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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선

기본정보

고려 성종 10년(991)에 김해부의 양전사의 관직을 지녔던 인물.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중대부 조문선은 고려 성종 10년(991)에 김해부의 양전사의 관직을 지녔던 인물로서 수로왕릉의 묘역의 전지를 조사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 의하면, 고려 성종 10년(991)에 김해부(金海府) 양전사(量田使)인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이 수로왕묘(露陵王廟)에 속한 전결(田結) 수가 많으므로, 15결(結)만 예전처럼 운용비를 충당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김해부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주도록 조사한 보고를 조정에 올린다. 그렇지만 정부에서는 수로왕의 제사를 위한 전지를 줄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조문선은 거듭하여 건의를 올리게 되는데 결국 조정에서는 절반만 능묘(陵廟)에 계속 속하게 하고, 절반은 그 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게 된다. 이후 조문선이 꿈을 꾸었는데, 칠팔 명의 귀신이 밧줄을 잡고 칼을 쥐고 와서 큰 잘못이 있으니, 목을 베어 죽이겠다고 하였는데, 이후 병이 들었으며 돌아가던 중에 객사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문선과 관련된 기록은 본 기사이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 문산계로서 종4품에 해당하는 중대부(中大夫)의 관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고려 건국 이후의 토지의 분급에서 발생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임명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전사(量田使)의 직책을 가지고 고려 성종 10년(991)에 김해 지역에 파견되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중앙 권력을 강화하고 유교를 장려하면서 지방 호족을 제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수로왕릉에 대한 관심은 떨어졌고, 조문선은 단소하게 양전 문제를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김해지역 호족들의 저항이 강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문선의 꿈에 나타난 칠팔 명의 귀신은 수로왕의 후손으로 구성된 김해 지역의 토호일 가능성이 높다. 비록 김해의 호족들이 조정의 수로왕릉에 대한 무관심에 강하게 저항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수로왕릉에 할당된 토지의 절반이 국가로 회수된 점을 통해서 중앙집권화를 위한 노력이 강화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김태식, 1999)

참고문헌

김태식, 1999, 「金海 首露王陵과 許王后陵의 補修過程 檢討」『韓國史論』41․42合,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 淳化二年 金海府量田使中大夫趙文善申省狀稱 首露陵王廟屬田結數多也 宜以十五結仍舊貫 其餘分折於府之役丁 所司傳狀奏聞 時廟朝宣旨曰 天所降卵 化爲聖君 居位而延齡 則一百五十八年也 自彼三皇而下 鮮克比肩者歟 崩後自先代 俾屬廟之壟畝 而今減除 良堪疑懼 而不允 使又申省 朝廷然之 半不動於陵廟中 半分給於鄕人之丁也 節使[量田使<稱>也]受朝旨 乃以半屬於陵園 半以支給於府之徭役戶丁也 幾臨事畢 而甚勞倦 忽一夕夢 見七八介鬼神 執縲紲握刀劒而至云 儞有大憝 故加斬戮 其使以謂受刑而慟楚 驚懼而覺 仍有疾瘵 勿令人知之 宵遁而行 其病不間 渡關而死 是故量田都帳 不著印也 後人奉使來 審檢厥田 <十>一結十二負九束也 不足者三結八十七負一束矣 乃推鞠斜入處 報告內外官 勅理足支給焉 又有古今所嘆息者 元君八代孫金銍王 克勤爲政 又切崇眞 爲世祖母許皇后 奉資冥福 以元嘉二十九年壬辰 於元君與皇后合婚之地創寺 額曰王后寺 遣使審量近側平田十結 以爲供億三寶之費 自有是寺五百(年)後 置長遊寺 所納田柴 幷三百結 於是右寺三<綱> 以王后寺在寺柴地東南標內 罷寺爲莊 作秋收冬藏之場 秣馬養牛之廐 悲夫 …
가락국기[문종조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 순화(淳化) 2년(991)에 김해부(金海府) 양전사(量田使)인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의 조사보고(申省狀)에서 말하기를, “수로왕묘(露陵王廟)에 속한 전결(田結) 수가 많으니, 마땅히 15결(結)로써 예전 관행대로 따르게 하고, 나머지는 김해부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해당 관청에서 그 장계를 전하여 임금께 아뢰니, 조정에서 지령(指令)하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성스러운 임금(聖君)으로 화생(化生)하여, 왕위에 있으면서 나이가 158세였다. 저 삼황(三皇) 이후로 이에 견줄 자가 드물 것이다. 돌아가신 후 선대로부터 묘(廟)에 속하게 한 전지(田地)인데, 지금에 줄여 없애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송구스러운 일이므로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양전사(量田使)가 거듭하여 아뢰니 조정(朝廷)에서는 그렇게 여겨서 절반은 능묘(陵廟)에 계속 속하게 하고, 절반은 그 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었다. 절사(節使)[양전사(量田使)를 칭한다.]가 조정의 뜻을 받고, 절반은 능원에 소속케 하고, 절반은 김해부의 요역에 동원되는 호정(戶丁)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양전사가) 몹시 피로하였는데, 갑자기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칠팔 명의 귀신이 밧줄을 잡고 칼을 쥐고 와서 말하기를, “네가 큰 잘못이 있으니, 목을 베어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 양전사가 형벌을 받는다며 아프다고 말하고, 놀라고 두려워서 깨어났다. (이로 인하여) 병이 들어서 남에게 알리지도 않고 밤에 도망하여 갔는데, 그 병은 조금도 낫지 않고 관문(關門)을 지나다가 죽었다. 이러한 까닭에 토지측량대장(量田都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사람들이 사명을 받들고 와서 그 밭을 자세히 조사해 보니 11결(結) 12부(負) 9속(束)뿐이고, 부족한 밭이 3결(結) 87부(負) 1속(束)이었다. 이에 잘못 들어간 부분(斜入處)을 추문(推問)하여 내외의 관서에 보고하고 칙명(勅命)으로 부족분을 지급하도록 처리하였다. 또한 고금에 탄식할 일이 있는데, 원군(元君)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이 정사(政事)에 부지런하고 또 진리를 숭상함(崇眞)이 간절하여 세조(世祖)의 어머니인 허황후(許皇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 452)에 원군과 황후가 혼례를 치룬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는 편액을 달았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 10결(結)을 측량하여 삼보(三寶)에 이바지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이 절이 생긴지 5백년 후에 또 장유사(長遊寺)를 설치하였는데, (그 절에) 납부된 전시(田柴)가 모두 3백결(結)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剛)이 왕후사(王后寺)가 이 절의 시지(柴地)의 동남쪽 표식 내에 있다고 하여, (왕후사를) 폐하고 전장(田莊)을 만들어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기르는 축사를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