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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

기본정보

고려시대 개경에 있던 사찰

일반정보

고려 태조(太祖) 7년(924) 개경(開京) 창건된 사찰이다

전문정보

흥국사(興國寺)는 고려 태조 7년(924) 창건된 사찰이다. 흥국사의 창건기사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왕력에만 전하고 있다. 흥국사에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姜邯贊)이 이름을 짓고 찬(撰)하였다고 하는 오중탑(五重塔)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 현종 12년(1021)에 건립된 이 탑 속에는 강감찬의 제시(題詩)와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가 있었다고 한다. 오중탑 속에 있었던 사탑고적고를 통하여 흥국사 위치가 지금의 개성직할시 만월동임을 확인 할 수 있다.(권상로, 1979)

고려의 태조는 수도인 개경(開京)에 많은 사찰을 창건하였다. 태조는 사찰 건립 문제를 훈요십조(訓要十條)의 두 번째 조항으로 남기고 있을 만큼 중요시하였다. 또한 태조는 도선(道詵)이 지정한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에 따라 사찰을 창건해야한다는 사원비보사탑설(寺院裨補寺塔說)을 강조하면서 이외의 장소에 함부로 사찰을 개창(開創)하여 지덕(地德)을 쇠하게 만들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이것은 태조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입각하여 사찰을 건립하고자 했음을 확인시켜 준다.(최병헌, 1975)

이처럼 태조가 무분별한 사찰 창건을 경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태조가 개경에 많은 사찰을 건립한 것은 경주 중심의 고대적 불교기반을 개경으로 재편하려는 의도의 반영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불법(佛法)의 수호자임을 널리 알려 민심을 집중시키고 정치적 통일과 더불어 불교를 통한 사상적 통일을 이루려는 목적 때문이다. 새로운 국가 기반을 조성하는 데 있어 민심과 밀착되어 있는 불교를 중요한 역할을 하고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것에 불교계의 협조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지방 세력의 할거와 더불어 분열되어 있는 종단(宗團)을 정리하고, 중앙을 통해 효과적으로 관리하조가 하는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기도 하였다.(안지원, 2005)

태조 초기에 창건된 사찰들은 대부분 개경의 궁궐 주변이나 송악산에 위치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당시 사찰의 기능과 관련있었다. 태조는 팔관회(八關會)‧연등회(燃燈會)‧제석신앙(帝釋信仰)‧무차대회(無遮大會)‧미륵신앙(彌勒信仰) 등 중요 불교행사를 각 사찰에 분담시켜 각 종파(宗派)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그곳에서 중요한 불교행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며, 동시에 사찰의 위치가 아직 제도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궁궐을 보완하는 기능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찰의 설치는 태조 초기 대체로 개경의 중심부 궁궐 주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점차 창건되는 사찰의 위치가 개경 중심부에서 송악산 위쪽으로 확대되었다. 그 이유는 후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개경의 도시구조 틀이 잡히게 되었기 때문에, 중심부에는 더 이상 큰 사찰이 들어설 공간이 확보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추측한다.(박종진, 2000)

흥국사는 고려 초기의 관단(官檀) 사찰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수계(受戒)는 크게 사적(私的)으로 행해지는 것과 공적(公的)으로 행해지는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대부분은 거의 공적인 관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히 고려의 통치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한 후삼국통일 이후는 모두 관단에서 수계하였고 신라말‧고려 초에도 관단에서 수계한 기록이 있다. 흥국사가 관단 사원의 기능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은 적연국사(寂然國師) 영준(英俊)이 14때(945)에 이 사원의 관단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흥국사의 창건 당시에는 관단이 있었는지는 확신 할 수 없으나, 신라말‧고려 초에 관단에서 수계한 기록이 있고 구족계를 받은 시기와 흥국사의 창견연대의 차이가 크지 않으므로 태조가 흥국사를 세울 때 관단을 설치하여 관단사원의 기능을 지니게 한 것이라 추측된다. 즉 태조는 관단사원을 두어 구족계의 수계를 국가에서 관장하려 하였던 것이다.(한기문, 1998)

참고문헌

최병헌, 1975, 「道詵의 생애와 나말여초의 風水地理說」 『韓國史硏究』11.
권상로 편, 1979, 『韓國寺刹全書』, 동국대학교출판부.
한기문, 1998, 『高麗寺院의 構造와 機能』, 민족사.
박종진, 2000, 「고려시기 개경 절의 위치와 기능」 『역사와 현실』38.
안지원, 2005, 『고려의 국가 불교의례와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관련원문 및 해석

太祖[戊寅六月裔死 太祖卽位于鐵原京 己卯 移都松岳郡 是年 創法王 慈雲 王輪 內帝釋 舍那
又創天禪院 [卽普<濟>] 新興 文殊 (靈)通 地藏 前十大寺皆是年所創 庚辰 乳岩下立油市 故今俗利市云乳下 十月創大興寺 或系壬午 壬午 又創日月寺 或系辛寺 甲申 創外帝釋 新衆院 興國寺 丁亥 創妙寺 己丑 創龜山 庚寅安] 丙申統三
태조[무인년(918) 6월에 (궁예가) 죽으니 태조가 철원경에서 즉위하였다. 기묘년(919)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이 해에 법왕·자운·왕륜·내제석·사나 등의 절을 세우고 또 천선원[곧 보제]·신흥·문수·영통·지장 등의 절을 세웠으니 앞의 10대 사찰은 모두 이 해에 창건되었다. 경진년(920)에 유암 아래에 유시를 설치하였다. 이 때문에 지금 항간에서는 시장에서 이익을 얻는 것을 유하라고 한다. 10월에 대흥사를 세우니 또는 임오년(922)의 일이라고도 한다. 임오년(922)에 또 일월사를 세우니 또는 신사년(921)의 일이라고도 한다. 갑신년924에 외제석·신중원·흥국사를 세우고, 정해년(927)에는 묘사를 기축년(929)에 귀산사를 세웠으며 경인년(930)에 안(이하미상)] 병신년(936)에 삼국을 통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