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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명월관과 성강다료

동경 명월관
(동경명월관의 정원 모습) (동경명월관의 정원 모습)

조선을 대표하는 요릿집 명월관은 일본에도 있었다. 제일 처음 생긴 동경 명월관은 대정 말기 즉, 1920년 대 초 일본의 중심지인 코지마치(麹町區) 산노시타(山王下) 일대로 현재의 '뉴 제펜 호텔'자리에 있었다.
사장은 평양 출신 기생이었던 노경월(盧瓊月)인데 그녀는 뜻하는 바가 있어서 명월관을 동경에 차렸다고 전해진다.

동경 명월관의 모습

춘원 이광수는 성강다료와 명월관을 모두 경험해 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성강다료는 순 일본풍이었고 명월관은 상당히 고급 건물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명월관은 순수한 조선식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풍이 가미되었다. 내부는 조선풍으로 꾸며져 있다.
자선당, 관월당, 애련당 등 우리 건물들의 이축(移築)에 참여해던 목수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동경명월관의 외부 모습) (동경명월관의 외부 모습)

나는 2차회로 당시 도쿄에 있던 조선요정 명월관으로 가기를 제의하였드니 한 사람도 사양 아니하고 찬성하야 곧 차를 불러서 쏟아지는 밤비를 뚫고 유지(油指)에 있는 명월관으로 갔다. 명월관은 상당히 고급 건물이였다.
집도 좋거니와 정원도 밤에 보아 자세히는 알 수 없어도 상당한 모양이었다. 어린 기생도 4~5인 있었다.
춘원 이광수, <동경문인회견기-동경 구경기의 계속-(2)>, 《조광》,1937.3.

동경 명월관의 특징

사진엽서를 통해 본 동경 명월관은 상당한 규모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건물 내부에는 냇물이 흐르고 석등이 있는 등 아주 잘 꾸며져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런 명월관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가 않다.
하지만 명월관의 팜플인 《조선독본》이라는 자료가 아직까지 존재한다. 그 자료에는 동경 명월관에 대한 설명이나 홍보에 대한 글귀들이 있는데, 아래는 동경 명월관이 선경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는 설명이다.

명월관은 왜 선경(仙境)이라 불리는가?'

속세의 장안, 도쿄시의 한가운데인 산노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앉아서 우아한 정원을 바라보며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노라면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금강산이 절로 떠오릅니다. 마치 속세를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멀리 떠나 온 듯하여, 바쁜 일상의 피로를 잊을 수 있습니다. 또한, 보료 등 조선의 용품과 기생의 서비스까지, 마치 조선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인삼주는 조선특산의 인삼을 사용한 불로장생주입니다.
금강산 잣나무의 잣을 안주삼아 인삼주를 맛며 선녀처럼 아름다운 기생의 춤을 보노라면 속세를 떠나 선경에서 노는 듯한 길몽에 취할 것입니다.


위의 글을 보면, 동경의 한가운데인 산노지대에 위치한 명월관은 '마치 속세를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멀리 떠나 온 듯하여'라는 구절을 보아 상당히 큰 규모의 요리집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큰 요리집인만큼 일반인이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이 만든 명월관이라고 할 수 있는 호시오카사료(星岡茶寮)와 마찬가지로 정계나 재계 인사들이 찾았다고 한다.

그럼 동경 명월관의 이용 요금은 얼마정도였을까?

<탁식>(卓式)은 20엔에서 60엔까지 5종류이고, <정식>은 송이 3엔, 죽이 5엔, 매가 7엔이다. 그리고,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점심정식>은 1.5엔과 2엔으로, 이틀 가격표 밑에는 <죄송합니다만, 여종업원 등의 수당으로서 계산금액의 1할을 받습니다.
양해해 주시기바랍니다>라고 씌여있다. 당시 (1937년)의 공무원 초임이 75엔(《가격사연표》아사히신문사, 1988년)이었으니 명월관의 탁식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덧붙이자면, 라면이 10전(1930년), 카레라이스도 10전(1931년)이었으며,
에도마에스시(*도쿄식 스시)는 25전 (1935년)이었다.

이런 비싼 요릿집이었던 만큼 연회나 여흥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존재했다.
보통 일반적으로 실시하는 것이 승무, 겸무, 춘학무, 광대춤, 촌극 등을 시작으로 가야금,양금, 장고, 현금, 단소, 해금 등의 악기 연주이며 그리고 노래로는 클래식은 물론이고 유행가 및 풍자적인 노래와 에로틱한 노래까지 있습니다.
조선 명월관의 경우 요릿집의 기능과 연회, 유흥의 기능이 복합되었던 공간이었다. 동경 명월관 역시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팸플릿 《조선독본》에 나타나 있는 위와같은 자료를 보면 음악을 곁들일 수 있는 공간이 존재했으며,
클래식과 같은 장르도 들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손님들의 다양한 취향까지 고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동경 명월관의 위치

동경명월관은 1936년부터 그 행방이 묘연하다. 근처에 있었던 호시오카사료의 경우1945년 5월25일 공습으로 인해 전소되었다고 하는데,
만약 그때까지 근처에 있었다면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크다.
1932년 10월1일 부 《도쿄전화번호부》을 보면, <명월관 조선요리점 긴자 57~0057
긴자57~3009,코지, 나가타, 2~82>로 되어있으며, 마찬가지로 노경월이라는 이름이기록되어 있다. 1931년 10월1일에 발행된《도쿄전화번호부》에는 주소가 아직 요츠야로 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1932년을 전후하여 나가타로 이전했음을 알 수 있다.
1931년 당시의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비교하면서 확인해 보니,
명월관의 위치는 나가타초 2~13번지 근처로, 호텔 뉴재팬이 있던 자리에 해당한다.

성강다료(星岡茶寮)

조선과 동경에 명월관(明月館)은 전통요릿집으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전통요리를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회와 유흥을 곁들일 수 있는 공간으로 정,제계 인사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일본 전통요리집이 있었다. '별의 언덕 찻집'이라고 불리는 호시오카사료(星岡茶寮)가 바로 그곳이다.

성강다료 개관이야기

조선의 명월관이 조선전통음식을 가장 완벽하게 복원한 요리집이라고 한다면, 일본에는 호시오카사료(星岡茶寮)가 일본전통음식을 가장 훌륭하게
재연한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일본전통음식점인 호시오카사료(星岡茶寮)를 개관한 하치로베에의 경우 조선 전통음식점 명월관의 주인인 안순환과 비슷한 이유로
호시오카사료를 개업하게 되었다.

호시오카사료가 개원하게 되는 원인은 에도 막부 시절로 거슬로 올라간다.
에도 막부 말기 궁중출입이 가능한 요리사인 어정방(漁精方)은 카와치야, 단바야(丹波屋)와 나가히마야(長濱屋)의 3명이었다.
하지만 메이지 2년인 1870년에 니시노야(西納屋)가 더해져 4명이 되었다.
하치로베에의 경우에는 어정방의 카와치야에 소속된 요리사로서 황궁에 어육(漁肉)을 공급하고 상정(想定)하는 일도 곁들여서 하고 있었다.
메이지 4년인 1871년, 천황이 즉위하고 처음 거행되는 제 (천황이 즉위하고 처음 지내는 제사)가 있었다.
그 제(祭)는 즉위식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카와치야(생선을 조달하는 업무)의 하치로베에를 중심으로 제사 요리를 훌륭하게
만들어서 칭찬을 받게 되지만, 12월에 들어서 아무런 예고 없이 해고된다.
해고가 되어버린 3명은 원통하고 분한 마음에 교토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하치로베에는 도쿄에 남을 결심을 했다.
그리고는 어느 날, 홀로 도쿄에 남게 된 하치로베에는 니혼바시(日本橋) 수산물 시장을 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시장의 엄청난 규모와 풍부한 생선의 종류에 암도당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하치로베에는 해고 당한 뒤에도 황족의 집안을 위해서 생선을 조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지의 신정부는 빠르게 변했다. 많은 부분에서 서양화 되자, 일부 상류계급에서는 일본전통요리를 부정하는 풍조마저 나타났다.
이렇게 시대가 변해가자 하치로베에는 카와치야(河□屋)로서의 일은 자꾸자꾸 없어져 갔다.

메이지 7년인 1874년 1월 16일. 하치로베에는 특별한 인연을 만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죽임을 당할 뻔한 사람을 도와주게 되는데 그는 천황의 측근인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였다.
그 둘은 이 일을 개기로 해서 서로 둘도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하치로베이는 다른 많은 일들을 하며 자금을 모았다.
이 후, 자금의 여유가 생기자 서양 요릿집인 록명관에 대항한 요리집을 만들려고 생각하고 계획했다.
호시오카사료(星岡茶寮)라고 이름붙인 자신의 요리점을 일본전통이 숨 쉬는 곳으로 만들길 원했따.
그리고 외국인이나 정부의 고관들이 드나드는 사교장(社交場)역할과 느긋하게 쉴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서의 기능도 갖추고 싶어 했다.
특히, 그는 이런 공간을 교토의 느낌이 나게 지으려고 했는데, 일부러 교토에 있는 목공과 목재,그릇, 돌 등을 가져와서 활용하였다.
메이지 17년인 1884년 6월 15일. 록명관에서 대무도회가 개최되고 있을 때, 호시오카사료는 개업식을 맞이했다.

성강다료 모습

하치로베에는 호사오카사료의 거의 모든것을 교토풍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면적 650평의 산노우(山王)숲을 교토 사원 경내와 같은 분위기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교토와 같은 형식으로 굵은 자갈을 문에서 다실 현광까지 깔아 놓았으며, 길의 양측에는 교토에서 가져온 벚꽃으로 수놓았다. 그리고 돌층계는 자연석으로 되어있다.
각 문의 현관 앞에 좌측으로 6조(다다미)의 종업원 방이 있으며, 현관을 들어가면 좌측으로 맹장지가 있어 6조의 사무소가 있다.
현관의 토마루에서 마루방으로 들어가면 우측이 6조(다다미)의 사야의 방으로, 그 안쪽에 4조반의 방이 있으며 안뜰에 배치되어 있다.
안뜰이 반대방향에 떨어져서 화장실이 있다.
현관에서 쭉 뻗어있는 폭 6척의 복도는 옆에 마루를 배치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사람이 걸으면 규-규-라고 작은 소리가 난다.
그 복도 끝 좌측으로 2층 계단이 있으며, 안쪽에 교토의 팔신(八新)의 궁리를 참고로 한 욕식이 있다.
복도의 우측은 12조(다다미)의 넓은 방이 2칸, 그 사이를 나누듯이 5조(다다미)가 있다.
하지만 교토에 있는 호시오카사료는 모든 맹장지를 뗴어 27조(다다미)의 넓은 방으로서 사용하게 되어 있다.
객실의 우측은 미달이문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을 열면 녹색으로 되어 있다. 2층에는 좁은 사이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