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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난타

기본정보

동진으로부터 백제에 불교를 전래한 인도의 승려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인도에서 중국 동진(東晉)을 거쳐 침류왕 즉위 원년(384)에 백제에 와서 불교를 전래한 승려이다. 인도 유가계통의 신이적(神異的)이고 정서적인 불교와 함께, 동진의 격의불교(格義佛敎)도 함께 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문정보

마라난타(摩羅難陀)는 인도에서 중국 동진(東晉)을 거쳐 침류왕 즉위 원년(384)에 백제에 와서 불교를 전래한 승려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마라난타와 관련된 기사는, 침류왕 즉위 원년(384)에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왔고 이듬해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10인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삼국유사』 권3 흥법3 난타벽제(難陁闢濟)조에는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인용하여, 백제 제 15대 침류왕 즉위 갑신(甲申, 동진 효무제 태원(太元) 9년, 384)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晉)에서 오자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모셔 예우하고 공경하였고, 이듬해 을유(乙酉)에 새 도읍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짓고 열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이것이 백제 불법의 시초라고 하였다. 또 아신왕 즉위년(392) 2월에 교서를 내려 불법(佛法)을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였으며, 마라난타는 번역하면 동학(童學)이라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침류왕 즉위년(384) 가을 7월조에는, “사신을 진(晉)에 보내 조공하였고,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에서 왔으며,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모셔 예우하고 공경하니, 불법(佛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秋七月 遣使入晉朝貢 九月 胡僧 摩羅難陀自晉至 王迎之 致宮內禮敬焉 佛法始於此)”고 기록하였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침류왕 2년(385) 봄 2월조에는,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열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11월에 왕이 죽었다.(二年 春二月 創佛寺於漢山 度僧十人 冬十一月 王薨)”고 기록하였다.

『삼국유사』 권3 흥법3 난타벽제조는 백제본기를 인용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침류왕(枕流王)조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대체적인 내용은 비슷하나, 『삼국유사』 목판본에서는 백제본기(百濟本紀)를 백제본기(百濟本記)로 쓰고 있으며, 마라난타가 백제에 도착한 달인 9월을 『삼국사기』에 있는 그대로 옮기지 않고, 그 다음의 호승(胡僧) 이하 부분부터 옮겨놓았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한산(漢山)”을 “새 도읍[新都] 한산주(漢山州)”로 바꾸었다.

또 『삼국유사』 권3 흥법3 난타벽제조에 의하면, 침류왕의 원자(元子)인 아신왕(阿莘王)이 즉위하면서, 그해(392) 2월에 불법을 높여 믿고 복을 구하라는 교지를 내려 그의 아버지인 침류왕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 이 “불법을 높여 믿고 복을 구하라.(崇信佛法求福)”는 자구(字句)는 고구려·백제의 불교초전 기사에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기사에 대하여 백제의 진사왕이 재위 8년(392) 11월에 죽었으므로 아신왕의 즉위년에는 2월이 없다는 점과, 『삼국사기』에는 이 기사가 빠진 점을 들어 기록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있으며(박윤선, 2004), 2월을 12월의 오기로 보면서 기록의 신빙성을 인정하는 견해가 있다.(조경철, 2005)

『해동고승전』 권1 석마라난타(釋摩羅難陀)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스님 마라난타는 호승(胡僧)이다. 신이(神異)와 감통(感通)이 그 경지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교화하는 데 뜻을 두어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옛 기록에 따르면, 본래 인도 간다라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법을 전하고 향의 연기를 증거로 하여 벗을 불러 들였다. 위험에 부딪히고 험난한 일을 겪었지만 어려움과 괴로움을 무릅쓰고 인연이 있으면 따라 나서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밟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백제 제 15대 침류왕(枕流王) 즉위 원년(384) 9월에 진(晉)으로부터 오니 왕이 교외에 나가 영접하여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공경히 받들어 공양하며 그의 설법을 들었다. 윗사람들이 좋아하므로 아랫사람들도 교화되어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켜 함께 칭찬하고 받들어 행하였다. 이에 마치 파발을 두어 명령을 전달하는 것과 같이 빨랐다. 왕 2년(385) 봄에 한산(漢山)에 절을 창건하고 승려 10명을 출가시키니, 법사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는 고구려 다음으로 불교를 일으켰다. 거슬러 헤아려보면 마등(摩騰)이 후한(後漢)에 들어온 지 280여 년이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때는 침류왕(沈流王) 원년(384) 9월에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東晉)에서 오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와 관련된 문헌자료는 물론, 백제 한성시기 당시에 불교가 들어왔다는 고고학적 성과도 미비하여, 일본학자들에 의해 백제의 불교 전래는 침류왕 즉위 원년이 아니라 뒷 시기인 524년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고(末松保和, 1954; 田村圓澄, 1977), 아직까지도 이 설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측 학자의 주장 논거가 되는 사료는 『일본서기』 추고천황(推古天皇) 32년(624) 4월조에 보이는 백제승 관륵(觀勒)의 상표문(上表文)이다. 이 상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저 불법은 인도로부터 중국 한나라에 이르러 300년을 지나 이를 백제에 전했는데, 그리고 겨우 100년이다. 그런데 우리 백제의 성왕이 일본 천황의 현명함을 듣고 불상과 불경을 보냈는데 아직 100년이 차지 않았다.(夫佛法 自西國至于漢 經三百年 乃傳之於百濟國 而僅一百年矣 然我王聞日本天皇之賢哲 而貢上佛像及內典 未滿百歲)” 이 가운데 백제에 불교가 전해진 지 겨우 100년이라는 내용에 근거하여, 관륵이 상표문을 올린 624년을 기준으로 삼아 백제에 불교가 전해진 연대를 524년이라고 보는 것이다.(鎌田茂雄, 장휘옥 역, 1992)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뚝섬 출토 불상, 연화문 기와 등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미 비판이 있었고, 관륵이 위와 같은 말을 하게 된 배경을 다른 곳에서 찾아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이기백, 1996) 관륵의 상표문은 승려가 조부(祖父)를 도끼로 내리친 사건을 빌미로 천황이 승려에 대한 탄압을 하려 하자 관륵이 계율의 강조와 승관의 설치를 통하여 승려를 단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상표문(上表文) 가운데 일부분이므로, 이 상표문을 인도에서 중국, 백제, 일본에 불교가 전해지는 경로의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율(律)과 승관(僧官)의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에 의하면, 관륵의 상표문에서 “그리고 겨우 100년이다”의 해석은 “(백제불교의 전래가)관륵이 상표문을 올린 624년과 100년의 차이가 난다” 등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백제의 율(律)과 승관(僧官)의 정비가 624년과 비교하여 100년이 되었다”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이는 관륵이 백제의 율과 일본의 불교전래를 대비시키면서, 일본에 시급히 율의 정비와 승관 설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는 것이 된다. 백제에서 율의 정비는 관륵이 상표문을 올린 624년과 100년의 차이가 나는 524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인용된 「미륵불광사사적」에 의하면, 백제의 승려 겸익(謙益)은 무령왕 22년(522) 인도로 율(律)을 구하기 위한 구법여행을 떠나 성왕 4년(526) 오부율문(五部律文)을 가지고 귀국하여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하여 백제 율종(律宗)의 비조(鼻祖)가 되었다고 하니, 관륵은 겸익에 의한 율의 정비를 염두에 두고 이에 기반하여 일본의 율의 정비와 승관 설치를 건의하였다는 것이다.(조경철, 2002)

아울러, 침류왕의 어머니인 근구수왕비의 이름이 비구니를 뜻하는 아이(阿尒)라는 데서 침류왕의 불교 수용 이전에 왕실에서 불교를 접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아이(阿尒)는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조분이사금조에 보이는 아이혜(阿彌兮), 『삼국유사』 왕력에 보이는 아니(阿尼) 등과 같은 말이며, 여성을 표시하는 우리의 고어(古語)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신라본기와는 달리 모계(母系)의 표시가 없는 백제본기에서 침류왕의 어머니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특이하며, 범어(梵語)에서 비구니(比丘尼)를 아니(阿尼)라고 부르므로, 만일 이 범어의 차용이라면 이것은 혹 침류왕 때의 불교 전래와 관련을 가졌는지도 모른다.(이병도, 1977)

한편, 침류왕 시대 이전에 이미 백제에 불교가 전해졌으며, 침류왕 때의 초전(初傳) 기록은 공전(公傳)에 불과할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목정배, 1989) 또한, 고구려와 신라의 불교 전래 설화에 비추어 볼 때 백제는 그것이 빠져있다면서, 침류왕 이전 고이왕 어느 시기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김두진, 1996)

백제 한성시대의 불교와 관련된 유물로는 서울 뚝섬에서 발견된 400년경 작품인 금동불좌상과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연화문 기와가 언급되고 있다.(김원룡, 1987) 이 불상에 대해서는 한성시대 백제의 수입품이라는 견해가 있고(황수영, 1974), 중국제를 복사한 제품이라는 설이 있는데(문명대, 1978), 어느 견해를 따르던 간에 불교 공인 이전에 우세했던 백제 불교의 가능성은 커진다. 하남시 인근에서도 백제의 절터로 추정할 만한 곳이 있다는 보고가 있다.(오순제, 2002)

백제는 마라난타가 오던 침류왕 원년(384) 가을 7월에 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으니, 마라난타는 백제의 조공에 대한 답례로 백제의 사신과 함께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라난타를 맞이하는 침류왕의 영접태도가 매우 정중하였다는 것에서, 국가 간의 사절을 맞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각적인 회답과 왕의 환대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백제와 동진 간에는 불교 수용에 대해서 쌍방의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마라난타는 인도에서 중국에 와 머무른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일이 있으면 어디든 갔다고 전하고 있으므로, 그의 이러한 성향이 그로 하여금 백제에 불교를 전하는 사신의 역할을 맡을 수 있게 한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마라난타 기사를 그 앞 조공 기사와 아울러 본 까닭은, 마라난타가 백제 궁실로 오는데 걸리는 도정(道程)과 그가 띤 사명 및 외교적 관례를 참작한 것이다. 백제와 동진이 서로 사신을 주고받을 때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없지만, 신라의 경주에서 당의 장안까지 갔던 견당사(遣唐使)의 예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이때 황해를 건너는데 걸리는 시간은 당은포에서 등주까지 15일, 회진에서 양자강 하구까지 12일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권덕영, 1997) 이에 따라 백제와 동진의 순수 여정을 계산해보면, 편도는 17-20일에서 22-25일 정도 걸리며, 왕복으로는 24-34일에서 40-50일 정도 걸리므로, 여유시간을 감안하더라도 7월에 백제를 떠난 사신과 함께 마라난타가 9월에 충분히 돌아올 수 있다.(조경철, 2005)

침류왕은 이듬해인 재위 2년(385) 2월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10명의 승려를 도승(度僧)하는 등 불교 수용 이후 절차에 따라 불교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도승(度僧)이란 말은 “득도위승(得度爲僧)”을 줄인 말로, 불법(佛法)에 입문하는 수도자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스승으로부터 불계(佛戒)를 받는 등 소정의 절차를 밟는 것을 득도(得度)라 하며, 그러한 의례법식(儀禮法式)을 거쳐 승려가 되는 것이므로 도승(度僧)이라고 일컫는 것이다.(김영태, 1992) 이것은 불교가 전해진 지 불과 반년만의 일로, 짧은 기간에 절이 지어지고 백제인을 불교에 귀의시켜 성직자까지 배출했다는 것이다. 불교가 수용되고 정착되고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3보 가운데 승보인 승려들의 공동체인 승가(僧伽)가 정비되어야 하고, 승가가 정비되기 위해서는 승려를 배출하는 시스템과 승려들을 단속할 율의 정비가 필수적이라 할 것인데, 바로 10명의 승려는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조경철, 2005)

짧은 기간에 불사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침류왕의 불교에 대한 열의를 짐작케 하는 일로, 백제가 당시 고구려 공략과 마한 정벌을 위한 전쟁으로 인해 정신적 평화를 추구할 때에 마라난타가 새로운 종교사상을 전래한 것이다.(김복순, 2002)

4-5세기 인도의 간다라에서 동진까지 불교가 유입된 경로는 대체적으로 서북인도에서 서역남로와 서역북로를 거쳐 중원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6세기 중엽 간다라에서 중국으로 왔던 사나굴다(闍那堀多, 523-600)는 계빈(罽賓)에서 우전(于闐)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을 지나 선선(鄯善) 지방을 경유하여 누란(樓蘭)과 돈황(敦煌)을 지나 중국 본토의 서쪽 관문인 양관(陽關)에 닿은 후 장안에 들어오는 서역남로로 중국에 들어왔다.(鎌田茂雄, 장휘옥 역, 1992) 마라난타 역시 거의 비슷한 행로로 양관에서 장안을 경유하거나, 바로 동진의 수도인 건강 쪽으로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라난타는 동진에 들어온 이후, 동진에서 백제로 올 때에는 해상교통을 최대한 이용하여 황해를 건너왔을 것이다. 동진은 외국과의 관문으로 주로 양주(揚州)를 이용하였으므로, 그는 이곳을 출발하여 황해를 직항했을 것이다. 마라난타가 한성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반드시 서해의 어느 항구를 거쳤을 것인데, 백제의 수도와 가까운 당항포 쪽 항구에 도착한 다음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한산주에 이른 경우와, 법성포(法聖浦)에 닿았다가 연안을 거슬러 한산으로 갔을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김복순, 2002)

처음 백제에 전해진 불교사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불교를 전래한 마라난타의 성향에 크게 좌우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인도승으로 인도 유가계통의 신이적(神異的)이고 정서적인 불교와 함께, 동진에 머물러 있었던 관계로 동진의 격의불교(格義佛敎)가 함께 전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진(西晉, 265-316)대의 불교는 도가(道家)와의 융합이 주류를 이룬 격의불교(格義佛敎) 시대였으며, 동진(317-420)대에 이르러서도 이 불교는 계속 흥성하였는데, 승려들은 귀족이나 문인들뿐 아니라 지배층 및 왕족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효무제(孝武帝, 372-396) 당시에 불교의 융성은 그 극점에 이르렀다. 당시 동진에서 유행한 불교가 격의불교였으므로, 이러한 성격의 불교가 백제에 전해졌다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초창기에 그와 같은 고답적 불교가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곧, 『해동고승전』에서 마라난타를 평하여 “신이감통(神異感通)”하다고 하였듯이, 이즈음 백제불교의 성격은 오히려 신이적이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초기 불교사상이 초보적인 인과응보(因果應報)·권선징악적(勸善徵惡的)이었듯이, 이즈음의 백제불교도 그러한 성격이 있었을 것이다.(신종원, 2006)

그런데 불교를 받아들인 침류왕은 재위한 지 만 2년도 채우지 못하고 죽었으며,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 65년조에 의하면, 다음 왕위가 침류왕의 아들인 아신왕에게 넘어가지 않고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왕이 왕위를 빼앗다시피 하였다. 이어 진사왕도 구원(狗原)에 사냥 나갔다가 구원(狗原) 행궁(行宮)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 침류왕의 죽음도 자연사가 아닌 정치적 사건에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불교 수용을 그 한 요인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토착신앙과 불교 사이의 갈등은 백제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의하면 침류왕 때에는 백제에 불교가 수용된 것이고, 토착신앙과 불교 사이에 갈등의 과정을 거친 후, 아신왕 때에 교서를 내려 불법(佛法)을 믿어 복을 구하라는 기록으로 공인되었다고 한다.(최광식, 2007)

385년에 한산에 사찰을 짓던 마라난타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전라남도 영광군의 불갑사(佛甲寺)와 나주의 불회사(佛會寺) 등의 사적기에 그의 행적에 관한 내용이 일부 전하고 있어 그의 백제에서의 행적 일부를 짐작하게 해준다. 곧, 1980년대 이후 마라난타가 백제에 와서 세운 절이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사(佛甲寺)라는 주장이 몇 차례 제기되었다.(불갑사, 1988; 홍광표, 1999; 오순제, 2000; 순천대학교박물관·영광군, 2001)

마라난타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곳을 두루 편력하며 교화의 능력을 확대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는 백제에 와서도 쉬지 않고 전교활동을 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전남 일대의 사찰에 나타나는 마라난타 초창설은 일단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곧, 마라난타가 백제에 온 것이 384년 7월에 동진에 들어간 백제의 사신들이 귀국하는 길에 함께 온 것이라면, 그는 법성포에 도착한 후 바로 연안을 거슬러 한산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침류왕의 죽음으로 한산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다시 법성포로 왔다고 생각되며, 이때에 불갑사나 불회사 등의 절을 지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김복순, 2002)

불갑사 창건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자료는 이 지역 출신 수은(睡隱) 강항(姜沆)의 「불갑사중수권시문(佛甲寺重修勸施文)」이다. 이 글에서 불갑사의 초창은 알 수 없지만 법당을 수리할 때 “정원원년개조(貞元元年改造)”라는 묵서명(墨書銘)이 나왔다고 한다. 정원 원년을 신라 원성왕 원년인 785년으로 본다면, 이때 이미 불갑사를 중창하였으므로 그 이전에 이곳에 사찰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반계 유형원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56)에도 불갑사의 창건을 신라시대라 하고 있다. 고려 말의 문인 이달충(李達衷, ?-1385)이 1359년에 지은 「각진국사비명(覺眞國師碑銘)」을 보면 각진국사(1270-1355)가 불갑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현재 불갑사에는 그의 탑비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광군 불우(佛宇)조에는 불갑사에 대하여, “모악산의 골짜기가 그윽하고 경치 좋은 곳에 있다.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안 보인다. 뜰 앞에 동백나무가 있는데 매우 기이하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1799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나주(羅州) 불회사(佛會寺)의 「불회사대법당중건상량문(佛會寺大法堂重建上樑文)」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초창주(初創主) 마라난타 존자는 백제의 초조(初祖)이며 삼한의 고승이다. … 연대는 동진 태화(太和) 원년이다.(初創主 摩羅難陀尊者者 百濟初祖 三韓高僧…年代卽東晉太和元年也)” 또한, 「불회사대용문중건상량문(佛會寺大用門重建上樑文)」에는, “백제의 초조(初祖) 마라난타가 처음 개창한 것이 서로 전해진다.(百濟之初祖難陁尊者 始開創之相傳)”는 기록이 있다.

이상의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백제 불교 영광 법성포 초전 도래설은 18세기 후반에 확실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라남도 나주 죽림사, 화순 개천사, 곡성 관음사 등지의 사찰기록에도 마라난타를 암시하는 구절이 있다. 이는 반드시 이 시기에 이 설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이전부터 전해오던 백제불교 초전 도래지설이 17-18세기에 이르러 전국의 사찰이 중수되는 과정에서 채록된 것이 아닌가 한다.(김복순, 2002)

아울러 불갑사에는 현존한 대웅전의 용마루 중앙에 보주 형식의 불탑신(佛塔身)이 얹혀 있는데, 이것이 인도의 남방불교권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홍광표, 1999) 하지만 조선후기에 세워진 건물의 연원을 백제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는지 의문이며, 이러한 형식은 통도사 대웅전, 금산사 대장전 등 다른 절에서도 보이는 형식이라고 한다.(신종원, 1988)

이 밖에도 영광군의 법성포(法聖浦)는 그 명칭 외에 “아무포(阿無浦)”와 “부용포(芙蓉浦)”라는 불교와 관련된 명칭을 가지고 있다. 『법성진지(法聖鎭誌)』 고적조에 의하면, 신라가 사신을 강남으로 보낼 때 이곳에서 배를 탔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법성포 내지 법성진이 개설되면서 조창의 기능이 있었을 뿐 아니라, 태종 4년(1404) 4월 4일에 왜구가 배 3척으로 영광군에 침입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가 있는 것은 고대의 항구로서의 기능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사실이다. 따라서 마라난타의 불갑사 창건설은 그가 백제에서 전교하며 다닌 곳 가운데 한 곳이 영광군 법성포였던 데서 나온 기록으로 생각된다.(김복순, 2002) 그러나 영광군의 백제 때 이름은 무시이군(武尸伊郡)이며, 신라 때는 무령군(武靈郡)이라 불렀으므로, 불갑사의 마라난타 창건설은 성립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조경철, 200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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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난타벽제)
難陁闢濟
百濟本記云 第十五[僧傳云十四誤]枕流王卽位甲申[東晉孝武帝太元九年] 胡僧摩羅難陁至自晉 迎置宮中禮敬 明年乙酉 創佛寺於新都漢山州 度僧十人 此百濟佛法之始 又阿莘王卽位太元十七年二月 下敎崇信佛法求福 摩羅難陁 譯云童學[其異迹詳見僧傳] 讚曰 天造從來草昧間 大都爲伎也應難 翁翁自解呈歌舞 引得旁人借眼看

난타(難陁)가 백제 불교를 열다
백제본기(百濟本記)에 이르기를, “제 15대[『승전(僧傳)』에 14라 한 것은 잘못이다.] 침류왕(枕流王, 재위 384-385) 즉위 갑신(甲申)(384)[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의 태원(太元) 9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晉)에서부터 왔는데, 맞이하여 궁중에 두고 예(禮)로서 공경하였다. 이듬해 을유(乙酉)(385)에 절을 새 도읍 한산주(漢山州)에 창건하고, 승려 10인을 두니, 이것이 백제 불법의 시초였다. 또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이 즉위한 태원 17년(392) 2월에 하교(下敎)하여 불법을 받들고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였다.”마라난타(摩羅難陁)는 번역하면 동학(童學)이라 한다.[그의 신이한 행적은 『승전』에 자세히 보인다.] 찬(讚)한다. “천지가 개벽할 때는, 대개 재주 부리기가 어려운 것인데, 차근차근 스스로 알면 노래와 춤 절로 나와, 옆 사람 끌어들여 보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