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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국

기본정보

위만조선의 근처에 있으면서 삼한(三韓)의 옛 땅에 있었다고 하는 정치 집단의 단위

일반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위만조선의 근처에 있던 진번(眞番)과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왕래하려 하였다고 한다. 이는 『한서(漢書)』 조선전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여기서의 진국은 삼한(三韓)의 옛 땅에 있었다는 세력으로 이해된다. 진국(辰國)이 삼한 고지(故地) 전역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나, 기원전 2세기 말 위만조선의 주변에 있었던 여러 개의 국(衆國) 가운데 가장 저명하게 알려진 대표적인 정치체로, 금강유역에 있었던 세력이 진국(辰國)이었다고 이해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위만조선의 근처에 있던 진번(眞番)과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왕래하려 하였다고 한다. 이는『한서(漢書)』 조선전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여기서의 진국은 삼한(三韓)의 옛 땅에 있었다는 세력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한서』가 참고한『사기』 조선열전(朝鮮列傳)의 현재 통행본(남송 이후)에는 “진번방중국(眞番旁衆國)”으로, 북송본에는 “진번방진국(眞番旁辰國)”으로 기록되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한편, 북송 초인 983년에 편찬된 『태평어람(太平御覽)』 권780에는 “『사기』에 이르길,…진번 옆의 중국.(史記曰…眞番旁衆國)”이라 되어 있어, 북송 때까지는 진국(辰國)이었을 것으로 보았던 기존의 통설과 배치되기도 한다. 『사기』는 북송 순화 5년(994)에 교감이 시작되어 997년에 처음 간행되었으므로, 『태평어람』에서 인용한 『사기』는 북송본 이전의 고본(古本) 계통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에 따르면 북송본 이전 당나라 때의 『사기』에는 중국(衆國)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박대재, 2006) 이러한 판본의 문제 때문에 진국(辰國)설과 중국(衆國)설로 나누어져 있다.

그동안 진국(辰國)을 실제가 아닌 관념의 소산으로 보는 설이 있었고(三品彰英, 1946), 한반도 남부의 부족연맹체(部族聯盟體)를 지칭하는 진국(辰國)이 있었다고 보는 설(이병도, 1976), 중국(衆國)이 타당하다고 보는 설(정중환, 2000), 절충적으로 중국(衆國)이 곧 진국(辰國)이라는 설 등이 제기되었으나(권오영, 1995), 대체로 진국(辰國)으로 보는 쪽이 우세한 편이다.(이현혜, 1997)

일반적으로 진국설(辰國說)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진번(眞番)을 예로 들어 당시의 정치발전단계를 고려함이 없이 국명(國名)으로서 진국(辰國)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진국(辰國)으로 해석한다 하여도 그것은 여러 나라 가운데서 하나인 진국(辰國)이지, 삼한(三韓)의 옛 땅에 진국(辰國)만이 있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근본적인 문제는 당시 존재하였던 정치집단의 성격에 있는 것으로, 중국(衆國) 가운데 하나인 진국(辰國)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진번(眞番)과 대비되는 정치발전상의 의미를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조선(朝鮮)과 진국(辰國)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시기에 존재했던 정치집단으로 둘만을 인식하는 것보다는 “진번방진국(眞番旁辰國)”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당대의 실상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곧, 기원전 2세기 말 진번과 함께 그 주변에 여러 개의 국(衆國)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가장 저명하게 알려진 대표적인 국이 바로 진국(辰國)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김정배, 1986)

진국(辰國)과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진왕(辰王)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진국(辰國)이 곧 마한의 최대 군장(君長)인 진왕(辰王)이 통치하는 나라로 이해한 견해가 있었다.(이병도, 1976) 그러나 진왕이 등장하는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 단계에서 진국(辰國)은 이미 멸망한 “고지진국(古之辰國)”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선대의 진국(辰國)과 후대의 진왕(辰王)을 직접 결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김정배, 1986)

진국(辰國)의 영역에 대하여, 『후한서』에서는 진국이 삼한 전부의 전신이라고 하여, 마치 진국이 삼한 고지 전역에 걸쳐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어, 이를 근거로 진국의 범위를 한강이남 전역으로 보기도 한다.(이병도, 1976;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79) 한편, 『후한서』의 전거 사서인 『삼국지』에는 진한만이 옛날의 진국이라 하여, 진국이 진한만의 후신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후한서』는 『삼국지』를 대부분 전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기록을 좀 더 신빙하고 있다.(전해종, 1980)

진국(辰國)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강유역설(천관우, 1989), 금강유역설(김정배, 1986; 이현혜, 1997), 낙동강유역설(박순발, 1998) 등이 있는데, 남한지역에서 출토된 초기 철기유적과 전한경(前漢鏡) 등 고고학 자료에 의거할 때 진국(辰國)의 공간범위는 공주(公州)-익산(益山) 방면의 금강유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견해도 있다.(박대재, 2006)

참고문헌

三品彰英, 1946, 「史實と考證 -魏志東夷傳の辰國と辰王-」『史學雜誌』 55-1.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79, 『조선전사』2 고대편,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전해종, 1980, 『東夷傳의 文獻的硏究』, 일조각.
김정배, 1986,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고려대학교출판부.
천관우,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권오영, 1995, 「三韓社會 ‘國’의 구성에 대한 고찰」 『三韓의 社會와 文化』, 신서원.
이현혜, 1997, 「삼한의 정치와 사회」,『韓國史』4, 국사편찬위원회.
박순발, 1998, 「前期 馬韓의 時·空間的 位置에 대하여」『馬韓史 硏究』, 충남대학교 출판부.
정중환, 2000, 『加羅史硏究』, 혜안.
박대재, 2006,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馳>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彘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船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幷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唊)[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唊)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