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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엄사 오층석탑

기본정보

백엄사(伯嚴寺)에서 진신 불사리 42낱을 봉안하기 위해 고려시대 새롭게 세운 5층 석탑

일반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백엄사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에 따르면, 고려시대 함옹(咸雍) 원년(1065) 백엄사(伯嚴寺)의 주지 득오미정대사석수립(得奧微定大師釋秀立)이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진신 불사리 42낱을 가져다 봉안하였다고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에 따르면 백엄사는 신라시대 세워졌으나, 오랫동안 폐사되어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들어와 양부화상에 의해 906년 재건되었으며 이후 925년 긍양화상도 이 절에서 10년간 머무르다 떠났다고 한다. 긍양이 떠난 뒤 신탁화상이 주지가 되었다고 전한다.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 득오미정대사석수립(得奧微定大師釋秀立)이 백엄사에서 늘 지켜야할 규칙 10조를 정하였는데,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진신 불사리 42낱을 가져다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규칙 10조는 사재(私財)로써 보(寶)를 만들어 해마다 공양할 것을 제1로 하여, 이 절에서 불법을 수호하던 스님 엄흔(嚴欣)과 백흔(伯欣)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岳) 등 세분 앞으로 보를 세워 공양할 것, 금당의 약사여래 앞 나무 바리때에는 매월 초하루마다 쌀을 바꾸어 넣을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엄흔과 백흔과 관련하여 『삼국유사』의 찬자는 세주로 절의 이름이 백엄(伯嚴)이라 칭해 진 것에 대하여 세간에서는 엄흔과 백흔 두 사람이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으므로 그 이름을 백엄(伯嚴)이라하였고, 이 둘이 호법신이 되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음을 기록하였다.

백엄사지와 관련하여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 대양면(大陽面) 백암리(伯岩里) 105번지 일대가 주목되고 있는데, 이곳은 과거 초계현에 속하였던 백암리로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된다. 또한 8-9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381호 백암리 석등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42호 대동사지(大同寺址)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정밀하게 가공된 석재 및 다량의 기와가 노출되어 있어 신라시대의 사찰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 바, 2006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이는 백엄사 오층석탑과 관련하여 이곳에서 석탑지가 발견되지 않아 백엄사와 석탑이 위치하였다고 단정 짓기는 어려운 실정이다.(경남문화재연구원, 2006)

참고문헌

경남문화재연구원, 2006,『陜川 伯岩里 石燈 周邊 整備事業敷地內 文化遺蹟 發掘調査 現場說明會 資料』.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
伯嚴寺石塔舍利
開運三年丙午十月二十九日 康州界任道大監柱貼云 伯嚴禪寺坐草八縣[今草溪] 寺僧偘遊上座 年三十九云 寺之經始則不知 但古傳云 前代新羅時 北宅廳基捨置玆寺 中間久廢 去丙寅年中 沙木谷陽孚和尙 改造住持 丁丑遷化 乙酉年 曦陽山兢讓和尙來住十年 又乙未年 却返曦陽 時有神卓和尙 自南原白嵓藪 來入當院 如法住持 又咸雍元年十一月 當院住持得奧微定大師釋秀立 定院中常規十條 新竪五層石塔 眞身佛舍利四十二粒安邀 以私財立寶 追年供養條<第>一 當寺護法敬僧嚴欣伯欣兩明神及近岳等三位前 立寶供養條[諺傳 嚴欣伯欣二人 捨家爲寺 因名曰伯嚴 仍爲護法神] 金堂藥師前木鉢 月朔遞米條等 已下不錄

백엄사(伯嚴寺) 석탑 사리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任道大監) 주첩(柱貼)에 “백엄선사(伯嚴禪寺)는 초팔현(草八縣)[지금의 초계(草溪)]에 있는데, 절의 스님 간유(偘遊) 상좌(上座)는 나이가 39세이다.”라고 하였다. 절을 짓기 시작한 때는 알 수 없으나, 다만 고전(古傳)에 이르기를, “전대(前代)인 신라시대에 북택(北宅)에서 집터를 희사하여 이 절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중간에 오랫동안 폐사되었는데, 지난 병인년(丙寅年, 906)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陽孚) 화상(和尙)이 고쳐 짓고 주지를 하다가 정축년(丁丑年, 917)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乙酉年, 925)에 희양산(曦陽山) 긍양(兢讓) 화상이 와서 10년을 머물다가 다시 을미년(乙未年, 935)에 희양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신탁(神卓) 화상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에서 와서 이 절에 들어가 법에 따라 주지를 하였다. 또한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에서 늘 지켜야할 규칙 10조를 정하고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진신 불사리 42낱을 가져다 봉안하였다. 사재(私財)로써 보(寶)를 만들어 해마다 공양할 것을 제일로 하고, 이 절에서 불법을 수호하던 존경받는 스님 엄흔(嚴欣)과 백흔(伯欣)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岳) 등 세분 앞으로 보를 세워 공양할 것[세간에 전하기를, 엄흔과 백흔 두 사람은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름을 백엄(伯嚴)이라 하였고, 이에 호법신이 되었다고 한다], 금당의 약사여래 앞 나무 바리때에는 매월 초하루마다 쌀을 바꾸어 넣을 것 등이었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