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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성국

기본정보

발해의 융성기를 중국인들이 부른 칭호

일반정보

발해는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시기(818-830)에 중흥을 이룩하여 11대 대이진(大彛震, 831-857), 12대 대건황(大虔晃, 857-871), 13대 대현석(大玄錫, 871-894)대에 융성기를 맞이하여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전문정보

발해는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시기(818-830)에 중흥을 이룩하여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조에 따르면, 『통전』을 인용하여 발해가 해동성국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당서』 권219 열전144 북적 발해조에도 역시 발해를 가리켜 중국인들이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선왕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이전까지는 대조영의 직계손으로 왕위가 이어지다가 이때부터 그의 동생인 대야발의 후손으로 바뀌게 되었다. 선왕은 818년 간왕(簡王, 817-818)을 이어 왕위에 올라 연호를 건흥(建興)이라고 하였고 정치・외교적으로 새로운 정책을 시도하였다.

선왕은 즉위 초인 818년과 820년에 당(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사공(檢校司空)으로 책봉 받았고, 매년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안정된 대당관계를 강화해 나갔다. 이러한 선왕의 적극적인 대당외교는 발해가 대외적으로 팽창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선왕대에는 요동지역과 북쪽의 여러 말갈, 신라에 대한 정복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요동지역은 당시 안사의 난(755-763) 이후 독자적인 소국을 형성한 소고구려국이 존재하였지만 선왕은 이를 병탐하여 장령현(長寧縣)을 설치하였다. 또한 북쪽의 여러 말갈에 대한 복속을 단계적으로 전개하여 불열(拂涅)・철리(鐵利)・우루(虞婁)・월희(越喜)・흑수(黑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선왕 원년(818)에서 3년(820)사이에는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박진숙, 1998)

이와 같이 발해의 대외 정복활동은 선왕 때에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그 결과 사방의 경계가 이 무렵에 완성되어 『신당서』 권219 열전144 북적 발해조에 보이는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이 완비되었다. 따라서 이 때에 이르러 대동강과 니하(泥河, 지금의 용흥강)를 경계로 신라와 국경선을 맞대게 되었다. 또한 선왕대에 대일본관계 역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재위 12년 동안 일본에 5번이나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선왕의 적극적인 중흥노력에 힘입어 그 다음에 즉위한 11대 대이진(大彛震, 831-857), 12대 대건황(大虔晃, 857-871), 13대 대현석(大玄錫, 871-894)에 이르기까지 발해는 크게 융성하게 되는데, 마침내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송기호, 1995)

참고문헌

송기호, 1995, 『발해정치사연구』, 일조각.
박진숙, 1998, 「발해 선왕대의 대일본외교」『韓國古代史硏究』14.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
靺鞨[一作勿吉]渤海
通典云 渤海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世子襲<位>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 [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 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 [據此 則鞨海又分爲二國也]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 今東眞] 羅第六祗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 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按東明帝立十年 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 南沃沮二十餘家 來投新羅 又赫居世五十二年 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말갈[또는 물길]발해
『통전』에 이르길,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고, 선천(先天) 연간[현종 임자(壬子)]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己未)]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왕위를 이어 받자 명황은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후당의 천성(天成)초에 거란이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그 후에는 거란에 의해 지배되었다.[『삼국사』에 이르길,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고, 개원 20년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甲戌)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신라고기』에 이르길,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시작과 끝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의 동북쪽 모서리 밖에 있다] 가탐의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며 신라의 천정군[「지리지」에는 삭주의 영현으로 천정군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다] 으로부터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에는 백제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고 하였다.[이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 나뉘어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길,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다. 또 말갈 땅은 아슬라주에 접해있다고 하였다. 또 「동명기」에는 졸본성의 지계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함]에 접하였다하고, 신라 제6대 지마왕 14년[을축]에 말갈병이 크게 북경에 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후위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물길은 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흑수․옥저는 동파의 「지장도」를 보면 진한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동명제 즉위 10년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고 또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니, 또한 동옥저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서 흑수는 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