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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국

기본정보

예국(穢國)은 동예(東濊)라고도 하며 경상도 북부와 함경도 남부 동해안 지역에 있던 나라이다.

일반정보

예국(穢國)은 경상도 북부와 함경도 남부 동해안 지역 일대에 있던 나라이다. 예(濊)의 일족으로 동예(東濊)라고도 한다. 처음엔 독립된 사회였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후에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지배를 받았다. 동예는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종족으로 생각했으며, 제천행사인 무천(舞天)과 호신(虎神) 숭배의 풍습이 있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마한조에 따르면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가 동이(東夷)의 한 갈래인 예국(穢國)의 땅이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조에는 예국(濊國)의 이 명칭으로 철국(鐵國) 또는 예국(蕊國)이 보인다. 이들 사료에 기록된 예국(穢國)은 동예(東濊)를 의미한다. 동예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3세기 중국에서 편찬된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으로, 이때의 동예는 선진(先秦) 문헌에 보이는 예맥(濊貊)의 예(濊)와 구분된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예전(濊傳)에 따르면 “예(濊)는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닿았고,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다.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 皆其地也)”고 하였다. 즉, 『삼국유사』 권1 기이1 마한조에 보이는 예국(穢國)은 『삼국지(三國志)』 예전(濊傳)에 보이는 예(濊)이며,『삼국지(三國志)』 예전과 고구려전에서는 예(濊)를 동예(東濊)라고도 하였다. 보통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한반도에 걸쳐 거주하던 예(濊)와 한반도 동해안 방면에 거주하던 예(濊)와 구분하기 위해 동예(東濊)라고 한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예”가 “예(穢)”로 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동예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보이는 『삼국지』 예전에 따라 “예(濊)”로 쓴다. 또한 “예국(穢國)”의 “국(國)”의 경우, 국(國)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시대나 문장 구조상에서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와 같은 정치수준의 고대국가로 볼 수는 없다. 동예가 한사군과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지배세력이 미약했던 사회인 것을 고려하면 “예국(穢國)”의 “국(國)”은 국가형성 과정에서 “국가(國家)” 성립 이전 사회인 “군장사회(君長社會)”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김정배, 1986)

동예(東濊)는 한반도 동북지역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 문화를 기반으로 동해안지역의 예족이 세운 사회이다. 『삼국지』에서는 동예의 위치를 한반도의 동해안 지역으로 막연히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남해 차차웅 16년조에는 오늘날의 강원도 강릉 혹은 함경남도 안변으로 추정되는 “북명(北溟) 지역의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인장을 얻어 바쳤다.(春二月 北溟人耕田 得濊王印獻之)”는 기사가 나와 동예의 보다 구체적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가 발견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에서는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이 새겨진 도장(銅印)이 발견된 바 있다.(梅原末治, 1967) 이 자료를 통해 예족의 분포지역이 의외로 넓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이들이 형질학적으로 같은 종족인지는 논란이 있다.(이현혜, 1997)

동예가 처음부터 위만조선에 속해 있었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기원전 2세기 초에는 위만조선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108년에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현토군과 낙랑군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58년 평양 정백동 목곽묘에서 발견된 “부조예군(夫租薉君)”이라는 도장(銀印)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김기흥, 1985) 이후 동예는 313년에 낙랑군이 고구려에게 멸망된 뒤부터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예가 고구려와 같은 고대국가 단계로 성장하지 못하고 주변 국가에 복속된 이유 중에 하나는 동예 지배세력의 정치력이 크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예전(濊傳)에 따르면 “대군장이 없었다. … 정시(正始) 8년(247)에 위(魏) 조정에 와서 조공하므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았다.(無大君長 … 正始八年 詣闕朝貢 詔更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고 한다. 즉, 동예는 처음에 왕이 없고 대군장이 다스리는 사회였다. 비록 3세기에 와서 중국의 필요에 의해 왕으로 임명되었으나, 왕은 일반 백성과 구분되지 않은 곳에 살았을 정도로 정치력이 미약했던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예전(濊傳)은 동예의 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동예인들은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其耆老舊自謂與句麗同種).” 이 때문인지 고구려와 같은 10월에 제천행사인 “무천(舞天)”을 열었다. 무천은 가을에 여러 곡식의 결실을 맞이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수확의례라고 할 수 있다.(최광식, 1994) 이때 사람들은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또한 책화(責禍)라는 것이 있어 다른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면 벌로써 생구(生口:포로나 가축)와 소·말을 부과하였다. 특산물로는 반어피(班魚皮)·과하마(果下馬)·단궁(檀弓) 등이 있었다. 종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기록도 있는데, 동예에서 “호랑이를 신(神)으로 여겨 제사했다.(祭虎以爲神)”는 것이다. 이것은 호랑이 보다는 곰 숭배가 부각된 단군신화와 대비되는 것으로, 여기서 호랑이 신은 읍락을 보호하는 산신(山神)으로 이해된다. 예전(濊傳)에 나타난 우리나라 사람들의 호랑이 숭배는 오늘날의 민속종교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호랑이의 옛 말인 “범”은 그 자체가 신(神)을 뜻하기도 한다.(서영대, 1992)

참고문헌

梅原末治, 1967, 「晋率善穢佰長銅印」 『考古美術』8-1.
김기흥, 1985, 「夫租薉君에 대한 고찰」『韓國史論』12.
김정배, 1986,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고려대학교출판부.
서영대, 1992, 「東濊社會의 虎神崇拜에 대하여」『역사민속학』2.
최광식, 1994,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이현혜, 1997, 「동예의 사회와 문화」『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마한)
馬韓
魏志云 魏滿擊朝鮮 朝鮮王準率宮人左右 越海而南至韓地開國 號馬韓 甄萱上太祖書云 昔馬韓先起 赫世勃興 於是 百濟開國於金馬山 崔致遠云 馬韓麗也 辰韓羅也 [據本紀 卽羅先起甲子 麗後起甲申 而此云者 以王準言之耳 以此知東明之起 已幷馬韓而因之矣 故稱麗爲馬韓 今人或認金馬山 以馬韓爲百濟者 蓋誤濫也 麗地自有馬邑山 故名馬韓也] 四夷九夷九韓穢貊 周禮職方氏掌四夷 九貊者 東夷之種 卽九夷也 三國史云 溟州 古穢國 野人耕田,得穢王印獻之 又春州 古牛首州 古貊國 又或人云 今朔州 是貊國 或平壤城爲貊國 淮南子注云 東方之夷九種 論語正義云 九夷者 一玄菟 二樂浪 三高麗 四滿飾 五鳧臾 六素家 七東屠 八倭人 九天鄙 海東安弘記云 九韓者 一日本 二中華 三吳越 四乇羅 五鷹遊 六靺鞨 七丹國 八女眞 九穢貊
마한(馬韓)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魏滿)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왕 준(準)은 궁인과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했다.”고 하였다.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에게 올린 글에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世)가 발흥하였으며, 이즈음에 백제가 금마산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최치원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라고 하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기원전 57)에 일어나고, 고구려는 그 후 갑신(기원전 37)에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것은 조선왕 준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왕(東明)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아울렀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고구려를 일컬어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더러 금마산(金馬山)을 인정하여 마한이 백제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대체로 잘못된 것이다. 고구려 땅에는 본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으므로 마한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사이(四夷)는 구이(九夷) 구한(九韓) 예맥(穢貊)이니 주례(周禮)에 직방씨(職方氏)가 사이와 구맥을 관장하였다고 하는 것은 동이(東夷)의 종족으로 곧 구이를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에는 “명주는 옛 예국인데 야인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인장을 얻어 바치었다.”고 하였다. 또 “춘주는 옛 (고구려 때의) 우수주로서 옛 맥국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오늘날의 삭주는 맥국이고, 혹은 평양성이 맥국이다.”고 하였다. 『회남자(淮南子)』의 주에는 “동방의 오랑캐는 9종족이다.”고 하였으며, 『논어정의(論語正義)』에는 “구이(九夷)는 1 현도(玄菟), 2 낙랑(樂浪), 3 고려(高麗), 4 만식(滿飾), 5 부유(鳧臾), 6 색가(素家), 7 동도(東屠), 8 왜인(倭人), 9 천비(天鄙)이다.”라고 하였고,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는 “구한(九韓)은 1 일본(日本), 2 중화(中華), 3 오월(吳越), 4 탁라(乇羅), 5 응유(鷹遊), 6 말갈(靺鞨), 7 단국(丹國), 8 여진(女眞), 9 예맥(穢貊)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