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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기본정보

대조영이 동모산에 세운 나라의 국호(698-713)

일반정보

698년 대조영이 동모산에 세운 나라의 국호로 진국(震國) 혹은 진국(振國)이라고 한다

전문정보

698년 대조영이 동모산에 세운 나라의 국호로 진국(震國) 혹은 진국(振國)이라고 한다. 『삼국유사』권1 기이1 말갈발해조에 인용된 『통전』에는 진단(震旦), 『구당서』권199 열전149 북적 발해말갈조와 『동문선(東文選)』 권33 표전(表箋)의 최치원의「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는 진국(振國)이라 하였고, 『신당서』권219 열전144 북적 발해조에는 진국(震國)으로 표기되어 차이를 보인다.

진(振)과 진(震)에 대해서 일찍부터 『신당서』발해전이 발해의 문물제도에 대한 풍부한 기록을 싣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인정되어 진(震)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진(震)은 불교의 동방대진나(東方大震那)와도 관계가 있으며, 보다 직접적으로는 주역(周易)의 “제출호진(帝出乎震)”에서 나온 것으로 동방(東方)을 의미한다고 한다.(稻葉岩吉, 1915) “제출호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대조영이 영주에서 요동을 거쳐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동방을 의미하는 진(震)을 국호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김종복, 2005)

그러나 대조영이 표방한 명칭은 진국(振國)이 옳다는 견해도 있다.『신당서』에는 중화사상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어서 편찬시에 『구당서』의 진(振)과 뜻이 통하고, 당을 중심으로 동방의 의미를 갖는 진(震)으로 고쳤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인민을 구제하는 뜻의 진민(振民)과 결부시켜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구제한 사실에서 진(振)이 유래되었다고 한다.(酒寄雅志, 1976) 또한 『구당서』와 『책부원귀』등 더 오래된 기록에 초기 국호가 진(振)으로 표기되어 있고, 진(震)이 의미하는 동방은 당(唐)에 대한 상대적 위치이므로 나라의 위력이 사방에 떨치는(진흥) 큰 나라라는 의미의 진(振)으로 보기도 한다.(박시형, 1979)

한편, 713년 당 예종(睿宗)은 최흔(崔忻)을 진국에 보내어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하고, 아들 대무예(大武藝)를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발해는 진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다가 당과 우호적인 관계로 전환하면서 발해를 공식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稻葉岩吉, 1915, 『增訂滿洲發達史』, 日本評論社.
酒寄雅志, 1976, 「渤海の國號に關する一考察」『朝鮮史硏究會會報』44.
박시형, 1979, 『발해사』,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김종복, 2005, 「渤海 國號의 성립 배경과 의미」『한국사연구』128.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말갈발해)
靺鞨[一作勿吉]渤海
通典云 渤海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世子襲<位>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 [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 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 [據此 則鞨海又分爲二國也]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 今東眞] 羅第六祗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 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按東明帝立十年 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 南沃沮二十餘家 來投新羅 又赫居世五十二年 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말갈[또는 물길]발해
『통전』에 이르길,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고, 선천(先天) 연간[현종 임자(壬子)]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己未)]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왕위를 이어 받자 명황은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후당의 천성(天成)초에 거란이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그 후에는 거란에 의해 지배되었다.[『삼국사』에 이르길,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고, 개원 20년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甲戌)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신라고기』에 이르길,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시작과 끝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의 동북쪽 모서리 밖에 있다] 가탐의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며 신라의 천정군[「지리지」에는 삭주의 영현으로 천정군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다] 으로부터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에는 백제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고 하였다.[이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 나뉘어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길,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다. 또 말갈 땅은 아슬라주에 접해있다고 하였다. 또 「동명기」에는 졸본성의 지계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함]에 접하였다하고, 신라 제6대 지마왕 14년[을축]에 말갈병이 크게 북경에 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후위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물길은 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흑수․옥저는 동파의 「지장도」를 보면 진한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동명제 즉위 10년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고 또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니, 또한 동옥저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서 흑수는 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