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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기본정보

기원전 37년에서 기원후 668년까지 705년간 존속했으며, 총 28대의 왕이 다스린 삼국 중의 한 국가인 고구려의 국호로, 5세기 정도부터 사용하였다고 한다.

일반정보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주몽(朱蒙)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졸본(卒本) 지방에서 건국하였다고 한다. 이후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東北) 지방을 무대로 하여 발전하였으며, 668년(보장왕 27)에 멸망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고구려의 나라이름은 초기에는 고구려라고 불리다가 어느 시기부터 고려로 개칭되었다고 여겨지며, 그 시기는 대체로 5세기 평양 천도를 전후한 시기로 생각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조에는 “당나라의 배구전에 말하기를 고려는 본래 고죽국(지금의 해주)이고 주나라는 기자를 봉해줌으로 조선이라고 불렀다.(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고 하였다.

고려(高麗)의 연원으로 먼저 나타나는 용어는 구려(句麗)・구려(句驪)이다. 이는 고구려에 관한 기사가 처음으로 실린 『한서(漢書)』 권28 지리지8 하에 보인다. 한 무제가 조선을 경략하고(기원전 108) 4군을 설치하자,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구려(句麗)・구려(句驪) 집단이 그 통할 하에 들어갔으며, 현도군(玄菟郡)의 설치(기원전 107)에 즈음하여 그 예하에 고구려현(高句驪縣)을 두었다. 고구려(高句麗) 국호에 대하여, 중국 사서에서 “구려(駒驪)”・“구려(句驪)”・“고구려(高句驪)” 등으로 “려(驪)”에 “마(馬)”자를 덧붙여 쓴 것은(『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 등) 중국인들이 외국의 종족명, 지명, 인명에 대한 비칭(卑稱)으로 동물자변을 덧붙여 그들을 폄하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토군 성립 이후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구려의 각 세력권은 점차 결집되어 갔으며, 그들을 총칭하는 말로 고구려(高句麗)라는 칭호를 이어 쓰지 않았을까 한다. 이렇게 보면,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 자체는 구려(句麗)가 바탕이 되고 앞에 “높다”, “크다”는 의미로 “고(高)”라는 수식어를 붙였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구려(句麗)”는 “구(溝)”와 마찬가지로 “성읍(城邑)”의 의미이고, “고(高)”는 “크다”는 뜻이므로, 결국 고구려(高句麗)는 “대성(大城)”, “수읍(首邑)”, “상읍(上邑)”의 뜻으로, 이것이 도시명 내지 국가명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한다. 그 동안 “고구려”・“고려” 국호는 서로 상통하여 사용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지만, 고구려의 어느 시기부터는 “고려”라는 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는 의견이 있다. 곧, 고구려 당시에 이미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였고, 나중에 건국된 고려(高麗, 918-1392)는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 고구려가 나라이름을 고려로 바꾸었는가 하는 시기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중국 사서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고구려(高句驪)를 고구려(高句麗)로 썼고, 수ㆍ당대부터는 고려(高麗)라 줄여서 불렀다고 파악한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6)

한편, “고려(高麗)”라는 국호가 중국 문헌에 나타난 확실한 시기는 장수왕 8년 이후 11년과 23년(435)이지만, 국호의 개칭 시기는 정확히 말할 수 없다면서, 대체로 장수왕 10년대에 국호의 개칭이 있었다고 본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를 광개토대왕 시기로 올려 잡을 수 있는 개연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가장 먼저 “고려”라는 국호가 사용된 기록은 『위서(魏書)』 권2 제기2 태조기(太祖紀) 원흥(元興) 원년(元年) 춘정월(春正月) 기사에 보이는데, 이때는 광개토대왕 8년인 398년이지만 이 기록의 “고려” 사용은 믿기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위서』권4 제기4 세조기(世祖紀) 태연(太延) 원년(元年) 6월 병오(丙午)의 장수왕 23년(435) 기사 다음부터 거의 매년 본기에서 고려 기사를 쓰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송서(宋書)』 권3 본기3 무제(武帝) 하 영초 원년(420) 7월 갑진조에서는 “고구려왕(高句驪王)”이라고 했다가, 3년 뒤인 『송서(宋書)』 권4 본기4 소제(少帝) 경평 원년(423) 3월 기사부터는 “고려국(高麗國)”으로 바꾸어 썼기 때문에, 이 사이에 나라이름이 바뀌었다는 심증을 가졌다. 그러나 경평 원년은 423년으로 장수왕 11년에 해당하는데, 이는 혹 남송 대에 보궐(補闕)한 결과일지도 모르므로 확실하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사신 왕래 기록에도 본기에서는 모두 “고려(高麗)”를 썼기 때문에, 장수왕 10년(422)이나 장수왕 연간부터 고려를 국호로 썼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고구려가 국호를 고친 배경과 장수왕 15년(427)의 평양 천도와의 관계도 조심스럽게 제기하였다. 광개토대왕 이후의 비약적인 발전과 한문화의 성숙된 이해 그리고 평양으로 천도함을 계기로, 고구려에서 한자적인 의미가 없는 “구(句)”자를 생략시켜 “고려(高麗)”라는 국호로 개칭함으로써 한자의 일반적 의미로 풀어도 좋은 의미를 갖는 국호로 정한 것으로 보았다.(정구복, 1992)

한편, 고구려 안장왕 2년인 양 무제 보통(普通) 원년(520년) 2월 계축(癸丑)에 안장왕을 “영동장군고려왕(寧東將軍高麗王)”으로 책봉하는 것을 시작으로 “구(句)”자를 없애고 “려(驪)”를 “려(麗)”로 고쳤다는 의견도 있다.(李殿福, 2000) 이에 대하여 520년 설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면서 장수왕 11년(423년)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곧, 앞에서 언급한 남조(南朝) 사서인 『송서(宋書)』기록과 함께, 북조(北朝) 사서인 『위서(魏書)』 태연(太延) 2년(436)의 “고려가 갈로 등의 장수에게 병사를 이끌고 가서 맞이하였다.(高麗遣將葛蘆等率兵迎之)”는 기록을 가지고 435년 이전에 이미 고려(高麗)라고 칭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어느 시기부터 국호를 고려(高麗)로 개정하였음은 그들 자신이 남긴 기록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에 국호가 “고려(高麗)”로 되어 있고,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도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그런데 고구려(高句麗)를 고려(高麗)로 바꾼 시기를 520년으로 보게 되면, 이들 유물들도 모두 그 뒤에 만든 것이 되므로, 간지가 기미년인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을 539년에 만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이전인 419년과 479년도 기미년이므로, 고려라는 국호를 쓴 것이 423년부터라면 479년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중원고구려비」도 559-589에 만든 것으로 보기보다는 480년으로 앞당긴다. 곧, 「중원고구려비」에 신유년이라는 간지가 있고, 12월 23일 갑인이라는 간지가 나오는데, 신유년은 449년, 480년, 506년, 573년, 599년에 해당하며, 그 가운데 갑인과 일치하는 해가 480년이기 때문에 그 해를 정했다. 이는 423년의 고려 국호 개칭설과도 맞아 들어간다. 아울러 고구려가 수도를 압록강 유역인 집안에서 대동강 유역인 평양으로 옮긴 것은 427년인데, 고구려가 고려로 나라이름을 바꾼 시기도 이 즈음인 것으로 보아, 평양 천도와 나라이름을 바꾼 것을 연관시켰다.(孫進己, 1994)

이러한 의견과 더불어 고려(高麗) 국호가 중국 측 기록에 나타나는 시기를 장수왕 11년(423)부터 장수왕 23년(435) 무렵으로 파악한 견해에 동의하면서,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遷都)를 단행하는 427년에 고려 국호를 개칭했다는 의견도 있다. 곧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라는 국호가 건국과 동시에 제정되어, 그것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진 듯 전하고 있으나, 실은 “구려(句麗)”가 먼저 존재하였고, 한군현의 설치에 즈음하여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高句麗)”가 생겨났으며, 이것이 뒤에 국호로 발전하였고, 다시 427년경부터는 이들 국호에서 비롯된 “고려(高麗)”가 국호로 쓰였다고 보았다.(박용운, 2006)

그런데 『삼국유사』의 고구려 건국과 관련된 기사 등에서는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표기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데서는 거의 모두 “고려(高麗)”라고 쓰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오히려 고구려 초기를 다룬 기사에서도 “고려”라고 표기하기도 했다.(정구복, 1992) 이를 통해 고구려 당시에도 고려라는 국호가 널리 쓰였다는 점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삼국유사』에서는 “구려 장수왕(句麗 長壽王)”을 비롯한 “구려(句麗)” 명칭도 몇몇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삼국유사』 권1 기이1 나물왕 김제상(奈勿王 金堤上)・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권3 흥법3 아도기라(阿道基羅)) 그리하여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발해에서 고려의 후예를 자처했으며, 그것은 다시 궁예에 의해 국호로 채택되었고, 왕건 또한 918년에 새로이 나라를 열면서 국호를 “고려”로 선포하게 되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인용된 고려(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라고 한 의견은 당시 고구려가 요서 지방에 일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는 5세기 초 이래 요동을 장악하고 요서 지방에 세력을 뻗쳐 왔기 때문에 중원 왕조에서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이는 배구가 요서를 상징하는 고죽국을 고구려에 단정적으로 연결시킨 이유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고구려는 5세기 말 이후로는 대릉하 유역에 진출하려 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이를 막기 위한 군현회복론(郡縣回復論)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이 배구의 고죽국 발언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윤용구, 2005)

참고문헌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정구복, 1992, 「高句麗의 ‘高麗’國號에 대한 一考 -三國史記의 기록에 관련하여-」『호서사학』19ㆍ20合.
孫進己, 1994, 『東北民族史硏究』, 中州古籍出版社.
李殿福, 2000, 「中原郡의 高麗碑를 통해서 본 高句麗 國名의 變遷」『高句麗硏究』10.
윤용구, 2005, 「隋唐의 對外政策과 高句麗 遠征 -裴矩의 ‘郡縣回復論’을 중심으로」『北方史論叢』5.
박용운, 2006, 『고려의 고구려계승에 대한 종합적 검토』, 일지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 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고조선[왕검조선]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경에는 무엽산이라고 했고 또 백악이라고도 한다. 백주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고 하였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란 자가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 땅을 내려다 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바로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 내려와 이를 일러 신시라고 하였으니 그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곰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어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임신하여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당나라 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 경인년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그곳을 궁[방이라고도 한다]홀산 또는 금미달 이라고도 한다. 1500년 동안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라고 하였다. 당의 배구전에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지금 해주]인데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한은 3군(三郡)을 나누어 설치하여 현도・낙랑・대방[북대방]이라 하였으며, 통전에도 이 설과 같다.[한서에서는 진번・임둔・낙랑・현도의 4군으로 되어 있고 지금은 3군이라 하고 이름도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