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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

기본정보

고려(高麗) 태조 3년(920)에 설치된 시장

일반정보

유시(油市)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3년(920)에 남산(男山) 유암(乳岩) 아래 설치된 기름시장이다

전문정보

유시(油市)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3년(920)에 설치된 시장으로 『삼국유사』왕력편에는 “경진년에는 유암 아래에 유시를 설치하였다.(庚辰乳岩下立油市)” 라는 기록이 전한다.

유시는 송악(松岳) 지방의 무역상 출신인 고려 태조의 적극적인 상업정책으로 설치되었다. 태조는 919년 철원(鐵圓)에서 고려를 개국하고, 이듬해인 태조 2년(920)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뒤 대대적인 왕도 건설을 시행하였다. 『고려사(高麗史)』권1 세가1 태조 2년조의 “송악산 남쪽에 도읍을 정하였다. 시전을 배치하고 방리를 구분하였다.(定都于松嶽之陽 市立廛辨坊里)”는 기록과 같이 태조는 왕도를 건설하면서 궁전, 관청과 함께 어용상업을 위한 시전 행랑들을 건설하였다. 유시는 이과 같은 왕도 건설의 일환으로 고려 태조 3년(920)에 유암(乳岩)에 설치 된 것이다.(조병찬, 2004)

유시의 위치는 송악 남산 서쪽 기슭으로 비정된다. 조선후기에 작성된 개성부 읍지인 『중경지(中京誌)』권3 산천조에는 “유석은 남산 서쪽 기슭에 있다.(乳石在男山西麓)”라는 기록이 보인다. 유석(乳石)과 유암(乳岩)은 뜻이 서로 통하므로 유암이 위치한 곳은 송악의 남산 서쪽 기슭이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유시의 위치 역시 이곳에 비정되는 것이다.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남산는 영웅호걸을 키운다는 바위가 있어 자남산(子男山), 용수산(龍首山)이라고도 한다.(홍희유, 1989)

유시에서는 기름이 교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실록』권5 태조 5년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각 시의 이름을 판자에 쓰고 판매하는 물품을 그 밑에 아울러 그려서 각 소에 걸어 서로 섞이지 않게 하였다.(各市名 幷畫販物其下 掛於各所 俾不相雜)”라고 한 기록은 기존에 시전별로 전문화 되어 판매되고 있던 물종이 서로 섞이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논의이다. 그렇다면, 조선 이전에 이미 시전의 명칭은 판매 물종에 따라 붙여졌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시전의 명칭이 판매 물종에 따라 정해지는 형태 이미 고려시기부터 확인되며 이에 따라 유시(油市)는 곧 기름 종류를 판매하는 시전으로 이해된다고 하겠다.(서성호, 2000)

참고문헌

서성호, 2000, 「15세기 서울 都城의 상업」 『서울상업사』, 태학사.
조병찬, 2004, 『한국시장사』, 동국대학교출판부.

관련원문 및 해석

太祖[戊寅六月裔死 太祖卽位于鐵原京 己卯 移都松岳郡 是年 創法王 慈雲 王輪 內帝釋 舍那
又創天禪院 [卽普<濟>] 新興 文殊 (靈)通 地藏 前十大寺皆是年所創 庚辰 乳岩下立油市 故今俗利市云乳下 十月創大興寺 或系壬午 壬午 又創日月寺 或系辛寺 甲申 創外帝釋 新衆院 興國寺 丁亥 創妙寺 己丑 創龜山 庚寅安] 丙申統三
태조[무인년(918) 6월에 죽으니 태조가 철원경에서 즉위하였다. 기묘년(919)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이 해에 법왕·자운·왕륜·내제석·사나 등의 절을 세우고 또 천선원[곧 보제]·신흥·문수·영통·지장 등의 절을 세웠으니 앞의 10대 사찰은 모두 이 해에 창건되었다. 경진년(920)에 유암 아래에 유시를 설치하였다. 이 때문에 지금 항간에서는 시장에서 이익을 얻는 것을 유하라고 한다. 10월에 대흥사를 세우니 또는 임오년(922)의 일이라고도 한다. 임오년(922)에 또 일월사를 세우니 또는 신사년(921)의 일이라고도 한다. 갑신년(924)에 외제석·신중원·흥국사를 세우고, 정해년(927)에는 묘사를 기축년(929)에 귀산사를 세웠으며 경인년(930)에 안(이하미상)] 병신년(936)에 삼국을 통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