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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보

기본정보

황제나 왕이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인물에게 사용한 존칭

일반정보

상보(尙父)란 칭호는 주(周)의 건국공신이며 무왕(武王)의 재상이었던 태공망(太公望) 여상(呂望)에게 올린 호이다. 상부(尙父)의 부(父)는 남자의 미칭(美稱)으로 음은 “보”이며, 보(甫)와 통용된다. 그러면서 은근히 아버지에 버금가는 대우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려 태조는 신라 경순왕인 김부와 후백제왕 견훤 등에게 상보(尙父)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김부대왕(金傅大王)조에는 고려 제5대왕인 경종이 즉위 후 신라 경순왕이었던 김부에게 상보(尙父)라는 존칭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권2 기이2 후백제 견훤조에는 고려 태조가 10년 연상인 후백제왕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자 상보(尙父)라는 칭호를 준 적이 있으며, 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권1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 경인(庚寅) 13년(930)조에서는 재암성장군(載岩城將軍) 선필(善弼)이 고려에 귀부하자 두터운 예로서 대우하고 상보의 칭호를 올렸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와 같이 상보란 칭호는 견훤, 김부 등 전왕(前王)과 선필 등 원로를 우대하는 칭호로서 이들을 포섭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상보(尙父)란 칭호는 주(周)의 건국공신이며 무왕(武王)의 재상이었던 태공망(太公望) 여상(呂望)에게 올린 호이다. 상보(尙父)의 부(父)는 남자의 미칭(美稱)으로 음은 “보”이며, 보(甫)와 통용된다. 그러면서 은근히 아버지에 버금가는 대우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문경현, 2000)

참고문헌

문경현, 2000, 『高麗史 硏究』, 경북대학교 출판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김부대왕)
太祖之孫景宗伷 聘政承公之女爲妃 是爲憲承皇后 仍封政承爲尙父 太平興國三年戊寅崩 諡曰敬順 冊尙父誥曰 勅姬周啓聖之初 先封呂主 劉漢興王之始 首<冊><蕭>何 自大定寰區 廣開基業 立龍圖三十代 躡麟趾四百年 日月重明 乾坤交泰 雖自無爲之主 乃<關>致理之臣 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承食邑八千戶金傅 世(處)鷄林 官分王爵 英烈振凌雲之氣 文章騰擲地之才 富有春秋 貴居茅土 六韜三略拘入胸襟 七縱五申撮歸指掌 我太祖<始修陸隣>{擲}之好 早認餘風 尋{時}頒駙馬之姻 內酬大節 家國旣歸於一統 君臣宛合於三韓 顯播令名 光崇懿範 可加號尙父都省令 仍賜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號 勳封如故 食邑通前爲一萬戶 有司擇日備禮冊命 主者施行 開寶八年十月日 大匡內議令兼摠翰林臣翮宣奉行 奉勅如右 牒到奉行 開寶八年十月日 侍中署 侍中署 內奉令署 軍部令署 軍部令無署 兵部令無署 兵部令署 廣坪侍郞署 廣坪侍郞無署 內奉侍郞無署 內奉侍郞署 軍部卿無署 軍部卿署 兵部卿無署 兵部卿署 告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尙父都省令上柱國樂浪{都}王食邑一萬戶金<傅> 奉勅如右 符到奉行 主事無名 郞中無名 書令史無名 孔目無名 開寶八年十月日下 史論曰 新羅朴氏昔氏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櫃>而降 或云乘金車 此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爲實事 今但<原>厥初在上者其爲己也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略 其行事也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宿衛 入學而誦習 于以襲聖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又憑王師之威靈 平百濟高句麗 取其地郡縣 可謂盛矣 然而奉浮屠之法 不知其弊 至使閭里比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農<浸>小 而國家日衰 幾何其不亂且亡也哉 於是時 景哀王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出遊鮑石亭 置酒燕<衍> 不知甄萱之至 與門外韓擒虎樓頭張麗華 無以異矣 若敬順之歸命太祖 雖非獲已 亦可佳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卽必覆其<宗>族 害及于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籍<郡><縣>以歸之 其有功於朝廷,有德於生民甚大 昔錢<氏>以吳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新羅功德過於彼遠矣我太祖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而顯宗自新羅外孫卽寶位 此後繼統者皆其子孫 豈非陰德也歟 新羅旣納土國除 阿干神會罷外署還 見都城離潰 有黍離離嘆 乃作歌 歌亡未詳
태조의 손자 경종 주는 정승공의 딸을 맞아 비를 삼으니, 이가 헌승황후이다. 이에 정승을 봉해서 상보(尙父)라고 하였고, 태평흥국 3년 무인(978)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이라고 하였다. 상보로 책봉하는 고(誥)에서 말하기를 “조칙을 내리노니 희주(姬周)가 성인의 사업을 열기 시작하였을 때 먼저 여주(呂主)를 봉했고, 유한(劉漢)이 왕업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먼저 소하(蕭何)를 봉하였다. 이로부터 온 천하를 평정하였고 기업을 널리 열었다. 용도(龍圖) 30대를 세우고 인지(麟趾) 4백년을 밟아 해와 달이 거듭 밝고 천지가 서로 조화하였으니, 비록 무위(無爲)의 군주로서 시작하였으나, 역시 보좌하는 신하로 해서 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8천호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거주하였고 벼슬은 왕의 작위를 받았고, 그 영특한 기상은 구름을 뚫고 올라서고 문장의 재주는 땅을 진동할만한 하였다. 장래가 넉넉하고, 봉토에서 귀하게 거주하였으며, 가슴 속에는 육도삼략(六韜三略)이 들어 있었고, 손바닥에는 칠종오신(七縱五申)을 잡아 쥐었다. 우리 태조는 비로소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는 우호를 닦으시니, 일찍이 전해 내려오는 풍도를 알아서 이내 부마의 혼인를 맺어 안으로 큰 절의에 보답하였다. 이미 나라가 통일되고 군신이 완전히 삼한으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올바른 규범은 빛나고 높았다. 상보 도성령의 호를 더해 주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의 호를 주니, 훈과 봉작은 전과 같고 식읍은 전후를 합쳐서 1만호가 되었다. 유사(有司)는 날을 택하고 예를 갖추어 책명(冊名)하고 일을 맡은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개보(開寶) 8년 10월 일. 대광 내의령 겸 총한림 신 핵선은 받들어 행하여 위와 같이 칙령을 받들고 직첩이 도착하는대로 봉행하라. 개보 8년 10월 일. 시중 서명, 시중 서명 내봉령 서명, 군부령 서명, 군부령 서명없음, 병부령 서명없음, 병부령 서명, 광평시랑 서명, 광평시랑 서명없음, 내봉시랑 서명없음, 내봉시랑 서명, 군부경 서명없음, 군부경 서명, 병부경 서명없음, 병부경 서명.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 상보 도성령 상주국 낙랑왕 식읍 1만호 김부에게 고하노니 위와 같이 칙령을 받들고 부(符)가 도착하는 대로 봉행하라. 주사 이름없음, 낭중 이름없음, 서령사 이름없음, 공목 이름없음. 개보 8년(975) 10월 일에 내림.”라고 하였다. 사론에서 말하기를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나오고, 김씨는 금궤 속에 들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 혹은 금으로 된 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더욱 황당해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고 한다. 이제 다만 그 시초를 살펴보면 위에 있는 이는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했고 남을 위해서는 너그러웠다. 그 관직을 설치하는 것은 간략히 했고 그 일을 행하는 것은 간소하게 하였다. 정성스럽게 중국을 섬겨서 바다 건너 조빙하는 사신이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았으며, 항상 자제들을 중국에 보내 숙위하게 하고 입학하여 외우고 익히게 하였다. 이리하여 성현의 풍화를 이어받고 미개한 풍속을 고치어 예의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또 천자의 군사의 위엄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취해 군현을 삼았으니 가히 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법을 숭상하여 그 폐단을 알지 못하여 마을에는 탑과 절이 이어지고, 백성들은 사찰로 도망가 중이 되게 하니 병사와 농민은 줄어들고, 나라가 날로 쇠퇴해가니 어찌 어지러워지고 망하지 않을 것인가? 이 때 경애왕은 더욱 음란하고 놀기에 바빠 궁인들과 좌우 근신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나가 술자리를 베풀고 즐겨 견훤이 오는 것도 몰랐으니, 저 문 밖의 한금호(韓擒虎)나 누각 위의 장려화(張麗華)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과 같은 것은 비록 마지못하여 한 것이지만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 때 만일 힘껏 싸우고 죽기로 지켜 왕의 군대에 항거하다가 힘은 꺾이고 형세가 궁지에 몰렸다면 반드시 그 종족이 멸망당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고명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귀순했으니 조정에 대해서는 공로가 있고 백성들에 대해서는 덕이 있는 것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옛날 전씨가 오월의 땅을 송나라에 바친 일을 소자첨은 충신이라고 했는데 이제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크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많고 그 자손들도 또한 번성하였다.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그 음덕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신라가 이미 땅을 바쳐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 신회는 외직을 내놓고 돌아왔는데 도성이 황폐한 것을 보고 서리리(黍離離)의 탄식함이 있어 이에 노래를 지었는데 그 노래는 없어져서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