같고 식읍은 전후를 합쳐서 1만호가 되었다. 유사(有司)는 날을 택하고 예를 갖추어 책명(冊名)하고 일을 맡은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개보(開寶) 8년 10월 일. 대광 내의령 겸 총한림 신 핵선은 받들어 행하여 위와 같이 칙령을 받들고 직첩이 도착하는대로 봉행하라. 개보 8년 10월 일. 시중 서명, 시중 서명 내봉령 서명, 군부령 서명, 군부령 서명없음, 병부령 서명없음, 병부령 서명, 광평시랑 서명, 광평시랑 서명없음, 내봉시랑 서명없음, 내봉시랑 서명, 군부경 서명없음, 군부경 서명, 병부경 서명없음, 병부경 서명.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 상보 도성령 상주국 낙랑왕 식읍 1만호 김부에게 고하노니 위와 같이 칙령을 받들고 부(符)가 도착하는 대로 봉행하라. 주사 이름없음, 낭중 이름없음, 서령사 이름없음, 공목 이름없음. 개보 8년(975) 10월 일에 내림.”라고 하였다. 사론에서 말하기를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나오고, 김씨는 금궤 속에 들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 혹은 금으로 된 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더욱 황당해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고 한다. 이제 다만 그 시초를 살펴보면 위에 있는 이는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했고 남을 위해서는 너그러웠다. 그 관직을 설치하는 것은 간략히 했고 그 일을 행하는 것은 간소하게 하였다. 정성스럽게 중국을 섬겨서 바다 건너 조빙하는 사신이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았으며, 항상 자제들을 중국에 보내 숙위하게 하고 입학하여 외우고 익히게 하였다. 이리하여 성현의 풍화를 이어받고 미개한 풍속을 고치어 예의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또 천자의 군사의 위엄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취해 군현을 삼았으니 가히 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법을 숭상하여 그 폐단을 알지 못하여 마을에는 탑과 절이 이어지고, 백성들은 사찰로 도망가 중이 되게 하니 병사와 농민은 줄어들고, 나라가 날로 쇠퇴해가니 어찌 어지러워지고 망하지 않을 것인가? 이 때 경애왕은 더욱 음란하고 놀기에 바빠 궁인들과 좌우 근신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나가 술자리를 베풀고 즐겨 견훤이 오는 것도 몰랐으니, 저 문 밖의 한금호(韓擒虎)나 누각 위의 장려화(張麗華)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과 같은 것은 비록 마지못하여 한 것이지만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 때 만일 힘껏 싸우고 죽기로 지켜 왕의 군대에 항거하다가 힘은 꺾이고 형세가 궁지에 몰렸다면 반드시 그 종족이 멸망당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고명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귀순했으니 조정에 대해서는 공로가 있고 백성들에 대해서는 덕이 있는 것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옛날 전씨가 오월의 땅을 송나라에 바친 일을 소자첨은 충신이라고 했는데 이제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크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많고 그 자손들도 또한 번성하였다.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그 음덕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신라가 이미 땅을 바쳐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 신회는 외직을 내놓고 돌아왔는데 도성이 황폐한 것을 보고 서리리(黍離離)의 탄식함이 있어 이에 노래를 지었는데 그 노래는 없어져서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