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완산군

기본정보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도읍한 곳

일반정보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도읍한 곳으로 현재의 전라북도(全羅北道) 전주시(全州市)와 완주군(完州郡)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현재 견훤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된 동고산성(東固山城)이 있는데 이곳은 견훤의 왕성(王城)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문정보

완산군은 현재의 전라북도(全羅北道) 전주시(全州市)와 완주군(完州郡)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2 후백제견훤(後百濟甄萱)조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도읍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견훤이 완산에 입도(立都)하였다는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1 신라본기11 진성여왕 6년(892)조와 『삼국사기』권50 열전 견훤조, 『고려사(高麗史)』 권11 지리2,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전라도 전주부조에 나타난다. 본문의 뒷부분이나 『삼국사기』권50 열전 견훤조에는 완산주(完山州)로 고쳐져 있다. 『삼국사기』권36 지리3 전주(全州)조에는 “전주는 본래 백제 완산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에 주(州)로 삼았고, 26년(565)에 주를 폐지하였다. 신문왕 5년(685)에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였다. 경덕왕 16년(757)에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全州 本百濟完山 眞興王十六年爲州 二十六年 州廢 神文王五年 復置完山州 景德王十六年改名 今因之)”라고 하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전주부(全州府) 건치연혁(建治沿革)조에는 전주가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이며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6년(555)에 완산주(完山州)를 두었다가 동왕 26년(565)에 주를 폐지하고, 신문왕(神文王) 때 완산주(完山州)를 다시 설치하였다. 경덕왕(景德王) 15년(756)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9주를 완비하였다. 효공왕(孝恭王) 때 견휜(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신검(神劍)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였다가 23년(940)에 다시 전주(全州)라 하였다. 성종(成宗) 12년(993)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 하였고, 14년(995)에 12주에 절도사를 두고 순의군(順義軍)이라 하여 강남도(江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9년(1018)에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뒤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4년(1355)에 원(元) 나라 사신 야사불화(埜思不花)를 가둔 일 때문에 부곡(部曲)으로 강등하였다가 5년(1356)에 다시 완산부(完山府)라 하였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1392)에 임금의 고향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太宗) 3년(1403)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보면 본래 백제의 완산 지역이던 것을 진흥왕 16년(555)에 신라 9州의 하나로서 완산주를 처음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 하대에는 전주(全州)로 불렸는데, 전주로 고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견훤이 전주지역으로 천도(900년)할 때 그곳의 지명이 완산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쳐 공민왕(恭愍王) 5년(1356) 완산부(完山府)로 복구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 원년(1392)에 전주이씨의 본향지라 하여 완산부유수(完山府留守)로 승격되었으며, 태종 3년(1403)에 전주부(全州府)로 개칭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가 고종이 군(郡)으로 고쳤다.

견훤은 경주 서남지방의 주현(州縣)을 쳐서 중심 세력을 규합하여 892년 무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으며, 전주지역으로 천도(900년)하면서 견훤의 세력 확장이 진행되었다. 이에 대해 견훤이 처음부터 서남해 지역 호족 세력 장악에 실패하였기 때문으로 보거나(정청주, 1995) 견훤에 복속했던 서남해 지방 호족이 이반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신호철, 1993) 또한 완산주에 다수의 군사조직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군사적 기반 확충을 위해 천도가 진행되었다는 입장(김수태, 1999)과 전주 호족의 협력을 끌어내어 영토 확장의 측면 즉, 전주를 중심으로 무주‧ 공주의 옛 백제지역을 아우르고 더 나아가 통일국가를 완성하려는 의도가 강하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강봉룡, 2001) 이 밖에 전북해안은 영산강 하구와 함께 대외교섭과 내부의 해양교통에 매우 가치 있는 지역이라는 점을 들어 해양질서라는 측면을 제시하기도 한다.(윤명철, 2001) 후백제는 전주 천도 후 국호의 제정과 칭왕(稱王), 연호의 제정, 설관분직(設官分職) 등 정치조직을 정비해 본격적인 국가체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견훤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된 동고산성(東固山城)이 견훤의 왕성(王城)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라북도 전주시 교동 승암산(僧巖山)에 있다 하여 승암산성이라고도 하는데,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지정면적이 167,597㎡, 둘레 1,574m이다. 현재 동·서·남문지와 수구문․건물지․우물터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1980년의 개괄조사(전영래, 1980)와 1990년부터 3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건물터에서 “전주성(全州城)”이라 새겨진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됨으로써 그 연대와 성격이 후백제의 왕궁터라는 전설과 부합됨이 밝혀졌다. 이는 927년 견훤이 신라 왕경을 점령하고 끌고 온 “여러 종류의 공인중에서 우수한 자들(百工之巧者)”에 의해서 재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외에도 “중방(中方)”․“관(官)”자 등이 새겨진 암키와 조각도 나왔다. 산성은 서북으로 면한 수구의 남북으로 뻗은 규암(硅岩) 절벽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동쪽이 높은 삼태기형의 골짜기를 감은 것인데, 남북으로 날개모양의 익성(翼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곽의 너비는 동서 314m, 남북 256m이며, 익성은 북쪽이 112m, 남쪽이 123m이다. 수구는 높이 230m 지점에 있으며 최고봉인 동남우각은 306.6m이다. 석축은 능선 바깥 사면 중턱을 깎아 회랑도를 설치하고, 그 바깥 밑부분에 쌓았는데 높이는 4m 정도이다. 성안은 사면을 3단으로 깎아서 건물대지를 만들었다. 윗단은 길이 117m, 너비 20m, 중간대지는 길이 133m, 너비 26m로서 그 안에 건물지 초석과 기와조각들이 퇴적되어 있다. 성문은 수구에 서문지, 북익성 동변 부근에 동문지, 남익성의 양쪽 부근에 두 개의 남문지가 있다. 성안 중앙에는 우물터가 있고 그 아래에는 웅덩이가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의 기린봉 위에 작은 연못이 있다는 기록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동고산성은 우리나라 성곽의 형식 중 도성의 평지성과 산성의 이원적 배치에 있어 상성(上城)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전영래, 2001)

한편, 37년 동안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는 당시 왕성과 도성체제의 구조를 갖는 후삼국 최대도시의 하나로 건설되었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사령신앙(四靈信仰)에 입각한 전주도성체제를 갖추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중국에서 형성된 도시수호관념으로서 기린․봉황․용․거북으로 상징되는 사령신앙은 사신신앙(四神信仰) 형성 이전부터 도시수호 관념의 원형이었는데, 이 같은 인식에 부응하는 지명들이 현제 전주의 지명에 그대로 남아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즉 고려시대 이전으로 소급되는 기린 관련 명칭과 봉황․용 관련 명칭이 기린봉(麒麟峯, 香隣山, 隣趾山)․봉황암(鳳凰巖)․용두치(龍頭峙)로 존재하고 있으며, 최근 거북바위 학술조사를 통해 거북바위가 확인되어 완벽한 사령신앙에 부응하는 명칭과 관련 현장이 안아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후백제의 도시구성과 관련하여 전주를 수호하고, 바닷길로 해상 진출하는 위치에 존재하는 수호신적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조법종, 2003)

참고문헌

전영래, 1980, 『全州 東固山城 槪括調査報告』, 전주시립박물관.
신호철, 1993, 『後百濟 甄萱正權硏究』, 일조각.
정청주, 1995, 「新羅末․高麗初 支配勢力의 社會的 性格 -後三國 建國者와 豪族-」『全南史學』9.
김수태, 1999, 「後百濟 甄萱政權의 成立과 農民」『百濟硏究』29.
전영래, 2001, 「後百濟와 全州」『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강봉룡, 2001, 「甄萱의 勢力基盤 擴大와 全州 定都」『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윤명철, 2001, 「후백제의 해양활동과 대외교류」『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조법종, 2003, 「後百濟 全州의 都市구성에 나타난 四靈체계 -전주 거북바위의 성격을 중심으로-」『韓國古代史硏究』29.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 견훤)
後百濟 甄萱
… 至景福元年壬子稱王 立都於完山郡 理四十三年 以淸泰元年甲午 萱之三子<簒>逆 萱投太祖 子金剛卽位 天福元年丙申 與高麗兵會戰於一善郡 百濟敗績國亡云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國權綱紀紊弛 加之以飢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於是萱竊有(叛)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 遂襲武珎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南都統 行全州刺史兼御史中承上柱國漢南國開國公 龍<紀>元年己酉也 一云景福元年壬子 是時北原賊良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良吉職爲裨將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喜得人心 謂左右曰 百濟開國六百餘年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舡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 卷土歷黃山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予今敢不立都以雪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
후백제 견훤
… 경복(景福, 892-893) 원년 임자(892)에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完山郡)에 도읍을 정했다. 나라를 다스린 지 43년 청태(淸泰, 934-936) 원년 갑오(934)에 견훤의 세 아들이 반역하므로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가서 항복했다. 아들 금강(金剛)이 즉위한 후 천복(天福, 936-943) 원년 병신(936)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一善郡)에서 싸워 패하니 후백제는 멸망했다고 한다. 처음에 견훤이 나서 포대기에 싸여 있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음식을 나르느라고 아기를 수풀 아래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주었다. 이 말을 듣자 마을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아이가 장성하자 몸집이 크고 외모가 기이하게 생겼으며, 기품이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 군인이 되어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변으로 가서 변경을 지켰는데, 창을 베개 삼아 적군을 대비하였으니 그의 기상은 늘 사졸(士卒)의 선두에 섰으며,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 원년은 신라의 진성왕(眞聖王) 재위 6년이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있어 국권을 농간하므로 기강이 문란해졌다. 게다가 기근이 겹치니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남몰래 반역할 뜻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의 서남쪽 주현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무려 5천의 무리가 되었다. 드디어 무진주(武珎州)를 습격하여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新羅西南都統 行全州刺史 兼御史中承上柱國 漢南國開國公)이라 하였다. 이때가 용기(龍紀, 889) 원년 기유(889)였는데, 혹은 경복 원년 임자(892)라고도 한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良吉)의 세력이 강성하니 궁예(弓裔)는 자진하여 그 부하가 되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서 양길에게 직책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이르자 고을 백성들이 영접하며 위로했다. 견훤은 민심을 얻은 것이 기뻐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백제가 개국한 후 600여 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은 신라의 요청으로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수군 13만 명으로 바다를 건너왔으며, 신라의 김유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황산(黃山)을 지나서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내가 어찌 나라를 세워 옛날의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일컫고 벼슬과 직책을 나누어 설치하니, 이때는 광화(光化, 898-901) 3년이요,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900)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