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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

기본정보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선종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 봉암사가 위치해 있다.

일반정보

희양산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이 산의 남쪽에 이른바 선종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 봉암사가 있다. 『삼국유사』 백엄사석탑사리조에는 희양산의 긍양이 강주 백엄사에서 10년간 머물다가 다시 희양산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보이는 희양산은 곧 희양산문의 봉암사를 가리킨다. 봉암사는 지증대사 도헌이 창건하고 정진대사 긍양이 중창하였으며, 현재는 조계종의 종립선원으로서 최고의 수행도량으로 여겨지고 있다.

전문정보

희양산(曦陽山)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에 걸쳐 있는 높이 999m의 산이다.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처럼 보여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으며, 산세가 험한 편이다. 이 산의 남쪽 자락에 봉암사가 위치해 있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에서는, 백엄사의 주지 양부화상이 917년에 입적하자, 이후 희양산(曦陽山)의 긍양(兢讓)이 뒤를 이어 백엄사에서 10년을 살다가 다시 희양산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 기록의 희양산은 곧 이른바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희양산 봉암사(鳳巖寺)를 말하는 것이다.

희양산문의 종찰인 봉암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에 전한다. 비에 따르면, 지증대사 도헌은 경주 사람으로 속성은 김씨이고 자는 지선(智詵)이다. 17세에 구족계를 받고 계람산(鷄藍山, 계룡산) 수석사(水石寺)에서 수행하였다. 경문왕이 사신을 보내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함통 5년(경문왕 4년, 864)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심충(沈忠)이라는 사람이 지증대사 도헌의 명망을 듣고 찾아와 희양산에 있는 땅을 도헌에게 바치면서 선사(禪寺)를 짓도록 청하였다. 도헌은 그곳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이 때 희양산의 지세를 보고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라 했다고 한다. 또한 철불 2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중화(中和) 신축년(辛丑年, 881, 신라 헌강왕 7년)에 왕은 승통(僧統) 준공(俊恭) 등을 보내 절의 경계를 정하고 봉암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도헌은 그 다음해인 882년 12월에 입적하였다.

봉암사는 이후 후삼국기의 전란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가 청태 2년(935) 정진대사 긍양(兢讓, 878-956)에 의해 다시 중창되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보물 제172호, 이하 「정진대사비」)에 보인다. 비문에 따르면 긍양은 당에 유학했다가 돌아온 뒤 강주 백엄사에 머물다가, 도를 넓히기 위해 새로운 장소를 선택하고자 떠난 길에서 호랑이의 인도를 받아 희양산 중턱 봉암사의 자취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긍양은 이곳에 터를 잡아 선실(禪室)을 구축하고 문도들을 지도하면서 선문을 번창시켰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긍양이 먼저 희양산에 있다가 925년 백엄사로 갔고 10년 후 다시 희양산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정진대사비」에 따르면 긍양은 935년에 처음 희양산에 들어가 폐허로 남아 있던 봉암사를 중창했다고 한다. 긍양이 백엄사로 가기 전에 희양산에 먼저 있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대해서는, 이를 후대의 착오로 보는 견해(추만호, 1992)와 긍양이 도헌을 사상적으로 추모하여 희양산에 머물다가 이후 백엄사로 이동했다고 보는 견해(한기문, 2007)가 있다.

한편 희양산문의 개산조(開山祖)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약간의 이견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봉암사를 창건한 도헌을 희양산문의 개산조로 보고 있다.(김영수, 1938; 최병헌, 1972) 나말여초 선종 9산 조사(祖師)의 이름이 기록된 『선문조사예참의문(禪門祖師禮懺儀文)』에도 “희양산조사 산사현청 도헌국사(曦陽山祖師 山師現請 道憲國師)”라 하여 도헌이 희양산문의 조사로 되어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도헌이 다른 선사(禪師)들과 달리 중국에 유학하지 않고 독자적인 선문을 성립시켰다는 점에 주목한다. 또한 도헌이 안락사에 있다가 봉암사를 창건해 옮긴 것 자체가 새로운 산문을 개창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조범환, 2005) 당시 도헌의 사상에 대해서는 북종선과 남종선을 모두 배웠을 것이라는 견해(김영수, 1938)와 북종선의 점선(漸禪) 사상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라는 견해(김두진, 2003) 등이 있다.

그러나 희양산문의 실질적인 개산조는 도헌이 아니라 긍양이라고 보기도 한다. 도헌은 안락사(安樂寺)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봉암사에서는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으며, 「정진대사비」에서도 긍양이 봉암사로 가게 된 계기에 대해 도헌의 영향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도헌의 법계는 그의 법손인 긍양대에 이르러 북종선계인 법랑(法郞)-신행(愼行, 704-779)-준범(遵範)-혜은(慧隱)계에서 남종선계인 쌍계혜소(雙磎慧昭, 774-850)계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법계 개정은 긍양이 남종선 계보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종전 북종선 계보를 버리고 남종선 계보를 새롭게 취한 긍양을 희양산문의 실질적인 개산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김영태, 1979)

어쨌든 긍양이 중창한 이래 희양산 봉암사는 주요 선문 중 하나로 부상하였으나, 긍양 이후의 봉암사 사적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그 사세가 유지된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경상도 문경현 불우(佛宇)조에는 봉암사에 대해 양산사(陽山寺)에 있으며 지증대사비와 정진대사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현종(顯宗, 재위 1660-1674) 15년(1674)에 사원에 화재가 나 신화(信和)가 중수하였고 숙종(肅宗, 재위 1675-1720) 29년(1703)에도 화재로 불전과 요사채가 불에 타 곧 중수된 바 있으며, 순종(純宗, 재위 1907-1910) 원년(1907) 다시 화재가 나자 1915년에 주지 윤세욱(尹世煜)이 다시 중건하고 1927년에 지증대사비의 비각을 세웠다.(권상로, 1979)

현재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금색전, 조사전, 극락전 등 요사채 등이 있는데, 극락전과 요사채를 제외하고는 모두 근래에 새로 지어진 것이다. 보물 제1574호로 지정된 문경봉암사극락전(聞慶鳳巖寺極樂殿)은 대웅보전 동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높은 단층 몸체에 차양간을 둘러 마치 중층건물과 같이 보이는 독특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신라 경순왕이 창건하였다거나 혹은 이곳에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는 고려 말 조선 초에서 17세기 사이에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고 한다.(홍병화․김성우, 2007)

봉암사에는 국보 제315호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보물 제137호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 보물 제169호 봉암사삼층석탑(鳳巖寺三層石塔), 보물 제171호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 보물 제172호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보물 제1574호 문경봉암사극락전(聞慶鳳巖寺極樂殿), 시도유형문화재 제121호 봉암사마애보살좌상(鳳巖寺磨崖菩薩坐像), 문화재자료 제133호 환적당지경탑(幻寂堂智鏡塔), 제134호 함허당득통탑(涵虛堂得通塔), 제135호 봉암사석종형부도(鳳巖寺石鐘形浮屠)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봉암사에서는 1947년에 성철(性徹) 스님(1911-1993)의 주도 하에 엄격한 수행가풍을 유지하는 결사가 탄생되기도 하였다.(서재영, 2007) 봉암사는 1982년 6월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되었고, 1984년 6월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종립선원(宗立禪院)으로 결정되어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선승들이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수행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하였다.

참고문헌

김영수, 1938, 「曺溪禪宗에 就하야-五敎兩宗의 一派, 朝鮮佛敎의 根源」『震檀學報』9.
최병헌, 1972, 「新羅下代 禪宗九山派의 成立-崔致遠의 四山碑銘을 中心으로」『韓國史硏究』7.
권상로, 1979, 『韓國寺刹全書(上)』, 동국대학교 출판부.
김영태, 1979, 「曦陽山禪派의 成立과 그 法系에 대하여」『韓國佛敎學』4, 한국불교학회.
추만호, 1992, 「선종 법계 승계의 특징과 북종의 법계 변신」『나말여초 선종사상사 연구』, 이론과 실천.
김두진, 2003, 「나말여초 曦陽山門의 禪宗 사상」『韓國學論叢』26.
조범환, 2005, 「신라 하대 智證道憲과 曦陽山門의 성립」『新羅史學報』4.
서재영, 2007, 「봉암사 결사의 정신과 퇴옹성철의 역할」『한국선학』18, 한국선학회.
한기문, 2007, 「新羅 下代 眞鑑禪師의 活動과 梵唄 敎化의 意義」『大丘史學』89.
홍병화․김성우, 2007, 「희양산 봉암사 극락전의 연구-조성시기와 용도를 중심으로」『건축역사연구』54, 한국건축역사학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
伯嚴寺石塔舍利
開運三年丙午十月二十九日 康州界任道大監柱貼云 伯嚴禪寺坐草八縣[今草溪] 寺僧偘遊上座 年三十九云 寺之經始則不知 但古傳云 前代新羅時 北宅廳基捨置玆寺 中間久廢 去丙寅年中 沙木谷陽孚和尙 改造住持 丁丑遷化 乙酉年 曦陽山兢讓和尙來住十年 又乙未年 却返曦陽 時有神卓和尙 自南原白嵓藪 來入當院 如法住持 又咸雍元年十一月 當院住持得奧微定大師釋秀立 定院中常規十條 新竪五層石塔 眞身佛舍利四十二粒安邀 以私財立寶 追年供養條<第>一 當寺護法敬僧嚴欣伯欣兩明神及近岳等三位前 立寶供養條[諺傳 嚴欣伯欣二人 捨家爲寺 因名曰伯嚴 仍爲護法神] 金堂藥師前木鉢 月朔遞米條等 已下不錄

백엄사(伯嚴寺) 석탑 사리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任道大監) 주첩(柱貼)에 “백엄선사(伯嚴禪寺)는 초팔현(草八縣)[지금의 초계(草溪)]에 있는데, 절의 스님 간유(偘遊) 상좌(上座)는 나이가 39세이다.”라고 하였다. 절을 짓기 시작한 때는 알 수 없으나, 다만 고전(古傳)에 이르기를, “전대(前代)인 신라시대에 북택(北宅)에서 집터를 희사하여 이 절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중간에 오랫동안 폐사되었는데, 지난 병인년(丙寅年, 906)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陽孚) 화상(和尙)이 고쳐 짓고 주지를 하다가 정축년(丁丑年, 917)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乙酉年, 925)에 희양산(曦陽山) 긍양(兢讓) 화상이 와서 10년을 머물다가 다시 을미년(乙未年, 935)에 희양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신탁(神卓) 화상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에서 와서 이 절에 들어가 법에 따라 주지를 하였다. 또한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에서 늘 지켜야할 규칙 10조를 정하고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진신 불사리 42낱을 가져다 봉안하였다. 사재(私財)로써 보(寶)를 만들어 해마다 공양할 것을 제일로 하고, 이 절에서 불법을 수호하던 존경받는 스님 엄흔(嚴欣)과 백흔(伯欣)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岳) 등 세분 앞으로 보를 세워 공양할 것[세간에 전하기를, 엄흔과 백흔 두 사람은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름을 백엄(伯嚴)이라 하였고, 이에 호법신이 되었다고 한다], 금당의 약사여래 앞 나무 바리때에는 매월 초하루마다 쌀을 바꾸어 넣을 것 등이었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