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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현

기본정보

현재 강원도 강릉시(江陵市) 연곡면(連谷面)의 고려시대 지명

일반정보

현재의 강원도 강릉시(江陵市) 연곡면(連谷面)으로, 고구려와 신라 때는 지산현(支山縣)이었고, 고려 현종(顯宗) 이후부터 연곡현(連谷縣)으로 불려졌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탑상4 오대산문수사석탑기(五臺山文殊寺石塔記)조에는 오대산 문수사의 뜰에 매우 영험이 있는 신라시대의 석탑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옛 노인의 말을 인용한 것에 의하면, 옛날 연곡현(連谷縣)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탑 하나가 나타나서 배를 따라와 모든 물속의 동물들이 그 그림자를 보고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어부들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고, 분함을 참지 못하고 그림자를 찾아가보니 이 탑이 있어 함께 도끼를 휘둘러 그 탑을 쳐부수고 가버렸으니, 지금 이 탑의 네 귀퉁이가 모두 떨어진 것은 이 까닭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35 잡지(雜志)4 지리2 신라 명주(溟州)조에 의하면, 지산현(支山縣)은 본래 고구려의 현(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이 그대로 썼으며, 지금(고려)의 연곡현(連谷縣)이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속현조에는 연곡현(連谷縣)에 대하여, “부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 지산현(支山縣)이며 양곡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 때에 명주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그대로 예속시켰다”고 기록하였다. 현재의 강원도 강릉시(江陵市) 연곡면(連谷面)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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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오대산문수사석탑기)
五臺山文殊寺石塔記
庭畔石塔 蓋新羅人所立也 制作雖淳朴不巧 然甚有靈響 不可勝記 就中一事 聞之諸古老云 昔連谷縣人 具舡沿海而漁 忽見一塔隨逐舟楫 凡水族見其影者 皆逆散四走 以故漁人一無所得 不堪憤恚 尋影而至 蓋此塔也 於是共揮斤斫之而去 今此塔四隅皆缺者以此也 予驚嘆無已 然怪其置塔 稍東而不中 於是仰見一懸板云 比丘處玄 曾住此院 輒移置庭心 則二十餘年間 寂無靈應 及日者求基抵此 乃嘆曰 是中庭地 非安塔之所 胡不移東乎 於是衆僧乃悟 復移舊處 今所立者是也 余非好怪者 然見其佛之威神 其急於現迹利物如此 爲佛子者 詎可黙而無言耶 時正<隆>元年丙子十月日 白雲子記

오대산 문수사석탑기
뜰 가의 석탑은 아마 신라 사람이 세운 것 같다. 제작은 비록 순박하여 정교하지는 못하나 매우 영험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한 가지 일을 여러 옛 노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옛날 연곡현(連谷縣)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탑 하나가 나타나서 배를 따라오는데 모든 물속의 동물들이 그 그림자를 보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니, 이 때문에 어부들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어부들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그림자를 찾아가보니 이 탑이었다. 그래서 함께 도끼를 휘둘러 그 탑을 쳐부수고 가버렸는데, 지금 이 탑의 네 귀퉁이가 모두 떨어진 것은 이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에) 놀라고 감탄해 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탑의 위치가 조금 동쪽에 있고 중앙에 있지 않음을 괴이하게 여겨, 이에 현판 하나를 쳐다보니 거기에 이르길, “비구(比丘) 처현(處玄)이 일찍이 이 절에 있으면서 문득 탑을 뜰 한 가운데로 옮겼더니 (그 후) 20여년 동안 잠잠하여 아무런 영험이 없었다. 일자(日者)가 터를 구하여 이곳까지 와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안치할 곳이 아닌데 어째서 동쪽으로 옮기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스님들이 깨닫고 다시 옛 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나는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나, 부처님의 신령한 위엄을 보건대 그 자취를 나타내어 만물을 이롭게 함이 이와 같이 빠르니, 불자(佛子)된 사람으로서 어찌 잠자코 말하지 않겠는가? 때는 정륭(正隆) 원년(1156) 병자 10월 일(日)에 백운자(白雲子)가 기록한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