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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관 분점과 돈의동 명월관

명월관 변천의 역사

명월관은 1903년 황토마루에 개업한 이후 그야말로 조선을 대표하는 요리집으로 날로 번창해지자 분점을 내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태화관이다.
그 후 명월관은 1919년 3월 태화관에서 있었던 독립선언서 낭동 사건과 같은 해 5월 황토마루 본점의 화재로 운영의 어려움을 겪다가 이듬해 요릿집 장충관을 운영하던 이종구가 명월관 상호를 사들임에 따라 돈의동(현 피카디리 자리)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영업을 시작하게 된다.
1921년 분점인 태화관은 감리교 단체에 팔려 영업이 중단되었지만 그해 청량리에 출장소가 신설되었고, 1923년 서린동에 분점이 개설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동경에도 명월관이 설립되는데 동경 명월관은 상호는 동일하지만 명월관의 해외 지점 형태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설립, 운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1948년 교자상으로 구현된 궁중연향 요리의 전통을 이어온 명월관은 서울시의 폐업조치에 따라 사라지게 된다. 이후에 나타나는 몇 몇 명월관 관련 기록은 '요릿집'으로서의 명월관이 아니라 비밀리에 퇴폐적으로 운영된 '요정'으로 판단되기에 공식적인 '요릿집'명월관의 역사는
이때까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태화관 분점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곳으로 유명한 태화관

1915년 1월3일 <매일신보>에 광고가 실린 것으로 봐서 이미 1915년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완용 소유의 종로 인사동 순화궁(현 인사동)을 개조하여 명월관 분점으로 설립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운동가 33인이 기미독립선언을
낭독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태화관은 이완용이 5년간 거주하다가 빌려주고 떠난 곳이기도 하다. 이후 태화관은 감리교에 판매 된 후 태화여자관으로 사용되었다.

돈의동 명월관
50년 역사를 이어온 돈의동 명월관

1921년 장춘관이 있던 돈의동(현 피카디리 극장 자리)에 이전 확장하여 새로 개업한 명월관으로 당시 장춘관 사장이 명월관 명의를 사서 설립하였다.
일반적으로 명월관을 소개할 때 제일 많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돈의동 명월관이다. 일부 자료들은 돈의동 명월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최초의명월관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돈의동 명월관은 서린동 지점을 두었으며, 50년 폐업될 때까지 가장 오랫동안 명월관의 역사를 이어온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