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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산 도선사

기본정보

비슬산에 있던 절

일반정보

비슬산에 있던 절로 최제안이 천룡사의 주지를 선출하는 데 이곳의 방식을 참고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탑상4 천룡사조에는 고려의 최제안이 신라말에 파괴된 천룡사를 중수하면서 지은 신서(信書)의 내용이 실려 있다. 신서 중에 절의 주지 선출 관련내용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팔공산 지장사와 비슬산 도선사 등 다른 절의 주지 선출 방식을 참고하고 있다. 도선사의 경우에는 희사한 토지 20결이 있는데, 유직(有職)과 무직(無職)은 물론 모름지기 계(戒)를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자를 택해 절에 있는 무리의 뜻에 따라 차례로 주지를 삼았다고 하였다. 신서를 지은 최제안은 이 풍습을 본받아 천룡사에서도 절의 무리 중에서 재주와 덕이 높은 자를 택해 주지로 삼겠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6 경상도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산천(山川)조에는 도선사가 있는 비슬산이 풍각현(豊角縣)의 서북 30리에 있다고 하였다.

도선사에 관해서는 더 이상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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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천룡사)
天龍寺
東都南山之南 有一峰屹起 俗云高位山 山之陽有寺 俚云高寺 或云天龍寺 討論三韓集云 雞林土內 有客水二條 逆水一條 其逆水客水二源 不鎭天災 則致天龍覆沒之災 俗傳云 逆水者 州之南馬等烏村南流川是 又是水之源 致<天>龍寺 中國來使 樂鵬龜來見云 破此寺 則國亡無日矣 又相傳云 昔有檀越有二女 曰天女龍女 二親爲二女創寺因名之 境地異常助道之場 羅季殘破久矣 衆生寺大聖所乳崔殷諴之子承魯 魯生肅 肅生侍中齊顔 顔乃重修起廢 仍置釋迦萬日道場 受朝旨 兼有信書願文 留于寺 旣卒 爲護伽藍神 頗著靈異 其信書略曰 檀越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柱國崔齊顔狀 東京高位山天龍寺殘破有年 弟子特爲聖壽天長民國安泰之願 殿堂廊閣房舍廚庫 已來興構畢 具石造泥塑佛聖數軀 開置釋迦萬日道場 旣爲國修營 官家差定主人亦可 然當遞換交代之時 道場僧衆不得安心 側觀入田 稠足寺院 如公山地藏寺 入田二百結 毗瑟山道仙寺 入田二十結 西京之四面山寺 各田二十結例 皆勿論有職無職 須擇戒備才高者 社中衆望 連次住持焚修 以爲恒䂓 弟子聞風而悅 我此天龍寺 亦於社衆之中 擇選才德雙高大德 兼爲棟梁 差主人鎭長焚修 具錄文字 付在剛司 自當時主人爲始 受留守官文通 示道場諸衆 各宜知悉 重熙九年六月日 具銜如前署 按重熙乃契丹興宗年號 本朝靖宗七年庚辰歲也

천룡사
동도(東都, 경주)의 남산 남쪽에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세상에서는 고위산(高位山)이라고 한다. 그 산의 남쪽에 절이 있는데, 세간에서는 고사(高寺) 혹은 천룡사(天龍寺)라고 한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서 말하길, “계림의 땅에는 객수(客水) 두 줄기와 역수(逆水) 한 줄기가 있는데,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하늘의 재앙을 진압하지 못하면 곧 천룡사가 뒤집혀 없어지는 재난에 이른다.”고 하였다. 속전(俗傳)에 이르길, “역수는 주(州)의 남쪽 마등오촌(馬等烏村)의 남쪽을 흐르는 개울이 이것이다.”라 하고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에 이른다. 중국에서 온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나라가 곧 며칠 안에 망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또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 단월(檀越, 시주)에게 두 딸이 있어 천녀(天女)·용녀(龍女)라 하였는데, 부모가 두 딸을 위하여 절을 세우고 그로 인하여 절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였다. 경내가 보통과 달라 불도를 돕는 도량이었는데 신라말에 쇠잔하여 파괴된 지 오래되었다. 중생사(衆生寺)의 대성(大聖, 관음)이 젖을 먹여 기른 최은함(崔殷諴)의 아들 승로(承魯)가 숙(肅)을 낳고, 숙(肅)이 시중(侍中)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제안(齊顔)이 중수하여 폐사를 일으켰다. 이에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두고 조정의 명을 받았으며, 겸하여 신서(信書)와 원문(願文)이 있어 절에 남겨 두었다. 그가 죽은 후 절을 지키는 신이 되어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함을 보였다. 그 신서(信書)에 대략 말하기를, “단월인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주국(柱國) 최제안(崔齊顔)이 쓴다. 동경 고위산의 천룡사가 쇠잔하고 파괴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제자(弟子, 최제안)가 특별히 임금께서 만수무강하며 백성과 나라가 편안하고 태평하기를 원하여 전당과 회랑, 방과 주방, 창고를 일으켜 세운 후에, 돌로 만든 부처와 흙으로 빚은 부처 몇 구를 갖추어 석가만일도량을 열었다. 이미 나라를 위하여 닦고 조영하였으니 관가에서 주지에게 뽑아 맡김이 또한 옳으나, (주지가) 번갈아 바뀌어 교대할 때를 당해서는 도량의 중들이 모두 안심하지 못하였다. 토지를 납입하여 사원을 고르게 충족시킨 것을 보면, 공산(公山, 팔공산) 지장사(地藏寺)의 납입한 토지 200결과 비슬산(毘瑟山) 도선사(道仙寺)의 납입한 토지 20결, 서경(西京) 사방에 있는 산사(山寺)의 각각 20결의 예와 같이, 모든 유직(有職)과 무직(無職)은 물론 모름지기 계(戒)를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자를 택해서, 절에 있는 무리의 뜻에 의하여 차례로 주지를 삼아 분향하고 수도[焚修]하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제자(최제안)가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하여 우리의 이 천룡사도 또한 절의 많은 무리 중에서 재주와 덕이 모두 높은, 대덕(大德)을 뽑아 동량(棟梁)을 겸하게 하고 주지로 삼아 길이 분향하고 수도하게 하고자 한다. 문자를 갖추어 기록해서 강사(剛司, 담당승직)에게 맡긴다. 당시의 주지로부터 시작해서 유수관(留守官, 동경의 지방장관)의 문서를 받아 도량의 모든 대중에게 보일 것이며, 각자 마땅히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중희(重熙) 9년(1040) 6월 일. 관함(官銜, 관직)을 갖추어 앞과 같이 서명하였다.” 살피건대 중희는 거란(契丹) 흥종(興宗)의 연호이니 본조(本朝, 고려) 정종(靖宗) 7년 경진년(庚辰年, 104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