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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기본정보

7세기 말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하여 926년 거란에 멸망된 한국의 고대 국가.

일반정보

7세기 말 대조영(大祚榮)에 의해 건국되어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된 국가로, 건국 주체 및 주민구성 문제에 있어 한국사와 중국사의 귀속문제가 논쟁이 되고 있는 나라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이편에서 발해사를 서술하여 발해사를 한국사의 한 갈래로 인식하고 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靺鞨渤海)조는 크게 앞부분의 발해(渤海) 관련 내용과 뒷부분의 말갈(靺鞨) 관련 내용으로 나뉜다. 그 중 발해와 관련된 내용은 1)『통전(通典)』을 인용하여 대조영의 출자, 국호, 왕위계승, 지방제도와 멸망에 대한 내용을 싣고 그에 대한 세주를 덧붙인 부분과, 2)가탐(賈耽)의 『군국지(郡國志)』 및 『삼국사(三國史)』를 인용하여 발해의 영토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고 중간에 찬자의 견해를 밝힌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로 『통전』의 인용 부분은 현전하는 『통전』에서 명확히 확인되지 않으며, 『신당서(新唐書)』 권219 열전144 북적(北狄) 발해조에 이와 유사한 내용이 있다.

발해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건국되어 신라와 함께 “남북국(南北國)”으로 불린 나라이다. 고구려 멸망 후 30여년이 지난 696년 요서지방에서 일어난 거란족 이진충(李盡忠)의 난을 계기로 대조영의 아버지라고 하는 걸걸중상(乞乞中象)과 말갈족 걸사비우(乞四比羽) 등이 당에 반기를 들었고, 그 뒤를 이은 대조영이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동모산(東牟山)에서 발해를 건국했다고 한다.

그 건국 연대에 대해 『구당서(舊唐書)』 권199하 열전149하 북적 발해말갈(渤海靺鞨)조에서는 성력(聖歷) 연간 즉 698년에서 700년 사이에 건국되었다고 하였으나, 발해가 존립하고 있을 당시인 892년 일본인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에 의해 편찬된 『유취국사(類聚國史)』권193 수속부(殊俗部) 발해(渤海) 상(上)에는 698년에 건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대부분 발해의 건국연대를 698년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대조영이 동쪽으로 이동할 때 그 뒤를 쫓던 이해고(李楷固)가 천문령에서 전투를 벌인 시기를 700년 6월에서 멀지 않은 시점으로 보고, 대조영의 건국은 천문령 전투 이후인 700년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노태돈, 1996)

발해의 국호와 관련하여, 『삼국유사』 기이편에서는 발해와 관련된 조목을 “말갈발해”라고 하였지만, 『구당서』에는 “말갈발해”가 아닌 “발해말갈”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발해 건국 당시의 국호는 진국이었다. 이에 대해 『구당서』와 『책부원귀(冊府元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진국(振國)”이라 하였으나, 『신당서』에는 “진국(震國)”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진(振)과 진(震)의 발음이 서로 유사하므로, 대조영은 국호를 정할 때 걸걸중상이 당에게 받았던 “진국공(震國公)”이라는 호칭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송기호, 1995) 또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도, 『신당서』보다는 『구당서』가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점에서 “진국(振國)”이 발해 건국 당시의 본래 국호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종복, 2005)

이후 당이 선천(先天) 원년(713) 사신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한다. 이 사실은 『구당서』와 『신당서』에 모두 전하는데, 『신당서』에는 “이때부터 당이 말갈의 호칭을 버리고 발해로만 전칭(專稱)하였다.(自是始去靺鞨號 專稱渤海)”라는 기록이 덧붙여져 있고 『삼국유사』에서도 『통전』을 인용한 부분에서 같은 내용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기록을 참고하여 발해의 국호가 이때에 진국에서 발해로 바뀌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한규철, 1994)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그 전까지는 말갈로 불리다가 선천 연간에 당에 의해 발해군왕에 책봉되어 발해 너머 일정 지역에 대한 통치를 위임받자, 이를 바탕으로 나중에 발해를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김종복, 2005) 후자의 견해에서는 『구당서』 본기에는 738년까지 “발해말갈”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책부원귀』에는 741년까지 “발해말갈”이 나타난다는 점을 참고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삼국사』나 『신라고기』에는 건국 당시부터 “발해”라는 국호가 사용된 것처럼 기록되어 차이가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서 『통전』과 『신라고기』 등을 인용하여 언급한 대조영의 출자 및 주민구성과 관련된 내용은 발해사 연구의 가장 큰 쟁점 중 하나이다. 『구당서』와 『신당서』,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에 그와 관련된 내용이 서로 달리 전하기 때문이다.

먼저 『구당서』 권199하 열전149하 북적 발해말갈(渤海靺鞨)조에서는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에 대해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高麗) 별종(別種)이다.(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라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인 듯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신당서』 권219 열전144 북적(北狄) 발해조에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高麗)에 부속(附屬)된 자이며, 성은 대씨(大氏)이다.(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라고 하여, 대조영 집단이 정치적으로는 고구려에 부속된 무리였으나 종족적으로는 마치 고구려와 다른 “속말말갈”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한편 『신오대사』 권74 사이부록(四夷附錄)3 발해조에는 “발해는 본래 말갈(靺鞨)이라 불렀는데, 고려의 별종이다.(渤海本號靺鞨 高麗之別種也)”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발해를 다민족국가로 규정하고, 대조영을 비롯한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고구려와 다른 말갈인이었다는 시각이 제기된 바 있다.(白鳥庫吉, 1933) 이러한 이원적 주민구성론은 이후에도 계속 수용되어, 고구려 멸망 후에도 자체적인 조직과 결속력을 유지하던 대조영 집단이 말갈족과 화합 및 연대의식을 토대로 단일집단으로 발전하여 발해를 건국하였고, 여기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이 귀속했다고 보거나(노태돈, 1981), 발해 건국집단은 말갈인과 고구려인의 두 종족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이 중 고구려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고 이해하는 견해(송기호, 1995), 태백산 지역의 고구려유민과 속말수(粟末水) 지역의 주민(속말말갈)이 발해 건국의 중심 집단이었다고 보는 견해(임상선, 1999) 등이 제기되었다. 발해국 성립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고구려인 집단이었고, 대조영은 고구려 무장(武將)의 한 사람이었으며 이들이 동쪽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다수 참여하게 되었다는 북한학계의 시각도 여기에 포함된다.(박시형, 1979) 이러한 입장은 발해가 스스로 고구려를 칭했다는 점과 일본이 발해를 고구려(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점, 그리고 『구당서』의 발해-고구려 계승설 등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발해의 주민이 대부분 고구려인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즉 “말갈”은 여진 등을 아울러 부른 범칭(汎稱)인 동시에 고구려 변방주민들의 비칭(卑稱)이었으며 예맥과 부여의 후손이면서 고구려의 주민이었으므로, 발해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고구려유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는 것이다.(한규철, 1996)

한편 중국학계에서는 『신당서』의 기록을 더욱 중시하면서, 발해는 피지배층뿐 아니라 지배층까지도 고구려와 다른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보고 있다. 특히 1980년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후에는 발해의 자주성을 부인하고 책봉과 조공기록에 근거하여 당나라의 지방정권인 “홀한주도독부(忽汗州都督府)” 내지 “발해군(渤海郡)”으로 간주하고, 그 건국 주체도 “말갈”이었다고 하였다. 『구당서』의 “고려별종” 기록에 대해서는 별종은 원래의 동종(同種)에서 갈라져 나온 분종(分種)이 아니며 종족적으로 다른 부락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고, 대조영이 말갈족으로서 일찍이 고구려의 통치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고려별종”으로 지칭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魏國忠 외, 2006)

이 외 퉁구스어 종족인 말갈족들이 주민의 기본을 이루기는 했지만 발해는 기본적으로 고구려․말갈․위구르․거란․실위(室韋)․소그드․중국 민족들이 포함된 다민족국가였으며,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이 가장 크기는 하였으나 발해는 한국사나 중국사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국 “말갈사”였다고 보는 러시아 학계의 견해도 있다.(에.붸.샤브꾸노프, 1994)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여러 문헌을 인용한 뒤에 “발해는 말갈의 별종인데, 다만 개합(開合)이 같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의견을 첨부하고 있는데, 그 의미가 분명하지는 않다. 여기에 보이는 “개합”을 개구호(開口呼)와 합구호(合口呼)의 음운학 용어로 설명하여 발(渤)과 말(靺), 해(海)와 갈(鞨)을 유사음으로 보고, 당이 말갈과 음이 유사한 옛 군명인 발해를 말갈의 아칭(雅稱)으로 차용했다는 견해도 있다.(王承禮, 2000) 그러나 『책부원귀』 권971 조공4에는 개원(開元) 29년(741)에도 “발해말갈”이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발해가 말갈과 발음이 유사하거나 또는 아화(雅化)된 명칭이라면 왜 동일어 또는 유사어의 반복을 계속해서 사용했는지의 문제가 남는다. 따라서 이는 말갈과 발해의 연관성만을 강조하려는 억지 견해라는 비판도 있다.(김종복, 2005)

전체적으로 발해사는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818-830) 시기를 전후하여 2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는 다시 2기로 구분되는데, 건국자 대조영으로부터 2대 무왕(武王, 719-737), 3대 문왕(文王, 737-793)까지는 발전기로, 무왕대와 문왕대에는 국가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주변의 여러 부락을 복속시키면서 영토를 크게 넓혔고, 당으로부터 “발해국왕(渤海國王)”이라는 책봉호를 받았다. 4대 폐왕(廢王, 793)부터 9대 간왕(簡王, 817-818)까지는 내분기로, 여러 왕이 즉위하자마자 곧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당시 발해의 귀족층이었던 “국인(國人)”들의 권력쟁탈전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한편 후기 역시 2기로 구분되는데, 10대 선왕부터 14대 대위해(大瑋瑎, 894-906?)까지는 중흥 및 융성기로, 13대 대현석(大玄錫, 871-894?)대에는 가장 넓은 영토를 획득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15대 대인선(大諲譔, 894?-906)대에 거란의 침략을 받고 926년 멸망하였다.

참고문헌

白鳥庫吉, 1933, 「渤海國に就いて」『史學雜誌』44-12.
박시형, 1979, 『발해사』,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노태돈, 1981, 「渤海 建國의 背景」『大丘史學』19.
에.붸.샤브꾸노프, 1994,『러시아 연해주와 발해 역사』, 민음사.
한규철, 1994, 『발해의 대외관계사』, 신서원.
송기호, 1995, 『渤海政治史硏究』, 일조각.
노태돈, 1996, 「발해의 성립과 발전」『한국사10: 발해』, 국사편찬위원회.
한규철, 1996, 「渤海國의 주민구성」『韓國史學報』1.
임상선, 1999, 『발해의 지배세력연구』, 신서원.
王承禮, 2000, 『中國東北的渤海國與東北亞』, 吉林文史出版社.
김종복, 2005, 「渤海 國號의 성립 배경과 의미」 『韓國史硏究』128.
魏國忠․朱國枕, 2006, 『渤海國史』, 中國社會科學院.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
靺鞨[一作勿吉]渤海
通典云 渤海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世子襲<位>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 [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 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 [據此 則鞨海又分爲二國也]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 今東眞] 羅第六祗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 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按東明帝立十年 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 南沃沮二十餘家 來投新羅 又赫居世五十二年 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말갈[또는 물길]발해
『통전』에 이르길,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고, 선천(先天) 연간[현종 임자(壬子)]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己未)]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왕위를 이어 받자 명황은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후당의 천성(天成)초에 거란이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그 후에는 거란에 의해 지배되었다.[『삼국사』에 이르길,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고, 개원 20년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甲戌)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신라고기』에 이르길,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시작과 끝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의 동북쪽 모서리 밖에 있다] 가탐의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며 신라의 천정군[「지리지」에는 삭주의 영현으로 천정군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다] 으로부터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에는 백제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고 하였다.[이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 나뉘어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길,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다. 또 말갈 땅은 아슬라주에 접해있다고 하였다. 또 「동명기」에는 졸본성의 지계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함]에 접하였다하고, 신라 제6대 지마왕 14년[을축]에 말갈병이 크게 북경에 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후위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물길은 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흑수․옥저는 동파의 「지장도」를 보면 진한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동명제 즉위 10년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고 또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니, 또한 동옥저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서 흑수는 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