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요동성육왕탑

기본정보

고구려 요동성 곁에 있던 것으로 전하는 탑

일반정보

고구려 요동성 곁에 있던 탑으로 아육왕의 연기설화와 관련이 있으며, 고구려의 성왕이 처음에 토탑을 보고 신앙심이 생겨 다시 목탑을 세웠다고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탑상4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조에는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옛 고구려 성왕이 국경을 순찰하다가 요동성에 이르렀는데, 오색구름이 땅을 덮고 있어 구름 속을 찾아가니 중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가까이 가면 사라지고 멀리가면 나타났다. 그 옆에는 삼중(三重)의 토탑(土塔)이 있어 위는 솥을 덮은 것 같았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다시 중을 찾아가 보니 그 곳에는 풀만 있었는데, 그 곳을 파보니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또 파보니 범서(梵書=불경)가 있었는데, 신하들이 이를 해석해 보고 불탑(佛塔)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성왕이 신앙심이 생겨서 칠중목탑(七重木塔)을 세웠으며 불법이 전해지자 그 시말을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고 하며, 이후에 그 탑은 높이를 줄이면서 보수했지만 결국 썩어서 무너졌다는 내용도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3 탑상4 요동성육왕탑조의 뒷부분에는 고구려 성왕이 어떤 왕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와 함께 고구려 성왕을 동명성제(=동명성왕, 동명왕)로 추측한다는 전언(傳言) 하나를 소개하였으나, 『삼국유사』의 찬자는 이러한 견해를 부정하였다. 그 이유로 동명왕은 전한(前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기원전 19)에 승하하였는데, 그 때는 아직 한(漢)나라에도 불경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의 배신(陪臣)인 동명왕이 범서를 알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성왕을 동명성왕으로 보는 것에 대해 반대하면서도 이 기사는 발해(渤海) 시기에 건립된 사찰이나 탑과 관련된 사실이 잘못 기록되어 전하게 된 것으로 파악한 연구가 있었다.(고유섭, 1967)

그리고 북한에서는 벽화고분인 요동성총(遼東城塚)이 조사되면서(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1958), 요동성육왕탑 기사에 사실성을 도출해 내고자 하는 연구도 나왔다. 요동성총에 관한 최초 보고에서는 벽화의 내용 중에서 누각 같은 다층집으로 표현한 건물로만 서술하였지만, 이를 목탑으로 파악하면서 요동성육왕탑의 존재와 연결해서 살펴보는 입장이 제기된 것이다. 흔히 요동성도로 알려진 벽화에는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어 성곽이 그려졌는데, 내성에는 1층과 3층 건물, 외성에는 1·2·3층 건물이 각각 한 채씩이 배치되어 있다. 성벽에는 문루와 누각들이 그려져 있으며 외성의 안쪽에는 “요동성(遼東城)”이라고 쓴 묵서명이 확인된다. 한편 외성의 외곽 우측면에는 상단이 박락되고 2층까지만 확인되는 다층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바로 이 벽화로 그려진 건물을 요동성육왕탑으로 파악한 것이다.(장상렬, 1967)

아울러 이러한 연구를 수용하면서 논지를 보강한 연구가 있다. 일반적으로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기와를 덮은 건물은 건립되는 위치가 중요하다는 전제에서 성 외곽에 위치한 다층건물을 분석하였다. 여기서 이 건물이 만약에 관청 건물이라면 성 외곽에 배치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렇지만 평양성 외곽에 위치한 금강사(金剛寺)처럼 성 외곽에 사찰이 건립된 경우를 참고한다면 요동성 외곽의 다층 건물은 사원과 관련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 상단에 벽화가 소실되어 2층만 확인되지만, 그림의 비율로 보아서 3층 이상의 다층건물이 확실하므로, 요동성육왕탑과 관련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왕탑의 건립연대와 관련해서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장악하고 불교가 이미 수용된 시기의 왕인 광개토왕을 성왕으로 파악하였다. 즉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2년(385)년조에서는 고국양왕(故國壤王, 재위 384-391년)이 6월에 4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동성을 점령하였다가 11월에 연(燕)의 모용농(慕容農)이 요동을 점령하면서 고구려군이 요동에서 다시 물러나게 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14년(404)에 연이 고구려의 요동성을 침공하였으나 실패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385년에서 404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고구려가 다시 요동성을 장악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국양왕대나 광개토대왕 집권초반 어느 시점에 탑이 건립되었다는 것이다.(문명대, 1983)

이와 달리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8년(392)에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도록 하였다는 교를 내린 기사에 주목하여, 고국양왕대에 일시적이지만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확보하게 되었을 때 고국양왕이 요동 지역을 순행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국양왕은 이 때 중국의 불탑을 보게 되었으며,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높아지게 되었기 때문에 교를 내리고 불탑을 건립했다고 파악하는 것이다.(김선숙, 2004)

참고문헌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1958, 「평안남도 순천군 룡봉리 료동성총 조사보고」『대동강 류역 고분 발굴 보고』, 과학원 출판사.
고유섭, 1967, 『韓國塔婆의 硏究』, 고고미술동인회.
장상렬, 1967, 「료동성탑」『고고민속』1967-1.
문명대, 1983, 「高句麗 佛塔의 考察」『歷史敎育論集』5.
김선숙, 2004, 「『三國遺事』 遼東城育王塔條의 '聖王'에 대한 一考」『新羅史學報』1.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요동성육왕탑)
遼東城育王塔
三寶感通錄載 高麗遼東城傍塔者 古老傳云 昔高麗聖王按行國界次 至此城 見五色雲覆地 往尋雲中 有僧執錫而立 旣至便滅 遠看還現 傍有土塔三重 上如覆釜 不知是何 更往覓僧 唯有荒草 掘尋一丈 得杖幷履 又掘得銘 上有梵書 侍臣識之 云是佛塔 王委曲問詰 答曰 漢國有之 彼名蒲圖王[本作休屠王 祭天金人] 因生信 起木塔七重 後佛法始至 具知始末 今更損高 本塔朽壞 育王所統一閻浮提洲 處處立塔 不足可怪 又唐龍朔中 有事遼<左>行軍薛仁貴 行至隋主討遼古地 乃見山像 空曠蕭條 絶於行往 問古老云 是先代所現 便圖寫來京師[具在<右>函] 按西漢與三國地理志 遼東城在鴨綠之外屬漢幽州 高麗聖王 未知何君 或云東明聖帝 疑非也 東明以前漢元帝建昭二年卽位 成帝鴻嘉壬寅升遐 于時漢亦未見<貝>葉 何得海外陪臣 已能識梵書乎 然稱佛爲蒲圖王 似在西漢之時 西域文字或有識之者 故云梵書爾 按古傳 育王命鬼徒 每於九億人居地 立一塔 如是起八萬四千於閻浮界內 藏於巨石中 今處處有現瑞非一 蓋眞身舍利 感應難思矣 讚曰 育王寶塔遍塵寰 雨濕雲埋蘚纈<斑>想像當年行路眼 幾人指點祭神墦

요동성의 육왕탑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고려(高麗,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곁의 탑은 옛 노인들이 전하여 말하기를, 옛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러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는 것을 보고 가서 구름 속을 찾아보니 한 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서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문득 사라지고 멀리서보면 다시 나타났다. (스님의) 곁에는 3층의 토탑(土塔)이 있었는데, 상단은 솥을 덮은 것 같았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가서 스님을 찾아보니 다만 거친 풀만 있을 뿐이었다. (그곳을) 한 장(丈)정도 파서 찾아보니 지팡이와 신발을 얻을 수 있었고, 또 파서 명문(銘文)을 얻었는데, 명문 위에는 범서(梵書)가 있었다. 시종하는 신하가 알아보고 이것이 불탑이라고 말하였다. 왕이 자세히 물어보니 답해서 말하기를, (이것은) 한국(漢國)에 있었는데,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본래는 휴도왕(休屠王)이라고 했는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金人)이다]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왕은) 이로 인하여 믿음이 생겨서 7층 목탑을 세웠는데 후에 불법이 비로소 전해지자 그 시말을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탑의) 높이가 줄어서 본래 탑이 썩어서 무너졌다. 육왕(育王, 아육왕, 재위 기원전 268-232)이 통일한 염부제주(閻浮提洲)에는 곳곳에 탑이 세워졌으니 괴이할 것이 없다. 또 당(唐) 용삭(龍朔) 연간(661-663) 중에 요동의 좌측에 전쟁이 있을 때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가 수(隋)의 황제가 토벌한 요동의 옛 땅에 이르렀다. (그가) 이내 산의 모습이 텅 비어 매우 쓸쓸하여 사람의 왕래가 끊어진 것을 보고 늙은이에게 물었다. 늙은이가 답하기를 이는 옛날에 나타난 것이라고 하므로 (그것을) 그려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모두 우자함(右函)에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三國)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록(鴨綠)의 밖에 있어 한(漢)의 유주(幽州)에 속하는데, 고구려의 성왕(聖王)은 어떤 임금인지 알 수 없다. 혹 동명성제(東明聖帝, 동명성왕, 재위 기원전 37-19)라고도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동명은 전한(前漢) 원제(元帝, 재위 기원전 49-33)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성제(成帝, 재위 기원전 33-7) 홍가(鴻嘉) 임인(기원전 19)에 승하하였으며, 그때 한(漢)은 패엽(貝葉)을 보지 못했는데 어찌 해외의 배신(陪臣)이 벌써 범서(梵書)를 알 수 있겠느냐. 그러나 부처를 포도왕(蒲圖王)이라고 칭했으니, 서한(西漢)때 서역문자를 아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범서하고 말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샆펴 보건데, 아육왕의 귀신의 무리에게 명령하여 9억명의 사람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를 세우게 했는데, 이렇게 해서 염부계(閻浮界) 내에 8만 4천개를 세워서 큰 돌 속에 소장했다. 지금 곳곳에 상서러운 것이 보이는 것이 하나가 아니니 대개 진신사리(眞身舍利)는 감응을 헤아리기 어렵다. 찬한다. “아육왕의 보탑은 속세 곳곳에 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혀서 이끼마저 아롱졌네. 그때 길손들의 안목을 상상하면 몇 사람이나 탑에 제사를 지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